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덕 목사, 한국문화회관 창립 4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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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한인사회에서 70년대부터 한국문화를 주류사회에 전파시키고, 북한과 중국과의 문화교류에 힘써온 한국문화회관(Korean Cultural Service, 창설자 이광덕 목사)이 지난 21일 창립 4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Expo 아만손 노인센터회관에서 개최된 기념대회에는 창립자 이광덕 목사를 비롯해 박영창 미주광복회명예회장, 미주기독교총연합회장인 송정명 목사 등 약 50명의 내외인사들이 참석해 창립 40주년을 축하했다. 한국문화회관은 지난 1972년 LA 한인타운에서 우리문화전통보급과 민족화합을 목적으로 주정부와 연방정부인가를 받아 개관했다. 창립자 이광덕 회장은 “미국에서 자라는 후손들에게 모국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기위해 한국문화회관을 설립됐다”며 “미국은 물론 세계에 한국고유문화를 소개하여 조국을 재인식하도록하는 사업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편집자주>
 
한국문화회관은 한국문화를 미국인들에게 알리는 비영리단체로 한때 청와대등으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했었지만 정치적으로 박해도 받아 한때 잠정 폐쇄 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창립자 이광덕 목사와 지지자들의 헌신으로 지난 80-90년대는 미주사회와 중국과 북한과의 선교문화교류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 했었다.

중국의 동포예술단인 ‘연변조선족예술단’의 최초 미국방문의 다리를 놓았으며, 북한에 ‘사랑의 쌀 보내기 운동’의 시초를 만들기도 했다. 특히 지난 2002년 4월21일 USC대학교캠퍼스의 ‘타운 앤 가운홀’에서 창립 30주년기념 행사 때는 한인사회와 미 주류사회에서 150여명이 참석한 성대한 행사였다. 이날 행사의 사회는 NBC방송의 소냐 클로포드가 맡았고 넬슨만델라의 비폭력세계평화운동부총재인 김홍기 박사의 기조연설 ‘내일을 위한 선택’으로 진행 됐다.













 
이날 참석자들은 30년간의 지나온 발자취를 뒤돌아 보고 다문화•다인종사회에서 한국인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중요사업으로▲국민회관복원사업협력▲동포복지문화사업▲법률봉사▲전통문화미디어센터설립▲해외협력사업 등을 기획했다.
한국문화회관은 2000년 이후로는 주로 미 주류사회와의 연결로 커뮤니티 발전 사업에 관심을 두었다.


에너지절약 지원금 받아


지난해 4월 한국문화회관은 LA 자원보존협회에서 열린 LA 수도전력국(DWP) 에너지절약홍보 그랜트전달식에서 LA시 10지구지원 대상단체로 선정돼 4만 5,000달러의 지원금을 받았다. 이날 전달식에서는 한국문화회관을 포함 총 25개 비영리단체가 지원대상자로 선정됐다.
한국문화회관의 이진형 비즈니스개발디렉터는 “이 지원금을 이용해 앞으로 한인 타운을 포함한 10지구지역을 대상으로 에너지절약홍보활동을 적극 벌여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국문화회관은 2005년 11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1374 W. Jefferson Blvd., LA)에서 ‘스몰비즈니스엑스포’를 개최했다. 당시 연방중소기업청(SBA), 연방주택개발국(HUD),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등 정부기관이 참가해 비즈니스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대출방법 등을 소개하며 E2/EB5 투자비자 취득법에 대한 웍샵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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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년 5월 7일 ‘전국 기도의 날(National Day of Prayer)’을 맞아 한국문화회관과 비영리단체인 아시안아메리칸팀스(대표 이진형)는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JJ그랜드 호텔에서 기도회를 가졌다. 이날 참석자들은 ‘자유의 종을 울려라’란 올해의 주제로 국가와 가족 등을 위해기도 했다.
한국문화회관은 창립 31주년인 지난 2003년에 ‘국가를 위한 기도회 및 법의 날 자유캠페인’행사를 개최했다. 다민족 행사로 펼쳐지는 31주년기념행사장에서는 각 기관들의 부스도 설치돼 노인의 권리, 청소년보호, 크레딧 사항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가 제공되고 상담도 이뤄졌다.
또 마크리들리-토마스 주하원의원에 대한 특별상 시상식도 행하였다.

한국문화회관은 지난 2002년 9월 3일 중국조선족자치주 창립 50주년을 맞아 이를 경축하기 위해 미주동포 참관단이 연변을 방문해 축하했다. 당시 조선족자치주정부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은 참관단은 예술단과 실업인단, 일반방문단으로 구성되어 경축 행사에 참가했다. 공식 행사 후 참관단은 백두산과 두만강, 용정, 만리장성, 천안문, 자금성 등을 관광했다.

















 ▲ 한국문화회관 창립 4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다.

중앙정보부 탄압


LA총영사관은 지난 2006년 11월 30일로 마감한 한인들의 진실규명 신청건수는 총 2건으로 항일 운동사와 해외 동포사 관련이었다. 이중 중앙정보부의 해외동포사회에 대한 공권력남용은 한국문화회관의 창립자인 이광덕 목사에 의해 접수됐다.

