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삼성가 황태자 이맹희 25년전 충격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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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66년 삼성그룹이나 이병철에게 통한의 일격을 안겨주었던 한비사건이 터졌다. 한비사건을 세간에서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불렸다. 이 사건의 주요 내용은 울산에 건설 중이던 한국비료의 자재 창고에 보관 중이던 요소 비료 원료인 OTSA 6톤이 시중에 유출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그 이전에 자재과 직원이 OTSA를 훔쳐 사카린 메이커인 금북화학(현 금양)에 팔아먹은 사람이 세관 당국에 적발돼 벌금을 물고 사법 처리된 사건이었으나 당시의 정치적 기류에 휩쓸려 재수사를 받게 된 사건으로 삼성의 간부들이 구속되고 총수 이병철이 물러나고 장남 이맹희 씨가 총수에 오르는 계기가 된 엄청난 사건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대서특필했으며 국회에서는 <한국 제일의 재벌이 밀수를 했다>고 규탄하면서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했으며 이른바 김두한의 국회 단상 오물세례를 퍼 부어 해외토픽에까지 날 정도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중대한 사건이었다.                                          <편집자주>


특별연재<1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048
특별연재<2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066
특별연재<3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079




이 사건으로 김두한 의원은 국회의원에서 제명되고 같은 해 5월 이병철은 <건설 중인 한국비료를 완성해 국가에 헌납하는 동시에 모든 사업과 직책에서 물러나겠다.>고 공식발표를 했다.
그러나 이병철의 공식발표에도 불구하고 사회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수사는 계속되었고 검찰은 이병철의 둘째아들이며 한국비료의 이창희 상무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으로 이일섭 상무는 문서파괴 및 업무상 배임혐의로 구속기소하고 성상영 부사장은 불구속 기소하는 한편 당시 김정렴 재무장관 등 고위 공무원과 밀수합동수사반의 검사들도 뇌물수수 혐의 여부로 소환조사를 받았다. 18일 만에 수사는 종결되었으나 이병철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최종수사결과를 끝냈지만 이병철을 대신하여 둘째 아들을 속죄양 삼아 감옥에 보냈다는 비정의 아버지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 차남은 물론 장남 이맹희 마저 냉정히 배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최대재벌이 밀수꾼으로


