김정일 죽음에 “쫄지마,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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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춘훈(언론인)

노벨문학상 시상 때 단골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한국의 문인은 고은 시인입니다. 2년 전 한반도의 민초 3000여명을 20여년에 걸쳐 노래한 연작시집 <만인보>가 출간되면서 그의 이름은 국제사회에도 많이 알려졌습니다. 그 무렵 고은 시인은 북한주민의 참상을 묻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지요.
“… 내가 현장에 가보지 않는 한 알 수가 없죠. 파편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나 소문만으로는 알 수가 없어요….”
고은 시인은 89년 1월 한겨레신문에 ‘무아마르 카다피 대령에게’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 당신은 까딱했으면 지난해 ‘레이건 람보’한테 죽을 뻔 했다… 미국은 세계 경찰국가의 못된 패권으로부터 그들 자신의 도덕을 회복해야한다… 당신이 아직도 대령 계급장을 고수하는 괴벽을 퍽 고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편지를 받기 한달 전 카다피는 런던에서 뉴욕으로 가던 팬암 여객기를 폭파해 270명의 무고한 생명을 죽였습니다. 비행기가 폭파당하는 것을 직접 보지 못해선지 <만인보>까지 쓴 ‘생명의 시인’ 고은은 희대의 독재자 ‘카다피 대령’에게 낯 뜨거운 헌시를 바치고 있습니다.
굶겨 죽인 사람까지 포함하면 카다피 보다 몇 십 배는 더 많은 사람을 죽인 독재자가 북한의 김정일입니다.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나고 온 남한쪽 정치인과 기업인 중에도 침이 마르게 그를 칭찬하는 인사들이 있습니다. “식견이 있고 판단력이 뛰어나다. 머리회전이 빠르다. 솔직하다. 통이 크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김정일을 “두뇌회전이 빠르고 판단력이 예리한 사람 같다”고 평했습니다.


남쪽의 김정은 서포터들


판단력과 두뇌 회전이 빠른 김정일이 죽고, 초고도 비만형의 미련스러워 보이는 스물아홉살 배기 셋째아들 김정은이 북한의 새 지도자가 됐습니다. 직접 가보지 않아 모르겠다고 북한의 참상을 애써 외면하던 남쪽 인사들이, 이번엔 김정은을 도와주자고 나서고 있습니다. 김정일의 급작스런 죽음에 이어올 북한의 권력 교체기에 한반도 정세가 안정돼야 하는 건 당연한 과제입니다. 북한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필요도 없겠지요. 휴전선 근방 애기봉에 세우기로 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철거키로 한 한국정부의 결정도 이해합니다.
당장에야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김정은의 3대 세습은 불안정한 체제입니다. 그가 제거되고 군부 강경파가 등장할 수도 있지만 후르시초프나 고르바초프, 등소평 같은 온건 개혁개방파가 나서 북한을 변화시키면서 통일을 앞당길 수도 있습니다. 김정은은 지금 대부분의 북한주민들조차 잘 모르거나 그의 3대 세습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맹자단청(盲者丹靑)같은 존재입니다. 북한 주민들이 빙충맞게 바라보는 김정은을 남한 사람들이 괜시리 ‘쫄아서’ 도와주자고 나서는 건 공연한 ‘죄업망상’ 같기도 합니다.


존 매케인의 ‘축! 사망’


