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삼성가,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 25년 전 충격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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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삼성가의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씨의 25년 전 단독 인터뷰는 상당히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회를 거듭할수록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인터뷰는 그 동안 베일에 가렸던 후계자 문제에서부터 3분폭리사건, 사카린 밀수사건 뿐 아니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병철 자신의 안전과 쾌락, 입신양면을 의해서는 아내나 자식들과도 절연하는 비정한 기업인이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폭로되고 있다.
나아가서 이병철, 그가 불법적으로 세금을 포탈하고 또 20년 전 이미 비밀리에 스위스 은행에 예금 계좌를 개설하고, 여러 미녀를 축첩도 모자라 조강지처 본부인을 폭행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핏줄인 친자식마저 정신병자로 몰았던 내용들은 경악을 금치 못할 사건들이다.
지금까지 전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이병철의 치부과정과 위악적 실상들을 <선데이저널>이 5회째 공개한다.                                                                                <편집자주>


특별연재<1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048
특별연재<2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066
특별연재<3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079
특별연재<4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087
특별연재<5탄>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112



이병철의 부인 박두을 여사는 그 전부터 살아오던 장충동 집에, 이병철은 한남동 집에 기거, 떨어져 살았다. 이들 부부가 서로 별거한 지 십 수 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동안 아내 박두을은 졸지에 과부 아닌 과부 신세가 되어 삭막한 나날을 눈물로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에다 최근에는 남편으로부터 뭇매를 맞고 집으로 도망쳐 나오는, 부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겪기도 했고 남편 이병철이 생활비를 주지 않아 자식, 손자 용돈을 주고 싶어도 못 주고 있는 참담하다면 참담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과부 아닌 과부 박두을 여사


밖에서 보면 세상사람 그 누구라도 부러워하고 올려다보는 대 재벌의 안방마님이 사실은 남편에게 두들겨 맞기도 하고 생활비가 없어 전전긍긍한다면 이 세상 누가 믿어 줄 것인가?
박 여사가 큰딸 인희를 낳은 것은 남편이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후였고 득녀의 기쁨을 아내 박 여사와 함께 나누지 못했다. 그러나 훗날 맏딸이 자라면서 대장부처럼 활달한 기상을 보이자 이병철은,
<저게 차라리 아들로 태어났으면 내가 입 보다 훨씬 편했을 텐데…>
라는 말을 종종했었다고 이병철과 제종(6촌) 사이인 이채경(당시 71세. 의령군 정곡면 거주)은 말한 바 있다.
맏딸 인희를 낳은 2년 후 박 여사는 큰 아들 맹희를 출산했다.
<누님의 시아버지인 이찬우 어른께서 여간 좋아하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 이름도 맹희(孟熙)라고 친히 지어 주셨다는 애기도 누님에게 들었지요>
현재 박 여사의 하나 밖에 남지 낳은 남동생인 박노천(당시 77세. 대구시 삼덕 로터리에서 거주)의 말이다.
그 뒤로 박 여사는 2년 터울로 차남 창희(1933년 5월24일 출생)와 차녀 숙희 (1935년 8월22일 출생)를 낳고 삼녀 순희(1940년 2월29일 출생), 삼남 건희(1942년 1월9일 출생), 막내 명희(1943년 9월4일 출생)를 차례로 순산해 슬하에 3남 4녀를 둔 어머니가 되었다.
여기에 바깥 세상에 알려진 이병철의 슬하 자식은 모두 4남 5녀인데 나머지 1남1녀는 어떻게 된 것이냐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당연하게도 이들 1남 1녀 즉 태휘(1953년 5월8일생) 와 덕희(1941년 2월7일생)는 박 여사가 아닌 이병철의 소실(미용사로 알려짐. 후일 이맹희가 찾아가 행패를 부려 아버지로부터 파문을 당한 계기가 되었음)에서 난 자식들이다. 이중 덕희는 중앙일보 이종기 사장(당시)과 결혼해서 현재까지 살고 있다.
이렇게 3남 4녀를 낳고 기르는 동안 박 여사가 혼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을 태웠던 때는 남편 이병철이 거의 매일같이 술과 기생이 있는 요정을 드나들며 젊은 나날을 보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이병철의 요정 편력 시기는 <실록 기업소설 이병철(전범성 지음)에서도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그에게는 마음 붙혀 볼 만한 일이 없었다. 실의에 찬 나날이었다. 슬하에는 한창 재롱을 피우는 인희와 맹희 두 남매가 있었지만 그들의 사랑스러운 재롱도 그의 시름을 달래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훌쩍 서울로 떠나 버리고 말았다. 서울로 올라 온 그는 여관에서 장기간 투숙하기도 하고 친구 집을 하숙삼아 묵기도 하면서 저녁이면 항상 오늘은 이 술집, 내일은 저 술집을 전전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 무렵 서울의 카페애서는 물론이고 명월관 같은 큰 요정에서도 이병철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돈은 필요한 만큼 시골집에서 송금해 왔다. 그렇게 무의도식 하기를 2년. 환락가 생활은 오히려 그의 심신을 더 없이 피로하게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자신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아무리 버둥대도 암담할 뿐이었다. 가끔 이대론 취생몽사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었다.>>