이 내용은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1973~1974년 LA외환은행에 압력을 행사해 남가주한인비영리단체인 한국문화회관을 폐쇄시키는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이목사가 밝힌 진실규명요청서에 따르면 당시 LA총영사관에 파견된 중앙정보부요원인 P모 영사는 ‘KD LEE 트레이딩 컴퍼니’의 대표인 이 목사를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요원의 정적인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 측 인사로 분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이 목사의 거래 은행인 LA외환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해 부당한 차압(Foreclosure)을 강요케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문화회관의 자금원 역할을 담당하던 이 목사 운영회사가 도산하며 1972년 남가주의 한인비영리단체로 정식 등록한 한국문화 회관마저 운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 목사는 밝혔다.
이 목사는 30여년 전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요청한데 대해 “당시 중앙정보부요원의 압력에 의해 피해를 당한 한인들이 많았다”며 “너무 오래된 일이라 신청을 하지 않을까하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LA를 방문, 접수를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었다.

1972년 김종필 국무총리로부터 국민훈장을 수여받기도한 이 목사는 중앙정보부의 압력가능성에 대해 “1973년 시애틀공항에서 우연히 트루먼대통령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 김 국무총리일행과 조우한 일이 있다”며 “아마 이후락 직속인 중앙정보요원이 이 같은 일등 때문에 나를 김 국무총리 측 인사로 오해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의혹에 대한 진위 여부는 당시 LA총영사관에 근무했던 소상영 당시 총영사 등 관계자들에 의해 입증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당시 LA총영사를 이 사건의 증인으로 지목한 이 목사는 “LA총영사관에 파견된 또 다른 중정요원이 사업체가 망한 직후 5,000달러를 도움 받을 수 있도록 편지까지 써 줬었다”며 “당시 LA총영사관에 근무했던 이들이 진실여부를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 했었다.








 





창립자 이광덕 목사 ‘북한억류 3개월’

북측, 간첩혐의로 억류, 익명의 투서도

한국문화회관의 창설자인 이광덕 목사는 지난 1998년 5월말부터 8월말까지 3개월간 북한에서 억류당해 큰 고초를 겪었다. 당시 이 목사의 억류 사건은 국내외로 주목을 받았으며, LA타임스 등 미 주류 언론으로부터 집중조명을 받기도 했다.
북측은 이광덕 목사를 3개월간 억류하면서 간첩혐의 등을 입증하기위해 취조하기는 했으나 고문 등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이 목사는 기독신문에서 밝혔다.
『내 잘못을 조목조목 기록한「고백서」를 미리 작성해 가지고와서 자꾸 읽으라고 해서 여러번 읽어야 했죠. 사진기자 앞에서도 그랬습니다. 북측은 내가 스스로 죄를 자인하도록 선전하고 싶었나 봅니다.』












 ▲ 1972년 개관 당시 한국문화회관의 모습.


이광덕 목사가 3개월간 억류된 곳은 라진시 한 호텔. 이곳의 한 객실에서 이 목사는 하루 3끼와 잠자리를 해결 했다. 밥과 반찬은 소위 이밥(쌀밥)과 고깃국 감자국 등. 이른바 북측의 최고대접인 셈이다. 그러나 이 목사는 석방된 후 3개월간의 호텔비 식사비 병원비로 무려 4000불을 지불, 그 댓가를 톡톡히 치렀다.
이 목사가 묵은 호텔은 시설은 좋았지만 더운 물은 없었다. 이 목사는 호텔에서 평상시 파자마 차림으로 생활했다. 북측은 억류 한달 반이 지나자 이발사를 불러 이발을 시키기도 했다.
『이발한지 얼마 안돼서 스웨덴대사와의 면담이 있더군요. 또 석방 10일전쯤 호텔옥상에서 하루 2시간의 일광욕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염색까지 해 주데요. 저는 싫다고 했는데 북측은 들어 올 때 까만 머리가 하얀 상태가 돼서 나가게 되면 안된다구 하더군요』
북측이 3개월 억류기간 중 이 목사의 건강상태에 대해 매우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목사는 일광욕을 너무해 피부가 벗겨지기도 했다.
한편 이광덕 목사는 비롯 3개월간 억류를 당하는 수난을 겪었지만 「선교적 차원에서 북한에 들어간 것」이라며 앞으로도 하나님 뜻이면 「다시 북한에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당시 이광덕 목사는 라진고려식품합영회사 대표자격으로 북한의 경제특구인 라진선봉에 위치한 국수공장의 노후설비 교체 및 장공장 설립 등을 목적으로 방북 했었다. 이광덕 목사는 97년 7월부터 라진선봉시행정경제위원회와 식품회사를 합영으로 운영해 왔으며, 당시 방북기간중 합영회사의 한국측 이사인 김민숙(시민사진관대표), 정남열(서울예장총회신학교 학장) 한만영(서울부활의교회 목사), 서정원(크리스찬선교뉴스 대표) 김진하(이벤트상사 대표) 임백주(장기술자)씨 등 교계 인사들과 만나 회사운영 및 북한 내 극빈자무료급식 등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한편 이 목사는 평양출신으로 한국 전쟁 때 단신 월남한 뒤 60년대 초 도미,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이후 아주문화중심, 고려문화센터 등 단체를 만들고 수십 차례 북한을 오가면서 이산가족상봉과 대북구호•투자•문화교류 사업을 벌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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