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삼성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 25년전 충격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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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최대의 재벌 삼성가의 두 형제의 1조원에 이르는 재산싸움은 삼성의 부도덕성을 세상과 국민 앞에 드러낸 단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돈 앞엔 형제 부친 조카 혈육에 상관없이 서로 짓밟고 폭로하고 시정잡배들만도 못한 수준 이하의 저질 인신공격 싸움에 국민들은 아연실색할 뿐이다. 탐욕과 오욕 그리고 배신만이 난무한 삼성가 형제들의 천문학적 상속권 소송 원인은 결국 부친 고 이명철 회장의 실패한 수신제가에서 비롯된 것이나 다름없다. 떳떳치 못한 부친의 치부과정을 둘러싸고 전개된 재벌가의 막장 폭로전은 새삼스런 것이 아닌 2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 인터뷰는 <선데이저널>이 지난 1987년 3회에 걸쳐 간추려 보도한 내용으로 당시 인터뷰 전문을 일본어판으로 출간할 예정이었으나 불발로 그친 미공개 내용으로 삼성가의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 씨의 육성 인터뷰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25년 전 이맹희 씨를 직접 인터뷰한 기자는 당시 J여성월간지의 L기자였다. 갖은 고생 끝에 인터뷰에 성공한 L기자의 원고는 월간지에 게재되지 못했다. 삼성의 집요한 방해와 설득으로 발행인이 삼성측과 모종의 합의로 보도가 불발 되자 L기자는 원고를 <선데이저널>로 넘겼다.
그리고 일단 3회에 걸쳐 본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일본에서 일본어판으로 출간하려했으나 한 사이비 전직 언론인(작고)이 우연히 일본에 왔다가 문제의 원고를 탈취,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국에서 <이병철과 삼성왕국>으로 책을 출간하자 삼성은 즉각 이 문제의 사이비 언론인을 고소했고 희대의 사이비 언론인은 이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인쇄된 책 전량을 삼성이 회수 조치하는 조건으로 합의해 풀려나는 등의 일대 사건이 벌어졌었다. 
<선데이저널>은 이번 이건희-이맹희 두형제의 재산소송으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으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삼성가의 숨겨진 내막을 삼성가의 맏형이자 이번 소송의 주체인 이맹희 회장의 25년 전 육성 인터뷰를 통해 공개하기로 했다.
이번 기회를 통해 25년 만에 L기자의 노고에 경의와 고마움을 전한다.
                                                                                                         <편집자주>


특별연재<1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048
특별연재<2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066
특별연재<3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079



이건희-이맹희 두 형제의 추잡한 재산싸움이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넘치도록 가진 자들이 더 갖겠다고 맹자단청(盲者丹靑)식 골육상쟁을 벌이는 꼬락서니가 역겨워 도리질을 하는 국민이 많으나 일각에서는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다. 이른바 삼성의 ‘사도세자’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 씨는 한은 간직한 채 삼십년의 세월을 주유천하하며 철저히 세상과 등지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30년이 지난 올 초, 이맹희 씨는 동생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부친의 차명재산을 달라며 소송을 제기하자 동생 이건희 회장은 저주나 다름없을 정도의 극언을 퍼 부으며 하나 뿐인 형을 상대로 ‘상대도 되지 않는 수준이하의 자연인,  내 앞에서 얼굴도 못 드는 사람, 가문에서 퇴출된 위인’ 이라는 등 인신공격을 퍼 부으며 공개망신을 주었다.
형인 이맹희 씨의 공격도 만만치 않았다. “건희가 어린애같은 발언을 하는 것을 듣고 몹시 당황했다. 삼성을 누가 끌고 갈지 걱정이다.” 이맹희 씨는 또 “형제간에 불화만 가중시키고 늘 자기 욕심만 챙긴 것은 건희다.”라며 두 형제들은 막장 행태를 보여주었다.
