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3]삼성가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 충격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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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병철 회장의 차명계좌를 둘러싼 치열한 법정공방전이 드디어 막이 오른 가운데 이맹희-이건희 두 형제들간의 목불인견 난타전(?)은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가관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70세가 넘고 80세가 가까운 두 노인네들의 해묵은 감정싸움은 한마디로 꼴불견이다.
자식들의 재산싸움으로 작고한 아버지 이병철이 언론에 의해 부관참시 당하고 있는데도 이들 형제들은 오로지 아버지가 남긴 재산에 눈이 멀어 진흙탕 밭 개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아버지 이병철의 수신신제가 실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맹희의 25년 전 인터뷰는 오늘의 이런 상황을 예견이나 한 듯이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이자 오늘의 삼성을 세계의 삼성으로 만든 존경받는 위대한 사업가이지만 가장으로서는 제대로 존경받지 못한 실패한 가장 이병철을 향한 장남 이맹희의 인터뷰는 비장하기까지 할 정도다.
무엇이 이들 형제들을 이토록 처절하게 만든 것일까? 그 속사정을 몰락한 삼성가의 장남 이맹희의 25년전 육성 인터뷰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본다.                                      <편집자주>


특별연재<1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048
특별연재<2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066
특별연재<3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079
특별연재<4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087
특별연재<5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112



이런 가운데서도 맹희는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해서 산돼지, 노루 등을 사냥해 금방 사로 잡은 채로 서울 아버지의 집에 가지고 가서 먼저 시식하게 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맹희의 사심 없는 일련의 노력들도 그를 반대하고 노골적으로 미워하는 측들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졌다. 한때 시중에는 <장남 맹희가 썩은 노루 피를 아버지에게 먹여 어떻게 하려고 했다>는 등 있을 수 없는 모함 섞인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아버지 이병철을 위해하려 했다는 이 노루 피에 얽힌 모함의 사연 내막에 대해 이맹희는 이렇게 말했다.


멧돼지 피 사건의 전말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는 헛소문이지요. 항간에는 내가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나 그 앙갚음으로 아버지에게 썩은 노루 피를 먹였다는 소문이 그럴 듯하게 나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문들은 누가 지어 퍼트렸다는 사실, 즉 소문의 진원지가 중요하다고 봐요. 사실 내가 삼성에서 떠나기는 했지만 곧바로 아버지와 사이가 나빴던 것이 아닙니다. 회사나 집안의 큰일이 있으면 아버지께선 나를 부르시고 나도 아버지를 잘 모시려고 했었지요. 그런데 그 노루 피 사건이 터진 겁니다. 지금에 와서 털어놓는 것이지만 그건 노루 피가 아니라 멧돼지 피였습니다. 당시 아버지께서 자주 몸이 허약해지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하여 금방 잡은 멧돼지 피를 드시라고 갖다 드린 겁니다. 그래서 첫날은 아버님 한 사발, 나도 한 사발 같이 마시고 아무 이상이 없었어요. 그런데 둘째 날 가져온 걸 드시고 밖으로 나갔는데 복통이 나서 곧바로 병원에 입원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행이 아버지께선 반사발만 드신 탓인지 크게 아프시지 않았어요. 오히려 내가 죽을 고생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 복통 이유를 알아보니 상한 멧돼지 피 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전날 먹고 남긴 것을 냉장고 안에 넣어 두었는데 공교롭게 정전된 상태에서 그대로 두었다가 일하는 가정부 역시 모르고 가져와 그것을 먹고 배탈이 난 겁니다. 사실은 이렇게 된 것을 가지고 내가 아버님을 어떻게 하려고 했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걸로 모함시켜 헛소문을 퍼트린 것입니다>
이맹희의 말처럼 이때까지만 해도 맹희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삼성을 떠난 맹희가 그 뒤 아버지 이병철로부터 결정적인 불신을 당하게 된 것은 이른바 <청와대 투서사건>에 휘말리면서 부터라는 것이다.
이병철은 자서전 <호암자전>은 물론 삼성그룹의 어떤 공식 문서에도 일체 침묵하고 있는 이 <청와대 투서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또 어떻게 해서 그 <투서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배경설명이 필요하다.
