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대학 출신 탈북자 주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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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설명
 ⓒ2005 Sundayjournalusa












 ▲ 탈북자 주성하 기자(동아일보 국제부)
북한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 후  탈북한 주성하 기자(현 동앙일보 국제부)는 지난 13일 LA에서 육군종합학교미주전우회LA(회장 정용봉) 월예모임에 참석해  자신의 탈북 경험담을 밝혔다. 그는 이번에 14-15일 오렌지 카운티 어바인 소재 베델한인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북한포럼 및 통곡 기도대회에 초청연사로 참석했다. <편집자주>

주성하 기자는 원래 함경북도 어촌마을에서 태어나 김일성종합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그와 같이 공부한 학생 중에는 북한의 실세 김정일의 누이동생인 김경희의 자녀들을 포함해 권력층의 자제들이 많았다.
대학시절을 통해 그는 “사회주의 지상낙원”이라는 북한에서 말과는 달리 북한사회의 빈부격차를 뼈저리게 느꼈다. ‘국부론’이란 책을 몰래 읽어 보았으며 믿음을 나눌 수 있는 동료 학생들과 체제 반대 운동을 비밀로 했다. 나중 동지 중의 한명은 신분이 발각되어 처형당하기도 했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다. 김일성 대학은 전체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영어를 공부 하지만 그렇게 인기가 없다. 가장 인기있는 외국어는 중국어이고 다음이 러시아어이다. 북한에서 교수는 국가에서 학위를 수여받은 사람만이 ‘교수’라고 불리는 소수의 학자들만이 교수라는 칭호 를 쓰고 있다.  나머지는 전공분야를 가르치는 ‘원사’라고 부른다.



김일성 대학은 평균 매년 1,500명 정도를 입학시키는데, 전체 학생의 50%는 평양에 있는 고급당 간부들의 자제들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50%는 지방에 할당하고 있다. 지방의 도와 특별시에 평등하게 할당하여 선발한다.  입학은 경쟁이 심한데 남한의 서울대학교보다 힘들다고 주 기자는 밝혔다.
주 기자는 다른 탈북자들처럼 배가 고파서 탈북을 한 것이 아니고, 북한 법을 어겨 이를 피하려고 탈출한 것도 아닌 북한의 체제모순을 느껴 탈북한 특이한 주인공이다. 그는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탈북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공안원에게 체포를 당해 북한으로 송환됐다. 그는 정치범으로 처형 당할 위기에 있었으나 과거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의 실세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석방되었다. 그후 바로 다시 탈북해 중국에서 수년간 피신해 있다가 2002년 한국에 들어왔다.

주성하 기자의 가장 큰 관심사는 북한의 현실을 남한 사람들에게 그대로 알려주는 일이다. 또 하나는 탈북 고아들을 입양시키는 일이다.  중국이나 기타 지역에서 떠돌고 있는 탈북 고아들을 한국으로 데러오기 위해 탈북 고아 1인당 약 500 달러 비용이 든다.
그는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탈북 고아를 입양시켜 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들 탈북 고아들이 미국에서 성공하여 나중 북한으로 돌아간다면 자유세계와 공산세계간의 체제차이가 얼마나 다르다는 것을 실증하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 월남이 멸망하고 ‘보트피풀’들이 미국에 정착해 그들이 다시 고향 베트남을 찾게되면서 베트남이 다르게 변화했다는 것이 북한도 이를 따르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 북한어린이들의 모습.
탈북자들이 다시 북한을 방문하게 되는 그 때가 준통일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그는 북한 사회가 국민소득 3,000 달러 시대가 되면 통일이 성숙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북한이나 중국에 비밀연결 고리를 지니고 있다. 김정일의 사망소식도 누구보다 먼저 북한 정보망을 통해 알게됐다.

그는 북한의 현체제가 4년이나 5년 이내에 붕괴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통일2018’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김정일의 사망을 원래 2014-15년으로 예상했었다. 북한내부의 정보망을 통해 김정일의 건강상태가 오래 가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었다. 그러나 그의예상보다 김정일은 일찍 사망했다.

그는 북한에 있을 때 대북 풍선으로 인한 삐라를 본 적이 거의 없다. 다만 오래전 바닷가에서 흘러 내려온 삐라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남쪽에서 보내지는 삐라는 거의 황해도 지역에 한정된다고 들었다. 그의 생각은 대북풍선을 통한 북한사회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이제는 별로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기후상 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람이 불기보다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부는 경우가 많아 한정적이라는 점이다. 일부에서 대북풍선보내기를 선전효과나 정치적 쇼로 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대북풍선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백령도에서 실시한다면 그나마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밝힌 주 기자는 중국 등에서 북한으로 대북풍선을 보내는 것도 효과적이지만 현실상 중국과 북한간의 관계로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남쪽에서 북한으로 보내는 대북풍선 활동에는 쇼가 너무나 많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주 기자의 생각이다. 지금은 북한의 주민들 많은 사람들이 남한의 사회에 대해 너무나 많이 알고 있기에 풍선 삐라에서 보내지는 소식은 이미 북한에서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비디오나 DVD정도로 너무나 많은 것들이 북한 사회로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다만 북한주민들이 체제상으로 압력을 받고 있기에 겉으로 표현은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휴전선에 설치된 대북방송 확성기는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다는 것이다. 남쪽에서 들려오는 확성기를 통해 북한 병사들은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확성기 방송을 노무현 정권 시절 폐지시켰다는 것은 “이적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주성하 기자의 생각이다.