한국 최고의 재벌가인 삼성가의 형제들의 소아병적이고 오만방자한 행태에 국민들은 혀를 내둘렀다. 삼성가에서 파문을 당하고 총수자리를 동생에게 뺏기며 30년을 한을 품고 살아야 했던 그 원인은 무엇이며, 무슨 이유로 파문을 당해야 했으며 부친에게 어떤 연유로 눈 밖에 났었는지 그 내용들과 이병철의 치부과정 홍진기의 역성혁명의 전모를 비롯해 엘리베이터 걸 사건, 그리고 삼성가의 여성편력 등 지금까지 어떤 언론에서도 알려지지 않았던 삼성가의 추악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이맹희 씨 스스로의 25년 전 육성 인터뷰를 통해 전해본다.



외딴 바닷가에서 수년째 혼자 기거


기자가 86년 봄 삼성트로이카 체제 중 한사람이었던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의 작고와 더불어 새롭게 나돌기 시작한 몇 가지 이상한 소문들 중, 다시 일기 시작한 <삼상후계자설>을 취재하며 삼성그룹 핵심부의 몇 인사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런 저런 말을 하면서도 삼성 측 인사들은 이맹희에 관한 말만 나오면 한결같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애써 회피하는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말인 즉 “이맹희 씨는 이제 나이(당시 56세)도 나이고 사냥이나 하며 주유천하하는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기자는 지나간 삼성에 관계된 사건이나 자료들을 들추어 보는 한편, 어쩌면 깊은 사연을 안고 있을지도 모를 이맹희를 만나기 위해 그와 과거 친했던 친구나 삼성 관계자, 또 이맹희의 부인 손복남 여사가 대주주로 있는 안국화재보험(지금의 삼성생명) 등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수소문하고 다녔지만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다. 다만 들리는 이야기로는 부산 대구 경북 영해 서울 등 정해진 거처 없이 이곳저곳 전전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몇 개월에 걸친 추적 끝에 정작 이맹희를 만날 수 있었던 곳은 동해안의 외진 어촌 마을인 영해 바닷가에서였다. 강릉에서 시작해 삼척, 울진, 평해, 영해로 이어지는 동해안 해안도로를 따라 영해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경, 영해 읍 거리는 어둠 속에 묻혀 있었고 행인들의 모습도 드문드문 했다. 터미널에서 가까운 <모화다방>이라고 간판이 걸린 곳을 들어서니 주인으로 보이는 40대 아주머니가 카운터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차를 시키면서 기자는 혹시나 싶어 “이맹희 씨 사는 곳을 아느냐?”고 물었다. 주인여자는 다소 졸음이 섞인 말이었지만 뜻밖에도 명쾌하게 나왔다.
“택시타고 2천원이면 가요. 바닷가 별장가자고 하면 모르는 운전사가 없을 겁니더..마, 그 회장 별장 집 관리인 정씨도 우리 집 단골아입니꺼…”
기자는 계속해서 이맹희에 대한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지만 주인여자는 자신은 말만 들었지 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다음 날 관리인 정씨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주인의 약속을 뒤로 하고 택시를 탔다. 차가 달리던 도중, 기자는 택시기사에게 이맹희에 관해 물어 보았다. 그런데 그 택시 기사는 이맹희 씨를 여러번 보았다고 서슴없이 이야기했다.
“아마 재작년(85년) 8월 무렵일 건데 별장 신축 공사를 하면서 자주 만났었지요. 그 때는 나뿐만이 아니라 영해 사람들 꽤 여럿이 거기서 날품팔아댔지요. 회장님(영해주민들은 이맹희를 회장님이라고 불렀다)은 벽돌 쌓고 짐 나르는 우리들 틈에 섞여주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한마디로 와(있는 사람) 티내지 않고 털털합니다. 그런데 이 밤중에 그 별장 집에는 와 가능교?”
