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가 비운의 황태자로 불리는 장남 이맹희는 25년전 오늘의 사태를 예감했는지 모른다. 아버지 이병철로부터 버림받고 십수년을 주유천하하며 유랑생활을 해야 했던 맹희는 참담함을 견디며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했다. 삼성그룹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치밀한 암투로 정신병자로 몰려 감금 납치까지 당해야 했던 맹희는 아버지 사후 25년 만에 동생 이건희를 상대로 아버지의 차명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형제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사분오열로 갈라섰다. 오늘의 대 삼성을 창업한 아버지 이병철이 부관참시 당하고 있는데도 자식들은 재산에만 눈이 멀어 치졸한 언쟁만을 일삼는 참으로 목불인견의 추악한 모습만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형은 동생을, 동생은 형을 누나와 여동생은 오빠들을 향해 저주에 가까운 극언을 퍼 붓는 관경에 국민들은 아연실색하고 있다. 국민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이자 세계의 삼성의 도덕성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일반인과 달리 출발부터 다른 이들 일가를 보는 국민들은 분노에 앞서 연민의 정을 보내고 있다. <선데이저널>은 지난 8주간의 장남 이맹희의 25년전 인터뷰를 이번 호로 끝마치며 곧 이어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성의 숨겨진 비화들을 추가로 공개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
이병철이 막내아들 태휘를 어느 정도 아끼고 있었는지 하는 대목은 다음과 같은 사건으로 입증할 수 있다. 한국에 온 태휘는 큰 어머니 박두을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인사하러 가겠다고 알렸다. 태휘의 전화를 받은 박 여사는 “지금은 몸이 불편하니 다음에 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거절하고 자리에 누워있는 박 여사에게 또 다시 전화가 왔다. 태휘는 지금 곧 떠나겠다고 다시 알려 왔다. 참다못한 박 여사가 “아무리 그래도 몸이 불편하다는데 예의도 없이 왜 자꾸 오겠다는 것이냐”고 역정을 냈다. 그러자 태휘는 이병철에게 “장충동 큰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나를 만나 주지 않는다.”고 고자질(?)을 했고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이병철은 즉시 차를 타고 집으로 달려갔다. 아내를 일으켜 세운 이병철은 극도로 흥분하여 닥치는 대로 전화기를 집어 던지고 화장대를 박살내고 TV를 집어 던지는 등 행패를 부렸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남편의 난폭한 행동을 피해 박 여사는 다급한 나머지 신발까지 벗어 들고 맨발로 집 바깥으로 달아나야 했다. 팔십이 넘은 할머니의 걸음을 장충동 집의 23살 난 가정부가 못 쫒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감히(?) 누구도 못 말리는 상황에서 이병철의 실력행사가 계속되자 이를 보다 못한 가정부가 그를 말렸다. 가정부는 <제가 회장님 댁에 있은 지도 10여년이 넘었는데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건 정말 처음 봅니다. 회장님께서 제발 참으세요.>라고 애원을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께선 그 일을 당하시고 몸이 더 편찮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 건희가 찾아왔어요. 생전에 장충도 어머니께 잘 오는 법이 없던 건희가 웬일로 왔을까 궁금하게 생각하셨답니다. (그때 맹희는 자리에 없었다고 합니다). 건희는 다짜고짜 어머니를 붙들고 설교하기 시작하더래요. 몸이 불편해 잘 앉지도 못하시는 어머니를 자식이 설교를 하다니 말이나 되는 일인지…..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어머니가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어 집안 망신시킨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간단히 말하고 돌아가면 될 텐데 5시간을 어머니를 붙들고 횡설수설 시작도 끝도 없는 소리를 해 노인을 괴롭힌 겁니다. 세상에 우리 팔십 넘은 할머니 같은 어머니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맹희의 계속되는 말에 의하면 태휘가 오고 나서는 장충동에 생활비 지급도 끊겼고, 아버지가 “절대로 도와주지 말라”고 엄명까지 한 터여서 더욱 어머니의 생활이 곤란하게 되었다고 털어 놓았다. 한편 이태휘가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 살 것인지, 아니면 일본으로 되돌아 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삼성 그룹 후계자 승계와도 관련이 있어 그룹 관계자들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그는 얼마 전 한국 국적 회복 수속을 밟았다. 태휘가 한국 국적 회복 수속을 밟은 것은 다른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이병철의 재산을 상속하기 위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현재(86년 당시) 국내법은 외국인에게는 주식 취득과 재산 상속이 금지되어 있어 이 문제를 확정짓고 나야 태휘가 이병철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 그러나 태휘는 제일제당 대주주가 됨으로써 위의 상속문제를 일축, 부친의 총애가 얼마만큼 깊은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태휘는 아버지 이병철이 작고한 후인 1988년 초에 잠시 일본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때 태휘는 아버지 없는 한국 생활에 대하여 불안감을 나타냈으며 자신의 친어머니에게 그런 사정을 이야기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휘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공산이 큰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삼성의 해외지사에 책임자로 부임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태후가 일본에서 출생한데다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 실정과 잘 맞지 않을 뿐더러 아버지 없는 한국에서 자신을 아껴주고 도와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또 큰 어머니 소생인 맹희, 창희 등이 거들떠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모든 형제들이 자신에게 차디찬 시선을 보내기 때문에 상당히 정신적으로 불안해하고 우울해 보였다고 제일제당 직원들이 말했다.
