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중반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의 엘리베이터 임신설과 득남 소문은 장안에 화제였다. 아직까지 그에 대한 내막과 진상이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이를 둘러싼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 나갔다. 여기에 이병철 회장의 일본인 소실 사이에 출생한 이태휘의 삼성 그룹 입사는 삼성그룹의 태풍의 눈이었다. 이병철의 사랑과 총애를 받았던 이태휘는 삼성에 입사하자 무소불위의 전권을 행사해 그룹 전체가 그의 눈치를 살펴야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한 동안 그룹 후계자가 이태휘에게로 쏠릴 정도로 이병철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그의 등장은 이건희 회장이 교통사고 이후 후유증과 관련한 마약 복용설과 엘리베이터 걸 임신설과 맞물려 나온 이병철 회장의 차선책으로 풀이된다. 엘리베이터 걸 임신설 파문과 혜성같이 등장한 이태휘와 가족관계 불화설의 진상을 7번째로 보도해 본다. <편집자 주>
지난 80년대 초 장안의 가장 큰 화제는 삼성 그룹의 후계자로 지목된 이건희 회장의 마약복용설과 복잡한 여성 편력 내용들이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마약복용설은 이미 직간접적으로 확인된바 있으나 여자관계 소문 중 가장 빈번하게 나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엘리베이터 걸의 임신설>에 관한 것이다. 이 소문은 증권가 뿐 아니라 또 다른 정보기관에 의하면 이건희는 2~3년 전부터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 걸과 관계를 맺었으며 그 후 그녀를 비서실로 옮겼다는 내용들이다. 그 여성이 또 임신을 해서 이건희가 다급한 나머지 유산시킬 것을 요구, 그에 대한 대가로 엄청난 액수의 위자료를 건네주려 했지만 그 여성이 받지 않고 차라리 기르겠다하여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그 후 엘리베이터 걸은 하와이에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서울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홍진기의 타계, 이건희와 갈등
이건희와 <엘리베이터 걸 임신설>은 86년 7월 이건희의 장인인 홍진기의 타계 이후 더욱 무성하게 나돌았는데 그때 재계에 돈 루머는 홍진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은 사위인 이건희와 엘리베이터 걸과의 임신설에 대한 그 해결 과정에서 받은 충격으로 갑작스럽게 타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리에 대해 장남 맹희는 <내가 알기로는 그렇지 않다고 보고 있다. 홍 회장은 쓰러지던 날 아침에 세수하다가 뇌일혈로 의식 불명이 되어 돌아가신 걸로 안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홍진기의 작고 이후 재계나 증권가, 매스컴 등지의 일각에서는 이건희의 부인 홍나희가 남편의 잦은 여자관계 소문은 입증이라도 하듯이 남편 건희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있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았으며 원칙적인 합의가 되고 위자료 문제만 남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한편 기자는 엘리베이터 걸의 임신 소문이 나돌던 그 무렵, 취재 관계상 건희의 호적 등 초본을 동회에서 떼어 그 내용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일단 서류상으로는 미국 워싱턴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장남 이재용을 비롯한 1남 3녀 외에 다른 특이한 사실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의아스럽다고 느낀 점은 건희의 주민등록이 한때 <훼손 재작성> 되었다는 사실이다. 무슨 이유로 주민 등록이 훼손되어 재작성 된 것일까? 보통의 경우 주민 등록을 갱신하는 경우에는 주소지 변경으로 인한 사유나 행방불명되었다가 과태료를 물고 다시 작성하는 경우 등이 있는데 훼손이 되었다는 것은 드문 경우이기 때문이다. 동회의 주민등록 담당직원의 말에 의하면 (성의 없는 답변으로 일관했지만) 재작성 사유가 있어 <훼손 재작성> 한 것으로 안다고만 했다. 그런데 건희의 주민등록 등본을 살펴보면 최종 거주지로 <용산구 한남동 740번지 10호>로 되어 있고 전입 날짜는 <75년 9월20일>로 되어 있었다. <훼손 재 작성된 날짜는 86년 5월23일이었다. 10년째 아무런 변동이 없다가 하필이면 이 날짜에 <훼손 재작성>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 뒤에 있은 86년 7월의 홍진기의 작고 날짜와 연계되어질 정도로 미묘한 뉘앙스를 느끼게 했다. 내친 김에 이건희의 신상 이력도 알아보았다. 1)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출생(호적에는 처음에 이름을 건자(健資)로 지었다가 5년 후인 1949년 4월23일자로 건희(健熙)로 개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2) 주소-서울 용산구 한남동 740번지 10 3) 학력-일본 와세다 대학 상대졸업(65년) 미국 워싱턴 D.C 아메리칸 대학원 수료(66년) 4)66년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79년 삼성그룹 부회장. 80년 중앙일보 이사. 82년 (주) 삼성 라이온스 구단주. 5)82년 아마 레스링 협회장. KOC 상임위원. 85년 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 6) 체육훈장 맹호장. 체육기자 연맹 공로상 한편 건희와 이혼설이 나돌았던 부인 홍나희는 남편 건희보다 3살 아래로 서울대 미대 출신으로 지적이고 교양을 갖춘 여성이며 가정에 소홀함이 없는 주부로 알려져 있다. 