북한 이슈는 내년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도 쟁점이 될 것 같습니다. 캠페인 중인 공화당 후보들이 일제히 나서 “오바마의 북한정책은 완전 실패”라며 정책 변화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그제 김정일의 죽음을 ‘축하’하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지요.
“… 김정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됨으로써 세계는 한층 더 좋아졌다. 60년 이상 북한 주민들은 세계 최악의 전체주의 체제에서 폭압과 가난에 신음해 왔다. 김정일이 카다피, 빈라덴, 스탈린과 함께 지옥에 떨어져 함께 있게 됐다는 사실이 만족스럽다. 김의 사망은 북한 주민들의 오랜 고통을 끝내고 동북아와 세계의 안보를 지켜낼 수 있는 역사적 기회다….”
한국의 유명 정치인 중엔 이와 비슷한 성명조차 낸 사람이 없습니다. 제 1야당인 민주통합당, 제 2야당인 통합진보당, 참여연대, 진보연대 같은 좌파단체는 경쟁적으로 조의 또는 애도 성명을 냈습니다. 민주당은 조문단 파견도 주장합니다. 외국 조문단은 안받겠다고 북한이 밝혔는데도 못가서 안달입니다.
좌파단체들은 분향소도 설치할 예정이어서 우파단체들과의 물리적 충돌이 우려됩니다. 지난 94년 김일성 사망 때도 종북단체인 범민련은 판문점을 통해 조문단 파견을 시도했고, 한총련이 대학 내에 설치한 분향소가 강제로 뜯어지는 등 소동이 빚어졌지요. 우려했던 남남 갈등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금수산 궁전 유리관 속에 누워있는 김정일이 벌떡 일어나 박수라도 칠 것 같습니다.


안철수 문재인 박근혜 vs 김정은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내년 12월 19일 치러집니다. 지난 19일 대선 D-1년 기념 특집으로 동아일보와 한겨레신문은 대선 관련 전문가 진단 및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내년 대선도 2007년처럼 경제가 선거의 흐름을 좌우하는 핵심의제가 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2007년엔 경제성장에 대한 기대가 이명박 대통령을 탄생시켰지만 내년엔 분배와 복지, 경제정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공존경제’가 대선의 화두가 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대선에서 부각될 이슈로는 경제 위기와 세대․계층 간 갈등을 꼽은 전문가가 많았지요.
다음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제1의 자질로 소통과 사회통합 능력을 꼽은 응답자가 많았습니다. 도덕성과 공평성, 국민을 위하는 공적 헌신, 자기희생을 보여주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다수였습니다.
이 조사는 김정일 사망 발표 직전에 실시된 것입니다. 김정일의 사망과 감정은의 등장으로 인한 한반도의 정세불안으로 차기 대통령은 경제뿐 아니라 안보 및 국가보위 이슈에서도 탁월한 식견과 판단력, 남북 화해협력과 민족통일에 대한 나름의 소신과 비전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는 명제가 주어졌습니다.
한겨레신문은 내년 18대 대통령 선거가 박근혜와 안철수, 문재인의 3자 대결구도로 가게 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일반 여론조사가 아니라 30명의 정치전문가에게 물어본 조사결과지요. 학자와 정치평론가, 여론조사 전문가인 이들은 내년 대선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은 인물로 안철수(7), 문재인(5), 박근혜(3)를 차례로 꼽았습니다. ‘야권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답한 전문가 4명을 포함하면 범야권 당선을 전망한 사람은 모두 16명으로, 박근혜를 지목한 3명을 크게 앞섰습니다. 11명은 ‘당선자를 예측할 수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박근혜가 문재인보다도 뒤쳐진 건 다소 의외입니다. 한겨레신문의 성격상 조사대상 전문가가 진보좌파 쪽 인사로 편중됐을 가능성도 조금은 있습니다. 야권의 최종예선 후보로는 문재인이 10명으로 가장 많았고 안철수(5), 김두관과 손학규(각 1) 차례였습니다. 여권후보로는 박근혜가 될 것으로 본 전문가가 27명으로 압도적이었습니다.
박근혜-안철수-문재인의 자질에다 ‘북한 변수’를 대입시켜 새로운 조사를 해보면 어떨까 싶네요. 쉽지 않은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박근혜는 여성이라는 취약성, 안철수는 유약해 보이는 성품, 문재인은 친북좌파적 고정 이미지가 국민의 판단과 선택을 어렵게 할 것 같습니다.
북한의 새 통치자 김정은은 공식적으로 ‘대장동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만년 대령’을 고집한 카다피의 괴벽을 사랑했다는 고은 시인은 어느 날 갑자기 대장이 돼 북한주민들 앞에 200파운드의 거구를 뽐내며 나타난 김정은을 어떻게 보고 있을 지 궁금합니다.
“내가 직접 가서 보지 않는 한 알 수가 없죠….”
이런 모범 답변이 나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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