버림받은 아들들의 때 늦은 후회
한때 삼성의 후계자설에 대해 변수 요인이었던 장남 맹희와 차남 창희의 움직임은 상당한 소문이 되기도 했으나 겨국 이병철의 유언대로 후계자는 이건희로 확정되었으며 이병철이 숨을 거둔 그 날 밤 이건희는 제2대 삼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래서 삼성왕국은 왕국을 일군 이병철의 뜻대로 자신이 지명하고 키운 삼남에게로 바톤이 넘어갔으며 삼성은 제2의 탄생을 시작했다. 특히 증권가와 재계에서 번지고 있는 화제는 과연 삼성이 이건희 체제로 발판을 굳히면서 한국 최고의 재벌답게 성장할 것이지, 혹은 후퇴할 것인지? 그 자리에 계속 머물고 있을 것이지? 하는 호기심과 함께 아버지로부터 무참히 버림받은 장남 맹희와 둘째 창희가 조용히 그대로 물러 설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다. 이병철이 작고한 얼마 후 그 동안 재계에서 실종되다시피 했던 이맹희의 주변은 지난날과는 달리 차츰 분주한 움직임이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차남 창희 역시 자신이 이룩한 기업 <새한 미디어>를 기업 공개하고 공기업으로서 대외 이미지를 강화하는 등 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차남 창희의 경우 <새한 미디어>의 성공으로 기업가적 경영 능력을 서서히 인정받고 있었다. 비록 <투서사건>을 일으켜 이병철의 눈 밖에 난 자식이었지만 자식의 성공을 좋게 본 아버지 이병철은 작고하기 전 한 때 소병해 비서실장을 <새한미디어>감사로 선임케하는 등 많은 관심을 나타내 주기도 했다.
그 후 이병철이 차남 창희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거나 계열기업들을 방문하는 일이 눈에 띄기도 했었다. 삼성그룹 정례 사장단회의 때는 삼성그룹에서 어떤 직책도 없는 창희가 참석, 눈길을 끌기도 했다. 말하자면 차남 창희는 생전에 아버지와의 화해에 성공한 것이었다. 재계에서는 이런 창희를 놓고 한때는 <삼성후계자 체제>와 관련 ‘변수가 생기지 않겠느냐?’하는 그럴 듯한 소문들이 퍼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병철은 이런 창희의 재등장과 관련해 <삼성 경영체제에 변동이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창희에 대한 나의 생각이 달라졌을 뿐이다>고 못 박기도 했다. 그러나 태휘가 삼성에 입성하면서 창희는 쑥 들어가 버렸다. 삼성에 들어 온 태휘의 막강한 그룹 내 파워는 이병철 다음이라는 것이 공공연히 나돌고 잇는 상황에서 창희의 존재가 묻혀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 경영 측면에서 창희가 아일랜드에 합작 공장을 건설하고 새한미디어를 기업 공개하는 등 이미지를 강화시키자 삼성그룹 현 체제에서 더 이상의 팽창을 우려, 새한미디어를 삼성그룹에 합병시키려고 하자 창희가 이를 거절했다는 소문까지 파다하게 퍼졌다. 즉 창희가 동생 건희의 그룹 후계자 승계에 불만을 품고 동생 건희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퍼트렸기 때문에 삼성출입이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병철이 자신의 사후 후계자 승계문제에 대해 가장 우려했던 사람으로 장남 맹희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삼성 그룹 이병철의 직계 자녀들 중에서 장남 맹희만큼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아 온 사람도 드물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투서사건> 이후 아버지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지금까지 십 수 년을 버린 자식이 되어 온갖 어려움을 겪어 온 맹희였다. <<평생을 서자보다도 더 굴욕적으로 살아 왔다. 그러나 다 지난 간 일. 누구를 원망해 본 적도 없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집 장남으로 태어나 뜻을 제대로 펴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사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술회했다. 한 때 삼성을 맡아 경영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던 맹희의 이 말은 불과 6개월 만에 단명으로 끝난 비운의 황태자로서 지나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뭔가 뼈있는 암시로도 들린다. 이는 주위에서 스케일이 크고 보스 기질이 강하다고 알려진 맹희의 최근 움직임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데서 그 까닭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맹희의 경우, 그가 삼성의 황태자 시절, 많은 어려운 처지의 친구들이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 맹희는 삼성의 뒷무대로 살아 졌지만 그때의 많은 친구들은 현재 한국 정계와 재계를 움직이는 실력자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맹희의 친구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맹희의 경북 중, 경북 고 동기생(32회) 친구부터 알아보자. 경북고 32회 동기들 중에는 현재(87년 당시) 한국의 정계와 관계의 강자들이 수두룩하다. 새정부 고위층, 정호용 전 국방장관 등 제6공화국을 주도 세력이 그의 동기생이며 친구이다. 그 외에도 김윤환 전두환 대통령 비서실장, 권오기 동아일보 주필, 정춘택 전 산업은행 총재, 구본호 한양대 교수, 전상호 삼성 데이터 사장 등 각 분야에서 중추급 인사로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평소 맹희의 성격과 대인관계로 미뤄볼 때 어떤 가능성을 엿보는 재계의 관측도 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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