피눈물로 지낸 60년 결혼생활


이 요정, 저 요정을 번갈아 가며 술만 마셔대는 남편 이병철의 생활을 지켜 본 아내 박 여사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어쩌면 남편이 마시는 술 한 잔이 그대로 그녀의 눈물 자국이었을 수도 있었고 서울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말없이 기다리는 나날들은 외로움과 아픔에 지친 나날들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훗날 남편 이병철을 따라 상경, 혜화동 큰집 안방마님이었던 것도 잠시, 6.25 사변이 나고 9.28 서울 수복까지의 3개월간 남편과 7남매와 함께 숨어 지냈던 박 여사, 그녀는 어쩌면 이 혜화동의 3개월을,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과 함께 지냈던 추억을 결코 고생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후 남편을 따라 대구에 이어 부산으로 내려와서 전란의 와중에서도 7남매를 훌륭하게 키웠던 박 여사였다.
박 여사는 또 남편이 <한국 제일가는 거부>가 되는 과정에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3분 폭리사건>과 <사칼린 밀수사건> 등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던 때에도 재벌가의 안방마님으로서 치러내야 했을 고통도 적지 않았으리라. 그런 우여곡절 소용돌이 속에서도 박 여사는 묵묵히 자기 앞에 주어진 일에만 충실해 왔다. 남편에게 한마디 말대꾸나 간섭, 바가지 한번 긁는 일 없이 수더분한 전형적인 조강지처로서의 역할을 다해 온 것이다.
자식 교육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 여사는 어린 시절, 학교라고는 있지도 않은 두메산골에서 자라면서 선비인 아버지로부터 한학(漢學)만을 배웠을 뿐, 신식학문을 접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자식 교육에 더 큰 관심을 쏟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장남인 맹희는 동경 농대를 거쳐 미국의 테네시 대학을 졸업했고, 차남 창희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삼남 건희는 와세다 대학과 미국 워싱턴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이화여대 가정과를 졸업한 인희는 고려병원 원장 조운해에게 시집을 보냈고, 역시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숙희는 럭키그룹(현 LG) 사장인 구자학에게, 이화여대를 나온 삼남 순희는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김 규 교수에게(후일 이혼), 막내딸인 명희는 정재은(당시 삼성물산 사장)에게 각각 출가 시켰다.
아들 딸 뿐 아니라 손자 손녀 모두 합쳐 삼십여 명을 두었고 3년 전(1984년)에는 증손녀(맹희의 손녀 딸)까지 보았다. 말하자면 남편 이병철이 밖에서 한국 굴지의 기업을 일으켜 세웠다면, 아내 박 여사는 집안에서 그만큼 자식 농사를 도맡아 잘 해냈다는 이야기다.
자식 키우는 일과 바쁜 남편에 대한 소리 없는 내조가 유일한 보람이었을 박 여사에게 또 한차례 가슴 조였던 시련은 이병철이 위암 선고를 받았을 때였다.