한바탕 신나게 이야기를 털어 놓던 기사는 “왜 그러느냐?”는 질문을 던지고는 말꼬리를 사렸다. 기자는 일단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냥 서울에서 회장님을 만나려고 내려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택시기사는 “내가 듣기로는 회장님은 서울 생활이 복잡하고 답답해서 내려와 산다카던데… 저번에도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사람들을 집까지 태워 주었는데 그 사람 회장님 못 만나고 그냥 올라갔다고 그랬제, 아마…. 그라고 마 요즘에는 회장님도 잘 안보입니다요”
택시기사는 별장 정문 앞에서 기자를 내려 주었다. 사방은 캄캄하고 고요했다. 어둠 속에서도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2층 별장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였다. 환하게 켜진 별장의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온 때문이었다. 별장 앞 1백미터부터는 바로 해변이었다.
서울에서 수백리나 떨어진 이 곳 외딴 바닷가 마을 별장에서 한국 제일의 재벌 맏아들 이맹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내고 있을까? 별장 안에서 환하게 뿜어져 나오는 불빛들이 그런 궁금증에 빛을 더해 주었다
(중략)
영해 주민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드린다면 이맹희는 알려진 대로 <포악한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맹희의 아버지 이병철은 85년 신현확 전 국무총리를 삼성물산 회장으로 영입한 후 가족관계를 물어보는 신 회장에게 맹희를 두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어느 좌석에서 말했다고 한다.
<맹희는 성격이 포악하고 낭비벽이 심하다. 골프채를 휘둘러 사람을 폭행하는가 하면 친구에게 무턱대고 자동차를 사주는 등 절제 없는 생활을 한다. 내 곁에서 떠난 후로는 생활비를 한 푼도 주지 않고 있다>
아버지 이병철이 자기 자식을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게 미워하고 소외시키는 것일까?
기자가 만난 영해 주민들의 일관된 이야기 하나는 “이맹희는 소탈한 성격이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일면도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략)



우여곡절 끝 이맹희와 만남 성사


다음날 세 차례나 집을 찾아가 신분을 밝히고 면담을 요구했으나 관리인의 완강한 제지로 문전박대를 당해야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실랑이를 벌였으면 이맹희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란 추측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맹희의 부재>가 사실이 아니라면 의도적으로 만나 주지 않고 있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기자가 묵었던 집 주인 이 씨의 목격에 의하면 엊그제 이맹희를 봤다는 것이고 만약 별장에 없다면 기자가 영해에 내려 온 이틀 사이에 영해를 떠났다는 이야기 밖에 되지 않았다. 기자는 마지막으로 하루를 더 묵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었다. 6시30분쯤 반백의 오십대 남자 한 사람이 천천히 별장 정문 밖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 시간 주위에 아무도 없었던 까닭도 있었지만 바닷가에 이르는 백사장은 아주 고요했다.
기자는 직감적으로 이 남자<반백의 오십대 남자>가 이맹희임에 틀림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별장에서 나온 그는 주위를 둘러보는 기색도 없이 곧바로 백사장 쪽으로 걸어갔다. 기자는 순간, 그를 불러 세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좀 더 별장에서 멀리 떨어진 후에 접근하기로 생각을 바꿨다. 그는 파도소리 철럭이는 해변을 묵묵히 걷기만 했다. 이제 막 일출이 시작된 동해 바닷가에는 수면 가득 황금빛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져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보일 듯 말듯 다리를 절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별장 근처의 어느 주민이 자기가 들은 말이라며 이 회장이 어릴 때 약을 잘 못써서 다리를 조금 전다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긴 백사장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맹희 부회장님이지요?>>
아무도 없는 해변의 침묵을 깨뜨리며 기자가 불쑥 소리치자 앞서 가던 그는 반사적으로 뒤돌아섰다.