대외적인 행사에 부부 동반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지만 홍나희와 남편 건희는 꼭이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86년 이병철의 생신 축하연이 열렸던 신라호텔 축하 연회장에도 건희는 자녀들만 데리고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해 7월 부친 홍진기가 타계한 후 딸 홍나희는 중앙매스컴 경영에 참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 매스컴은 홍진기 작고 이후 한때 매서운 숙정 회회리가 불어 관계 직원들 사이에 초비상이 걸리기도 했었다. 이때 중앙 매스컴의 인사에 대한 생사여탈(?) 여부를 삼성 비서실에서 쥐고 감사 검토했었다고 한다. 이는 삼성 그룹 내에서 비서실의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하고 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걸 사건과 홍진기의 죽음, 그리고 계속 번지고 있는 이건희 부부의 이혼설에 대해 경제관계 언론들은 물론 대한민국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한 신문사의 기자는, <이건희의 여성 편력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이야기들입니다. 또 문제의 엘리베이터 걸 사건은 삼성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상당히 잘 알려진 일이고요. 그녀는 아주 미인이고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이었지요. 그녀가 낳은 아들을 이병철이 안아보고 기뻐했다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홍진기와 이건희 사이가 상당히 나빴으며 홍진기가 타계한 날 아침에도 그 문제를 상의하러 이건희에게 갔다가 충격적인 모욕을 받고 쓰러졌다는 소리도 있습니다.>하고 증언했다. 한편, 삼성을 잘 알고 있는 어느 재계 인사가 말하는 스토리는 약간 달랐다. <소문이 난 그 여성은 엘리베이터 걸이 아니고 대학을 졸업한 여 비서였는데 그녀와 관계가 있었으며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이건희 집안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홍진기가 쓰러졌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재계와 언론계를 담당하고 있는 모 정보기관의 한 인사는 <우리가 조사한 종합적인 정보에 의하면 엘리베이터 걸로 상당기간 교제하다가 얼마 후 비서실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다가 임신을 했는데 아들이 없던 이건희에게 그 여자가 아들을 낳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정>이라는 성을 가진 그 여자가 아들을 안고 이병철에게 갔을 때 그렇게 기뻐하면서 손자를 안아 주더랍니다. 그 때문에 홍진기와 이건희 사이에 틈이 생겼으며 이건희와 아내 사이는 상당히 마찰이 심했다고 합니다. 또 최근 정보에 의하면 홍나희와 이건희는 이혼하기로 완전히 합의되었는데 위자료 문제가 아직 남았다고 합니다. 재벌의 사생활 문제니까 우리는 그 이상 구체적으로 내사하지는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인 여인에게 태어난 이병철의 아들
삼성그룹의 후계자설에 관한 또 다른 변수는 이병철의 4남 5녀 중 마지막으로 호적에 올라있는 이태휘에 관한 것이다. 이태휘는 그룹 전체에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올해 37세인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게이오 대학을 졸업하고 미쓰비시 상사에서 근무하던 중, 지난 86년에 삼성그룹에 입사했다. 처음 태휘는 삼성 비서실 상무이사로 근무하다가 제일제당으로 옮겼다. 처음 비서실에 근무할 때는 삼성 계열사를 순시하면서 사장들로부터 직접 브리핑 차트를 넘기게 했다고 한다. 현재 하는 일도 각종 프로젝트 심사다. 사장들이 결재한 사항도 이태휘 이사의 책상에서 거부되는 일이 허다하며 성격이 무척 까다로워 사장들에게 면박을 주어 무안하게 만드는 사례도 잦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일본 미쓰비시 상사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삼성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들어 삼성의 간부나 사원 할 것 없이 애를 먹는 일이 많다고 한다. 이런 태휘가 삼성 비서실 이사가 되면서 비서실 파워는 더욱 막강해 졌다. 그렇지 않아도 이병철의 오른팔 격인 소병해 비서실장의 파워가 대단해 계열사 사장들이 비서실에 기를 못 쓰는 형편이었다. 이태휘는 갈수록 기고만장해져서 이병철과 상의 없이 자기 독단으로 임원들을 해고시키는 등 문제를 불러 일으켜 그룹 내에서 이런 그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는 실정이었다. 이태휘의 파행적 권한 행사의 구체적인 일례를 이맹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태휘의 권한이 그렇게 하늘 높은 줄 가족인 나도 미처 몰랐을 정도입니다. 그것도 삼성 해외지사에 나가서 알았어요. 유럽과 미국에 가보니 태휘에게 목이 잘린 사람이 열 명도 넘었어요. 태휘는 삼성 각 지사를 다니면서 자기 아버지 나이 벌되는 사람에게 별로 큰 이유도 안 되는 숫자 같은 것을 트집삼아 호통을 쳤다고 해요. 때문에 지사 사장들은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브리핑 자료를 만드는데 한 달이 넘게 걸린다고 들었어요. 이게 얼마나 시간적 인적 낭비입니까? 그렇게 외국에 나가서 브리핑을 받는 것보다 삼성본사에서 찬찬히 받아 보는 게 나을 겁니다. 비서실만 해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어 태휘가 영국지사에 간다 하면, 미리 서울에서 텔렉스로 모종의 신호를 보냅니다. 그게 뭔가 하면 ‘이태휘 이사의 한쪽 귀가 먼 편이니까 그쪽에다 대고 소리를 크게 질러라’라는 말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태휘 그 아이 왼쪽 귀인가 오른 쪽 귀인가 잘 안 들린다고 해요. 그런데 아예 귀가 먼 것이 아닌데, 삼성 비서실에서는 그렇게 할 일이 없는지 ‘한쪽 귀에 대고 소리 질러라’는 긴급 전문까지 보내고 참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어요.> 이런 이태휘와 이병철의 관계는 어느 정도였던가?