3남 이건희 부회장은 물론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더 깊이 관련되어 있었던 이 <투서사건>의 발단은 처음, 2남 창희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1966년 <한비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가 이듬해인 1967년 감옥에서 풀려나온 창희는 아버지의 미묘한 마음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한비사건>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깊은 애정으로 아껴주던 아버지의 사랑이 동생인 3남 건희에게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창희는 형인 장남 맹희도 경영에 손을 뗐기 때문에 자신의 후계자 가능성을 기대해 볼만 했으며 그런 기대는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달려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 이병철의 사랑은 3남 건희에게 기울어지고 있었으며 당시 건희는 중앙 매스컴의 평 이사였지만 그의 장인인 홍진기의 비호아래 차츰 이병철의 눈에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창희는 장남 차남을 제치고 3남 건희를 삼성의 후계자로 승계시키려는 음모의 배후를 홍진기 (전 중앙 매스콤 회장)로 지목하고 있었다. 아버지 이병철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당했다는 감정과 이병철-홍진기-이건희로 이어지는 역성혁명 후계자 시나리오를 홍진기 회장이 주도하고 있다고 판단, 급기야 청와대에 삼성의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의 투서를 하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창희, 청와대에 삼성 고발 폭탄 탄원서


아버지 대신 감옥에 가서 고생을 하고 나왔던 이창희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3남 건희를 후계자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홍진기에 대한 반감에 창희는 치를 떨 정도였다.
(여기서 홍진기 씨에  대한 기사는 지면으로 게재하기가 부적절하다고 판단, 특히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임의로 생략합니다-편집자 주)
감옥에서 나오면 은근히 회사 경영에 참여할 줄 기대했던 창희는 오히려 아버지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창희는 이 모든 것을 홍진기 때문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병철에게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것은 한비사건으로 감옥을 다녀 온 사람을 곧바로 경영일선에 내세운다면 국민 여론이 좋지 않을 터이니 우선은 조금 쉬다가 그룹 안의 작은 기업을 맡아서 일단 운영해 보라는 심경이었다.
이창희는 그런 아버지의 의중을 알고 있었다. 기업 경영에 있어서는 자식이나 인척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기업 자체만 생각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신이 후계자 서열에 서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은 잘못이 없는데도 아버지의 죄를 짊어지고 감옥까지 다녀왔는데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동생 건희가 후계자가 된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서운한 생각은 떨쳐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대목이다.
특히 홍진기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삼성 이 씨에 대한 역성혁명으로 간주, 이를 바로 잡는다는 명분하에 투서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분노를 참지 못한 창희는 급기야 청와대에 삼성이 세금을 포탈하고 해외에 재산을 빼 돌렸다는 투서 형식의 장문의 고발편지를 써서 청와대에 보냈다. 창희는 투서를 보내기 전 큰형인 맹희에게도 그런 뜻을 전했다. 깜짝 놀란 맹희가 간곡하게 아우를 말렸으나 창희는 막무가내였다.
화가 난 맹희는 집밖으로 나와 창희의 벤츠 승용차를 두들겨 박살을 내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맹희는 아우의 투서를 반대했다. 삼성그룹과 이병철 일가족에 대한 모든 비행과 비리 사실을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상당이 분노했으며 청와대 사정 보좌관실을 시켜 비밀리에 진상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투서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 차남 고 이 창희 상무
이 사건이 터진 뒤 당시를 회상하는 맹희는 “다 지나간 일 누구도 원망해 본적이 없다”고 말하며 “결국 시간이 흐른 뒤에 부친께서는 나의 무고함을 알게 되었으나, 그 사건으로 나는 억울하게 파문을 당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이 사건 후 이병철은 맹희와 창희를 불러서 골프채로 두들겨 팼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 사건으로 두 사람은 후계자 자리에서 영원히 멀리 사라지게 되고 급기야 3남 건희가 삼성그룹 총수에 오르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 되었다.
그 들 부자사이는 원수지간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극도로 사이가 악화되었다.