제3공화국 초기에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 내각을 총사퇴시킨 한국 비료 밀수사건의 진상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1964년 제3공화국 박정희정권은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면서 한국 농촌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비료공장을 건설할 채비를 했다. 한국은 외국으로부터 비료를 도입해야하기 때문에 외화낭비 및 농민들의 생활이 말 할 수 없이 비참했다. 농사를 지어도 비싼 비료 값 때문에 채산이 맞지 않아 농민들의 생활은 가난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박정희대통령은 장기영부총리를 시켜 이병철에게 비료공장 건설 계획을 알렸다.
자유당 시절부터 비료공장 건설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이병철은 때를 놓치지 않고 정부가 지원하도록 잔수를 부렸다. 그때만 해도 정치에 경험이 많지 않았던 박정희는 장사꾼 이병철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다.
이병철은 <왜 건설 계획을 세우지 않느냐>는 박대통령의 독촉을 전달하러 온 장기영 부총리에게 <아직 삼성은 그토록 큰 공장을 지을 수 있는 재력과 힘이 없다>고 둘러 대었지만 실상은 건설 추진 계획 청사진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터다.
이병철은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비료공장을 건설해보라는 재가를 받아 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블루 청사진은 이미 확실하게 준비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에 계획안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박정희로부터 어떤 특혜조치를 기대하는 또 다른 검은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병철은 박정희와 독대한 자리에서 <각하…각하께서 혼자 힘을 쓰셔서 되는 일이 아입니다. 행정부는 물론 거족적인 뒷받침 없이는 하기 힘든 사업입니다. 또 외국에서 자본을 얻어오고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각하의 지시명령서가 필요할 뿐 아니라 정부가 보증을 해준다는 각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각하께서 지시를 해 주셔야 합니다>고 요청하자 그 자리에서 장기영 부총리와 이후락 비서실장을 불러 정부가 나서 모든 지원을 해주도록 지시하면서 친필 싸인이 든 비료공장 건설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 지시 각서에는 어느 한 곳에도 밀수를 해서 비료공장을 건설하라는 구절을 없었다. 또 삼성이 밀수 왕초가 되어도 정부가 눈감아 준다는 구절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병철은 한국정부 수립 후 최대의 밀수꾼이 된 것이다.
이병철은 친필 지시각서와 정부 지불보증으로 자기 돈 없이 외국에서 차관을 얻어 오고 국내의 소요 내자도 준비했다. 즉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명분아래 당시 국내에서 필요했던 각종 수입품을 대량 밀수하여 얻어지는 수입으로 내자를 충당하려는 했다.
그런 관계 때문에 장기영이 어는 정도 눈감아 주기로 하고 삼성에서 비료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재를 도입하면서 돈이 될 만한 물건을 들여다 팔았다.
삼성은 일본에서 비료 공장 건설에 필요한 건설 자재를 도입하는 명세 속에 비료 공장 건설과 관계가 없는 사카린 원료인 OATS 를 비롯하여 당시 한국사회에서 필요한 각종 수입품을 대량 밀수했던 것이다. 그 시절 한국에서는 일반 주택의 건축 자재는 대부분 일본이나 이태리에서 수입하여 고급 주택을 지었을 때다. 삼성은 건설 자재 속에 대량의 대리석 손잡이, 전화기, 화장실 양변기 등 밀수할 수 있는 모든 물건을 밀수해서 창고에 쌓아두고 조금씩 시장에 유통시켰다. 그 가운데서 설탕파동을 빚어낸 사카린 원료는 시중에 부족해서 가격이 폭등하고 있을 때다.
삼성은 사카린 원료인 OATS 2천 포대 이상을 밀수해 들여오는 과정에 하역부들이 유출한 몇 포대 때문에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대된 것이다.
정국은 걷잡을 수없는 혼란에 빠져들고 삼성에 대한 국민 여론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급기야 삼성과 정부를 규탄하는 언론 보도와 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국회는 특별 진상 조사 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고 박정희는 특별 인터뷰를 통해 <재벌의 밀수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재벌뿐 아니라 사업가들의 상도덕과 양심에 관한 일이며 자숙하기 바란다. 이번 사건으로 관련된 공무원은 모두 처벌하고 밀수행위를 한 재벌은 국민의 이름으로 규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박정희는 어느 술좌석에서 <5.16혁명을 했을 때 이병철을 광화문 한 복판에 끌어내어 총살시키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그 때 해치웠어야 했는데…>하고 노여워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을 1면 머릿기사로 다룬 동아일보 기사.(1966. 10. 5.)


밀수행위 자백, 둘째아들 희생양 삼아


처음에는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발뺌을 하던 이병철은 더 이상 견딜수 없었던지 한비공사 책임자 성상영 사장과 이일섭, 이창식을 내세워 그들이 모자라는 내자를 충당하기 위해 밀수해위를 했다고 자백했다. 삼성은 언론과 국회의원들에게는 상당한 돈을 주어 매수할 수 있었으나 국민 여론은 한국 최대 재벌의 밀수행위를 쉽게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삼성은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을 동원하여 갖은 변명을 들어 놓았으나 한번 불붙기 시작한 국민감정은 가라앉지 않았으며 이병철의 구속까지 요구하고 나서는 등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사태가 갈수록 악화되자 이병철은 둘째 아들 이창희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지고 이창희와 이일섭 상무가 구속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6년 3월24일 이창희는 징역 5년, 이일섭은 징역 2년6개월 비롯하여 10억원의 벌금을 언도받았다. 이에 앞서 이병철은 1965년 9월 20일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비료 공장을 완공한 후 국가에 헌납 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그룹의 총수 자리에서 물러났다.











 ▲ 1966년 11월 7일 서울교도소에 수감중인
한국비료밀수사건의 한비상무 이창희 씨
(이병철 씨의 차남).
이병철은 결국 둘째 아들을 감옥에 보낸 비정의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아버지 대신 감옥을 다녀 온 창희도 끝내는 아버지로부터 배신을 당하여 삼성에서 쫓겨나고 푸대접 받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뒷전에 있었던 이맹희는 사건 수습을 위해 그룹 차원에서 일선 지휘를 맡게 되었다.
이맹희는 <나는 조속한 사건의 해결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으며 장기영 부총리, 김형욱 정보부장도 만났습니다. 성미가 팔팔하고 급한 김 부장이 재떨이를 집어 던지면 나도 맞섰습니다. 그러나 워낙 여론은 삼성에게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라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애쓴 보람도 없이 결국 한국 비료를 삼성 손에서 떠나보내는 쓰라림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맹희. 그렇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이버지 이병철로부터 삼성의 지휘봉을 물려받게 된다. 한비사건이 터지기 전만해도 이병철은 2남 이창희를 무척이나 총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학창시절 이버지 이병철이 다니다가 중퇴한 와세다 대학에 대를 이어 수학, 경영학 공부를 마쳤던 창희는 냉철하고 이재에 밝아 일본 유학시절 이미 증권투자로 동늘 버는 수완을 발휘, 학자금으로 쓰고 남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병철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다.
이병철은 총애하는 2남을 제쳐두고 장남 맹희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것은 일견 한국사회의 <장자상속>이란 원칙에 따른 것으로 보여지는 대목이다.
제일제당, 안국화재, 중앙 매스컴의 부사장 자리를 맡아 이병철을 대리하여 삼성의 경영권을 총괄하게 된 이맹희의 당시 나이는 40대 초반, 그런데도 그는 삼성의 경영을 맡자마자 아버지가 다져 놓았던 경영체제에 새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지휘봉 잡은 이맹희와 홍진기의 대립