기자가 다가가서 명함을 건네주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명함을 보지도 않고 기자의 얼굴만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 점 필자는 납치 위험도 겪은 이맹희가 낯선 사람을 경계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훨씬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런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기자가 내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여기까지 내려왔소.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관리실에 와서 실랑이를 벌인 친구인가 본데, 이 시골까지 내려온 건 안되었소만 그냥 돌아가소>
그러나 그가 이병철 회장의 아들 이맹희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기자는 그가 산책을 끝낼 무렵까지 끈질기게 따라 다니며 말을 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묵묵부답이었던그는 돌아오는 길에 비로소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주로 보통 때는 어디까지 산책을 나가십니까?>
<요 윗마을 병곡까지 약 6킬로 백사장이 끝나는 데까지요. 이른 새벽에는 공기가 좋아요>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별장에서 혼자 사신 다는데 적적하지는 않습니까?>
<…이런 생활도 벌써 12년째요. 이제 적적하고 말고도 없어요>
<그래도 가족들과 떨어져 살면 더 외로운 법일텐데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주말에 집사람하고 큰 아들 내외가 들르니까…>
<아드님은 뭘하고 있습니까?>
<….지금은 제일제당 경리과장으로 일하고 있지. 본인으로선 더 좋은 직장도 있었지만 저희 할아버지가 권해서 들어 왔지요>
이맹희의 큰 아들 재연 씨는 미국에서 국제법 공부를 마치고 곧바로 미국은행 FNCB (First National City Bank)에 취직한 후 싱가폴, 홍콩, 아프리카, 남미 등지를 돌며 회사 일을 하다가 갑자기 제일제당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재연 씨는 다른 일가친척들과 다르게 당초부터 자신의 힘으로 미국은행에 취직한 것은 아버지 이맹희의 지난 12년간의 유배생활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에 의해 12년간 소외당하고 배척당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곁에서 보며 성장했던 아들로서는 아픈 마음도 적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대학공부를 마치자마자 삼성이 아닌 미국은행에 자력으로 취지한 것도 남모르는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 이병철은 그것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주위의 시선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손자 재연에게 미국은행에 사표를 내고 삼성에 들어 올 것으로 요구했다. 그렇지만 재연은 처음에는 ‘삼성이 할아버지의 삼성이지 나의 삼성이 아니다. 나는 나의 길을 찾아 가겠다’라는 생각으로 거절의 뜻을 보였다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할아버지 이병철의 진노로 결국 삼성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병철이 손자 재연을 강제적으로라도 삼성으로 데려가려 한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병철의 속사정이 있다. 즉 명색이 할아버지인 자신이고 보면, 아들인 장남 맹희를 집안에서 쫒아내고 12년간 거들 떠 보지도 않았는데 거기에다가 친손자까지 내버려두면 바깥에서 보기에도 대 삼성그룹 총수로서 도저히 체면이 서지 않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알려지기로는 이병철은 아들 맹희는 자식 취급을 않는 대신에 손 여사와 손자 재연에게는 잘 대해주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며느리 손자까지 그렇게 했다가는 스스로 체면에 먹칠을 하는 결과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사실 이병철은 그의 4남 5녀 자식들 모두에게 골고루 아버지로서의 정을 주지 않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가장 아꼈던 자식으로는 넷째 딸인 이명희(당시 신세계 상무)와 이건희, 그리고 일본 소생에게서 태어난 이태휘 세 명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중 이명희는 최근 들어 급속도로 아버지와 멀어졌다.
할아버지의 반 강요에 의해 제일제당(현 CJ 그룹)에 입사했지만 최근 일본 소실에게서 출생한 태휘(당시 35세)가 제일제당에 대주주로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명색이 이병철가의 직계 종손인 재연의 위치가 말도 아니게 된 셈이다. 특히 일본 태생의 태휘는 85년에 삼성에 입성하면서부터 최근까지 그의 직권으로 열댓 명의 삼성간부들을 해고하는 등 삼성그룹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을 뿐 아니라 본처인 박두을 소생의 가족들과 불협화음으로 계속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 너무도 많아


이렇듯 이맹희의 아들 재연이 삼성에 들어 온 것은 할아버지 이병철의 뜻에 의해서였다.
이맹희의 말을 빌리면 그 자신이 현재 처지가 아들로 하여금 그 어렵다는 외국 은행에 취직했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
<솔직히 아버지인 내가 12년째 이렇게 놀다시피 하고 있는데 자식인들 어디 삼성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어요. 그런데 그것마저 할아버지의 눈에는 못마땅하게 비친 겁니다>
이맹희는 큰아들 재연 외에 다른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이것은 뒤에서 밝히기로 하자.