1953년 5월8일, 일본에서 태어난 이태휘는 성장하면서 아버지 이병철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았다고 한다. 이병철은 일본에 들르면 당시 대학을 다니던 맹희, 창희, 건희 등은 찾지 않고 일본 소실 태생의 아들 태휘 만을 불러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병철의 일본 현지처이자 태휘의 생모 미찌꼬는, 장남 맹희와 비슷한 연배로 이병철이 상당한 재산을 떼어줘서 큰 미장원과 식당을 하는 등 잘 살고 있다. 태휘 역시 머리가 좋고 붙임성 있게 아버지를 따름으로써 더 더욱 그의 관심을 독차지했다는 것이다. 태휘는 게이오 대학을 나온 직후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으나 거절, 일본에 영주하려했으나 그를 총애한 이병철이 적극적으로 한국 삼성에 불러 들였다는 것이다. 이런 태휘가 삼성에 입성했으니 그룹 안의 힘의 진공부분을 금방 알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즉 후계자로 지목된 이건희가 일체 공식 석상에 안 나오는 등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고 건희의 공식 석상에는 정재은(5녀 명희의 남편) 사장이 대신 나오고 있음을 알았다. 여기서 머리 좋은 태휘가 어떠한 생각을 했었는지는 그 뒤의 삼성 그룹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태휘가 등장하자 얼마 안 있어 삼성 그룹은 상당히 큰 폭으로 그룹 내 요직에 대한 인사이동이 단행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이변이라면 정재은의 삼성물산 사장으로의 인사이동이었다. 그 전까지 전자분야를 맡아 경영에 큰 공적을 이뤄 이병철의 신임을 물론 같은 전자업계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은바 있는 이병철의 사위 정재은은 인사이동 이후로 어찌된 일인지 그룹 내에서의 그의 위치가 뒷무대로 밀려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실제로 정재은은 태휘가 오고 나서는 건희의 공식석상에 대리 참석하는 일이 없어지고 말 없이 한 달여 동안 출근조차 하지 않아 그룹 내에서 그의 신상에 대해 무슨 문제가 일어난 게 아닌가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었다. 이때 정재은은 시골에서 많은 생각을 하며 지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재은의 부인이자 이병철의 막내딸로 가족들 중 아버지와 가장 허물없는 사이였다는 명희(당시 신세계 백화점 상무) 역시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아버지와 소원해 졌다고 한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삼성의 모 계열사 주식을 둘러싸고 명희가 이를 부친에게 요구하자 이병철은 이를 들어주기는커녕 ‘너에게 신세계 백화점을 줬는데 왜 또 달라고 하느냐’고 처음부터 노여워했다는 것이다. 가장 가까웠다는 막내딸마저 사이가 멀어지자 가장으로서 이병철은 건희와 태휘 만을 제외하고는 3남 4녀 자식들로부터 <비정의 아버지> <돈 밖에 모르는 아버지>라는 소리를 들을 법 했을 것이다. 평소 자식들로부터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유교적 덕목을 가르쳐 왔다는 아버지로서 정작 사업으로서는 <평천하> 하였는지 몰라도 <제가> 만큼은 그가 가르쳐 온 대로 되지 않은 셈이다. 한남동 저택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던 이병철의 이런 고뇌의 마음속을 간파한 사람이 태휘였다. 그는 이런 아버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붙임성 있게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골프를 치러 갈 때나 무슨 일을 할 때도 늘 아버지 곁은 떠나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다른 자식들과 서먹한 이병철로부터 태휘는 절대적인 총애와 사랑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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