아버지로부터 지휘봉을 잡은 이맹희는 당시 사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비사건의 파문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그 여파는 내가 경영을 맡을 당시까지 적지 않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든 실추된 삼성의 이미지를 바로 잡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래서 ‘한비사건의 오욕은 우리가 씻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를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길 주체 세력, 즉 삼성재건 5인 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삼성 경영 체제를 바꾸려고 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맹희의 혁신적 바람은 곧바로 역풍으로 바뀌고 말았다. 새바람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그 때까지 이병철을 보필했던 창업공신들이 흔들리게 되었고 곧 이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그 와중에 이런 일화도 있었다.
이맹희와 홍진기(당시 동양통신사장)가 서로 불꽃 튀는 반목과 파워 게임을 벌이던 중, 한번은 이맹희가 홍진기를 을지로에 있던 그의 사무실에 불러다 놓고 무릎을 꿇게 하는 등 극적인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었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감정 대립이 극도로 치달았었다.
이것을 잊지 못하고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홍진기는 그 후 이맹희의 삼성 실각에 이어 유배생활에 복수 차원의 역할도 은근히 조종했다는 소문도 있는데 상당히 설득력있는 이야기라 하겠다. 무서운 끈기의 소유자로 일본을 천하 통일한 도꾸가와 이에야스 같은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는 홍진기에 대한 또 다른 진면목으로 보인다.
삼성 창업공신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 이맹희의 삼성재건 시도는 결과적으로 그 뜻은 높이 만했지만 시기란 차원에서 이른 감도 없지 않았다. 자신의 위치가 위협받고 여지없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 서게 된 창업공신들이 곧바로 이병철을 찾아가 어떤 형태로든지 이맹희를 평기절하 시키는 공작을 하는 등 일대반격에 나섰던 것이다.
또한 당시 이병철이 이맹희에게 물려준 경영권은 대리경영의 성격을 띤 후계자 가능성을 타진하는 과정이지 절대권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 자리에 앉자마자 그룹의 이미지를 쇄신하려고 나선 맹희의 그런 시도가 아버지 이병철의 눈에는 전권을 행사하려는 것으로 비쳐 눈 밖으로 난 결과를 가져 온 셈이다.


이맹희, 6개월만에 실각


또 한가지 사업에 관한 한, 일체 사업 외적인인 것을 배척하는 이병철의 냉정한 스타일을 볼때 이맹희가 고미술품에 대해 상당한 식견과 높은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이맹희를 실각시키는데 한 몫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맹희를 잘 알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그가 골동품 수집에 뛰어난 감식안을 가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골동품 수집과 감식에 대해 한국에서도 첫째임을 내세우는 이병철도 장남 맹희의 감식안만큼은 높이 평가한 적이 있을 정도다. 이를테면 현재 용인 자연농원에 있는 호암미술관에 진열되어 있는 많은 문화재를 감식하고 사들인 사람이 바로 장남 이맹희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이어받은 이러한 취미나 성향은 그렇지 않아도 창업공신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이병철의 표현대로 ‘그룹의 혼란이 오고, 경영과는 거리가 먼 아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을 법하다.
마침내 1971년, 이병철은 장남 맹희로 부터 사의를 받아 6개월 만에 컴백해 또 다시 친정체제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부터 맹희는 아버지의 눈에 보이지 않는 냉대에 시달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성격이 포악하다’느니 ‘사치스럽고 변태성욕을 즐긴다’느니 하는 악소문의 모함을 받고 가족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며 삼성그룹내 이병철의 측근들로부터 견제와 멸시를 받아 온 것이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여기서 이병철은 ‘왜 고작 6개월만에 장남 이맹희를 그룹 밖으로 내 쫒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병철의 컴백을 염두에 둔 ‘고도의 계산된 술책의 하나가 아니 였을까?’ 하는 의문이다.
즉 사업에 관한 한 도통의 달인의 경지에 오른 이병철이고 보면 한비사건의 여파로 삼성의 대외 이미지가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일단 장남 맹희에게 지휘봉을 넘겨줌으로서 다음에 자신에게 돌아 올 반사이익을 한번쯤 생각해 보지는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중략)
이맹희는 이점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든 한비사건의 오명을 벗으려고 노력했고 그런 과정에서 의욕이 앞섰다는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또 스스로의 의지라기보다 타의에 의해 경영을 체념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배신