<별장에서 주로 하루하루를 어떻게 소일하면서 보냅니까?>
<뭐, 할 일이 있어야지요. 대부분 책을 보고 낚시도 하며 보내죠. 그런데 요즘은 고기도 잘 안 잡혀요. 여기 영해 사람들도 1년째 고기를 못 잡아 아주 형편이 어려운가 봅니다. 그런 사람들 보고 있으니 막연히 놀고(이 말을 할 때 그는 다소 상기된 듯한 표정이었다) 지낸다는 것이 어떨 때는 그래요….. 낚시 말고도 운동을 합니다. 요즘 들어 자꾸 살이 찌는 것 같아 다이어트도 하고 이렇게 산책도 하고….>
<혼자서 저 별장에 살고 있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주위에서는 ‘이맹희는 원래 사냥을 잘 다니고 주유천하하는 스타일이라서’라고들 하는데 그래서 입니까?>
기자의 질문에 이맹희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할 듯 말듯 망설이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는 사이에 발걸음은 별정 정문 끝까지 가있었다. 이맹희는 말없이 정문을 지나 별장 안채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기자 역시 불문곡직하고 그와 동행했다. 거실에 들어서자 비로서 그는 입을 열었다.
<차나 한 잔하고 가시오. 그래도 멀리서 여기까지 찾아온 손님이니…>
이맹희가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기자는 찬찬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중략>
응접실 찰 밖으로는 동해 바다의 푸른 물이 드넓게 펼쳐진 채 두 눈 가득 안겨져 왔다. 일부러 그렇게 설계한 듯 전망이 일품이었다.
그 자리에서 기자와 이맹희는 여러 시간에 걸쳐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내기 전 그는 “굳이 인터뷰라면 딱딱한 느낌이 드니까 나 자신이 한국 제일의 부잣집 맏아들로서가 아닌 보통사람으로서 피차 부담 없는 대화라면 얼마든지 좋다.”고 말했다.
그와 그런 대화중에서 느낀 어떤 일관된 분위기는 바로 대재벌의 아들로서의 권위의식이나 격의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대화의 주된 내용은 아무래도 그가 몸담아 온 삼성과 무관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맹희는 이야기 도중 자주 창밖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고는 했다.
그는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하고 싶은 말들을 차라리 저 망망한 대해 속에 몽땅 털어 놓을 수 있으면 시원 하겠다”고 말했다. <한 때는 삼성을 맡아 그룹 경영을 지휘했던 것으로 아는데 그 때 이야기나 들려주시지요>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과거 이야기인데 새삼스럽게 돌이켜 볼 게 뭐 있나?>
<그런데 내가 삼성에서 일했던 당시에 일어났던 ‘한비사건’이 워낙 문제가 컸었어요. 삼성에 대한 사회여론이 극도로 실추되어 있었으니까요 삼성으로선 최대의 위기라면 위기였지. 나로선 그 ‘한비사건’을 수습하려고 무진 애를 썼어요. 그리고 한비사건을 가라앉히고 부터 본격적으로 삼성의 이미지 재건에 착수했습니다. “한비사건의 오욕을 우리가 씻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경영쇄신에 박차를 가하다가… 뜻대로 안돼 물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맹희가 당시 <한비사건>의 해결을 위해 막후에서 애썼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한국의 어느 매스컴에서도 상세하게 알려진 바 없었다. 이병철은 <한비사건>이 발생했던 배경에 대해 그의 <호암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OTSA문제가 일사부재리의 원칙도 무시된 채 강제수사를 받게 된 배경에는 몇 몇 정치인의 공작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로서는 그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겠으나 장차 그 진상이 밝혀질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당시 권력의 중추에 있던 인물이 OTSA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한국비료 주식의 30% 증여’를 요구해 왔던 사실도 있다>>
그러나 어떻듯 이맹희는 이 <한비사건>을 계기로 운명적인 부침을 하게 된다. 여기서 잠시 삼성의 후계자 승계가 일시적이나마 이맹희에게 넘겼던 이 <한비사건>의 내막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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