(이건희 회장이 형인 이맹희가 집안에서 파문을 당한 사람이라고 공개망신을 준 이유가 바로 이 문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또 맹희에게는 더 큰 괘씸죄가 추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어머니와 아내를 통해 결백을 주장했으나 이병철은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생을 말리지 못했다는 괘씸죄까지 추가되어 이병철은 심한 분노감을 느꼈다.
파문 당한 창희는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귀국 1973년 ‘마그네틱 미디어 코리아’ (후일 새한 미디어)란 오디오 카세트 테이프 생산업체를 창업하고 기업공개를 통해 성공을 거두고 부친과 화해에 성공했지만 오히려 장남인 맹희는 부친의 생일 축하연은 물론 일체의 생활비 지급까지 끊긴 채 12년 동안 유랑 생활을 하는 불우한 나날을 살았다.
1987년 12월 호 여성동아는 이 문제에 대해 간략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이기도 했다.
<1966년 한국비료 공장이 건설되면서 이창희 상무로 승진한다. 한비 사건으로 감옥에서 1년 이상 살았던 창희는 출감 후 아버지에게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한비 사건 전까지만 해도 맹희씨 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았던 창희는 사건 후 판도 변화를 느껴 삼성의 탈세 사실을 청와대에 투서해 아버지의 진노를 샀던 것이다. 창희와 맹희는 매년 2월 12일 열리는 이병철 회장의 생신 축하연에도 참석할 수 없었는데 3년 전부터는 창희 씨는 해금되어 이 회장을 가끔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버스비 천원이 없었던 비참한 생활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나의 지난 12년 세월은 유배 세월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한국 제일의 재벌 집 맏아들로서 참 웃지 못할 일들을 많이 겪기도 했지요. 단돈 1천원이 없어 망신당했던 적도 있었다면 세상 사람 그 누가 믿어 주겠습니까?>
맹희가 털어 놓은 <단돈 1천원 때문에 망신 당한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하겠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소위 이병철의 아들이란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어떤 연민의 정마저 느끼게 해주는 말이었다.
<2년 쯤 전의 일입니다. 포항 쪽에서 오는 시외버스를 탔는데 중간에서 차장이 차비를 받으러 오더군요. 무심코 호주머니를 뒤지는데 7백원 밖에 나올질 않더군요. 그때 차삯이 1천7백원이었던 것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머니를 모두 뒤져 보아도 돈은 더 이상 나오질 않더군요. 차장은 돈을 달라고 손을 벌리고 있지, 정말 진땀이 나더군요. 그런 경험을 해 보았는지 모르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무척 당황스럽더군요. 그 자리에서 내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병철의 아들이라고 해봤자 웃음거리 밖에 더 되겠어요. 하는 수 없이 그 차장 아가씨에게 사정했습니다. 마침 돈 가진 게 없는데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니 지금은 차비 받은 셈치고 나중에 내가 아가씨 회사로 돈을 갖다 주겠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그 차장 아가씨가 픽 웃어요. 그러면서 ‘차비가 없다면 솔직하게 없다고 해요. 나이 먹은 주제에 거짓말까지 하네…’ 라고요. 순간 가슴 속에서 욱, 하는 것이 치밀어 오르더군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대구 시내에서 버스를 탔어요. 그런데 차에 오르고 보니 토큰인지 동전인지가 없어 그냥 1만 원짜리를 준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가 스톱한 채 움직이지 않더군요. 그러자 잠시 후 형사 둘이 올라타더니 내 앞으로 와요. 다짜고짜 내 어깨를 붙들고 같이 가자고 그럽디다. 내가 왜 그러냐고 따졌더니 당신은 수상한 사람 같으니 잔말 말고 따라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두 형사에게 허리띠를 붙들린 채 근처 파출소까지 끌려갔습니다>
파출소에서 2시간 넘게 조사를 받다가 풀려 나왔다는 이맹희는 그러나 그 상황에서 아버지 이병철의 이름을 댈 수 없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시내버스에서 1만원권이 통용되리라 생각하고 선뜻 내민 것부터가 충분히 오인 받을 만한 노릇이었지만 그의 소탈한 생활의 면면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실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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