맹희는 ‘기업에 혼란을 일으켰다’는 말에 대한 그 상대적 반대 일례로 삼성 재임시절 그가 일했던 것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삼성을 위해서 일했을 때는 솔직히 내 개인의 치부나 욕심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시 ‘삼성재건 5인 위원회’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지금 돌이켜 봐도 혁신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아전인수 격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반도체 사업의 원류가 된 EDPS 시스템의 도입, 삼성전자, 삼성코닝, 삼성전관, 중앙개발의 안양컨트리 클럽 건설, 그리고 용인의 자연농원 등은 아버지 이병철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자 나의 바램이기도 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삼성전자 같은 경우, 그때까지 전자업계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던 금성사에서도 엄두를 못냈던 TV브라운관 제작 공장 설립을 그 때 우리가 착수했습니다. 다들 놀랬지요. 당시 나는 국내 뿐 아니라 삼성의 이익에 관계된다고 생각하면 외국 어디라도 쫓아다니며 일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맥스웰하우스 커피 같은 것은 막대한 이익이 달려있는 것으로  그것을 내가 교섭, 유치하는데 성공했지만 당시 정계의 실력자였던 이후락 씨가 뺏아서 자기의 사돈에게 주었지요. 그러다가 망해 현재는 다른 사람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평소 스케일이 크고 보스 기질이 강하다고 알려진 맹희는 어떤 형태로 사임 압력이 있었는지 그 배경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께선 당시 내가 맡고 있던 5개 기업 중 한두 개만 맡아서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버지의 평소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해 그 뜻은 결국 내가 스스로 물러나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훌훌 털고 나온 것이지요>
훌훌 털고 삼성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맹희에게는 끊임없는 견제와 모함이 뒤따랐다. 아버지 이병철도 말했듯이 <맹희는 성격이 포악하고 낭비벽이 심하다. 골프채를 아무렇게나 휘둘러 사람을 다치게 한다>>는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짚어볼 수 있다.
아이러니칼한 사실이지만 이병철 자신이 실제로 골프채를 마구 휘둘러 그것도 자신의 자식을 반신불수로 만들려고 여러 차례 폭행했다면 그 누가 쉽사리 믿으려 들 것인가. 그러나 이병철의 이런 위선적 면모는 차라리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오히려 아버지가 미친 듯이 휘두르는 골프채에 쫓겨 내가 도망쳐야 했습니다>라고 자신의 체험담을 말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보면 <장남 맹희가 포악해서 골프채를 마구 휘두른다>는 이병철의 이야기는 적반하장인 셈이며, 적어도 자기 자식에게만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맹희는 과연 병철의 말처럼, 소문처럼 성격이 포악하고 낭비벽이 심한 파락호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과거부터 가까웠다는 이맹희의 친구들은 한결같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보면 한국 제일의 재벌 아들로 태어난 것부터가 불행한 일이라 하겠지요. 특히 장자로서의 무거운 중압감이 더욱 그를 피곤하게 했을지도 모르구요. 스케일이 크고 보스 기질이 있는 그여서 매사에 꼼꼼한 완벽주의자인 아버지 눈에 들지 않는 면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낭비벽이 심하고 성격이 포악한 사람은 아니라고 봅니다.>
평소 맹희를 잘 안다는 사람들은 그를 두고 <성격이 그렇게 난폭하지는 않다>라고 입을 모으고 있는 반면, 아버지인 이병철은 스스로 자기 자식은 ‘폭군’으로 규정하고 있다.
생활비조차 주지 않는 아버지이지만 그래도 맹희는 아버지 곁으로 가고 싶어 했고, 반면 이병철은 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맹희는 이병철 일가들이 참석하고 가족들이 아닌 남들도 참석하는 아버지의 생일 축하연에도 못 나타나는 불우한 삶을 살아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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