이병철, 위암 수술과 뇌종양


지난 1976년 여름, 일본 동경에 사업차 들른 이병철은 게이오 대학 부속병원에서 하루 종일 정밀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이 때 생각지도 않은 <위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당시 이병철의 나이 67세, 젊은 사람 못지않은 건강을 자랑하던 그가 난데없이 위암이란 사형 선고를 받았으니 아내 박 여사는 남편 못지않게 충격을 받은 것이다. 67세란 적지 않은 나이를 의식해서였는지 처음에는 수술 의사를 보이지 않던 이병철은 아내와 주위의 끈질긴 설득으로 마침내 수술의 결단을 내렸다. 결국 일본으로 가서 수술을 받은 이병철은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목숨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암 수술에 이어 3년 후인 79년 이병철은 뇌에 종양이 생겨 신경이 일부 마비되는 등 노령의 위기를 또다시 맞게 된다.
그러나 수술에 성공, 극적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몇 년 전에 이병철의 건강 악화설이 다시 나돌았던 것은 바로 뇌종양의 악화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편 80을 넘긴 박 여사에게도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노령기에 접어들면서 한 때 심한 당뇨병을 앓았던 것이 낳아졌다고는 하나 몸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박 여사는 자신의 건강관리를 위해서 매일 요가 선생을 모시고 1시간씩 요가를 지도받기도 했다. 이 요가로 건강을 다져온 지도 20년가량 된다고 하는데 지병인 당뇨병을 제외하고는 귀도 밝고 치아도 튼튼하다는 것이다.
열아홉 꽃 같은 나이에 남편 이병철과 결혼, 격동기의 나날을 거쳐 오며 <한국 제일의 거부>라는 남편의 그늘 밑에서 재벌의 마나님으로 영욕의 세월을 살아 온 박두을 여사.
그녀에게는 위에서 이야기된 것 외에도 여러 말 못할 고통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박 여사의 집안 형제들과 남편인 이병철 사이가 바람직한 것이 아닌 상당히 서먹서먹한 관계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 최대의 재벌인 이병철, 그와는 비교도 안 될 박 여사의 처갓집 가족을 놓고 보면, 있는 사람이 돕고 또 서로 도울 수 있는 입장이지만 그렇지가 못하다는데서 박 여사 혼자만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이다. 처남 매부 사이가 서먹서먹한 것은 아무래도 서로 교류가 없는 탓이겠지만 이병철이 애써 돕지 않는 이유도 없지 않다고 보아진다.
 박 여사의 단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남동생 박노천씨는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 내가 병중(중풍으로 거동하는 게 약간 불편하다)에 있는데 왜 지난 일을 들먹이려고 합니까? 그건 그렇고 내가 어쩌다가 장충동 누님 댁을 찾아가도 세세하게 정담을 나눌 시간이 없어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해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편과 처갓집 사이가 좋지 않으면 중간 입장인 아내의 처지가 곤란하고 섭섭해진다. 박 여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이제는 그렇게 서먹한 것을 따질 때도 이미 지나가 버렸다. 당사자들인 부부 자신이 서로 떨어져 사는 마당인데 하물며 주위에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현재 박 여사는 일본 소실 태생의 태휘가 삼성에 들어오고부터, 특히 한차례 날벼락 같은 일을 당하고 부터는 일체 생활비 지급이 없고 집과 병원에만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생활비 문제는 그 일이 있고 나서 이병철이 가족들 모두에게 일체 도와주지 말라는 엄명을 내린 탓에 더욱 지내기가 어렵다고 한다. 큰 아들 맹희는 이런 어머니를 위로하기도 했는데, 아버지 이병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털어 놓았다.
<옛날 내 어릴 적에 의령 고향집의 노복 내외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아버님께서 이렇게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마누라 못 살게 굴고 학대하는 사내치고 잘 되는 자 못 봤다. 너는 크거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처를 저렇게 대하면 안 된다. 알았느냐?’ 그런데 솔직히 지금까지 아버지께서 이렇게 하신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머니 심정도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일으킨다고 엉뚱한 자가 나타나서 온 집안을 뒤집어 놓고 있어요. 있을 수 없는 노릇이지요.>
의령 부자 집 막내 도령에서 한국 굴지의 재벌이 된 남편과 아내 박 여사와의 지난 60년 세월은 보통 사람과는 사뭇 다를 굴곡의 세월일 수도 있다.
남편 이병철과 결혼 60년 사연을 박 여사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본인으로부터 직접 들어 보자. 다음은 가족들 중 한 사람의 이야기다.
<어머니께서는 몸이 좋지 않아 고려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그때 간호를 맡았던 수간호사 한 사람이 어머니께 이렇게 물었다고 해요. ‘사모님은 오늘 날까지 회장님을 어떻게 모셔 왔는지 궁금해요.’ 그러자 가만히 있던 어머니께서 조용히 입을 열었어요. ‘과거도 인내, 현재도 인내, 미래도 인내…’ 그 말은 다른 사람이 들으면 무슨 이야기인 줄 모르겠지만 나는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한 번도 어머니 자신의 입으로 말씀하신 적은 없기 때문에 어머니의 과거, 현재, 미래의 인내라는 것은 세상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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