남한 밀수 컴퓨터에 ‘야동’ 가득

‘누리꾼 체육대회’로 채팅방 전격 폐쇄

(북한의 젊은 남녀도 인터넷 채팅으로 연애를 한다. 부잣집 사람들은 ‘콤퓨터’를 무엇보다 먼저 구입해야 할 필수품으로 여긴다. 하지만 북한 인터넷은 외부와의 연결이 차단된, 인트라넷에 가깝다. 세상과 동떨어진 어둠의 땅에서도 핏줄처럼 뻗어나가는 북한의 인터넷에 대해 알아 본다. 다음 글은 신동아에 게재된 주성하 기자의 글 중 일부분이다 -편집자)

2006년 6월 평양의 국가안전보위부(이하 보위부)에서 인터넷 관련 대책회의가 열렸다. 발단은 ‘조선컴퓨터센터(KCC)’ 홈페이지인 ‘내나라’에 올라간 글 때문이었다. ‘내나라’는 1996년에 개설된 북한 최초의 홈페이지.











 ▲ 북한의 인터넷 게임방
이곳 게시판에 한 누리꾼이 “내나라 개설 10주년 기념일에 평양체육관에서 네티즌의 체육경기를 발기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북한에서는 누리꾼을 네티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글을 보고 10주년 기념일 당일 평양체육관에 무려 300여 명의 누리꾼이 모였다. 북한판 플래시 몹(flash mob•불특정 사람들이 특정 장소에 모여 깜짝쇼를 벌인 뒤 흩어지는 행동)인 셈이다. 이날 모였던 이들은 말이 누리꾼이지, 따지고 보면 평양의 ‘오렌지족’이라 할 수 있다. 당시엔 어느 정도 경제력 있는 집에만 컴퓨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북한 보위부의 참을성을 끝내 허물어뜨렸다. 북한에선 당국이 허가하지 않은 모임을 엄격히 금지한다. 평양은 더하다.
남한에서 타종 행사를 한다고 새해 첫날 종각 일대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처럼, 한때 북한에도 신정 때마다 김일성광장에 나와서 인민대학습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문화가 확산돼 김일성광장에 자연발생적으로 모이는 사람 숫자가 점점 많아지자 보위부는 만일의 사태를 우려해 강제로 해산시켰고, 다시는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았다.
이런 체제에서 건전치 못한 회색분자로 볼 수밖에 없는 청년들이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이용해 300여 명씩이나 삽시에 모이니 정말 묵과할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더구나 평양 체육관 에서 10분가량만 걸으면 중앙당 청사가 나온다.


긴급 해산 소동


보위부는 이날 긴급 출동해 누리꾼들을 해산시키고 체육경기를 무산시켰다. 사실 이전에도 인터넷을 통해 불특정 청년들이 모여 축구나 농구경기를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북한 당국도 이를 눈감아줬다. 하지만 모이는 숫자가 수십에서 수백 명 단위로 커지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다가 300명이 넘어가자 칼을 뽑아 든 것이다.
이 사건으로 단순히 체육경기만 무산된 게 아니었다. 인터넷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이 뒤따랐다. 사실 이 망은 북한 내부에서만 쓰기 때문에 인터넷이라기보단 인트라넷에 더 가깝다. 북한에선 이를 보통 ‘망’이라 부른다.
보위부 요원들은 망을 검열해보고 깜짝 놀랐다. 문제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채팅방에선 남한 말투를 쓰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어 있었다. 당국의 의도와 다른 내용의 게시물 도 적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망에서 채팅 방이 모두 사라졌다. 또 당시 북한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PC방들도 모두 폐쇄됐다. 집 전화 모뎀을 이용한 개인의 망 접촉도 금지됐다. 망 접속은 기관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게 됐다. 북한에 선풍적 인기를 몰고 오던 인터넷 문화가 급작스럽게 찬 서리를 맞는 순간이었다.
사실 북한의 누리꾼들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다. 자기들끼리도 인터넷을 통해 이뤄지는 절제되지 않은 표현과 행동이 북한이라는 체제에서 용납되지 않는 걸 알고 우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하면서 ‘언젠가는’ 제재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너무나 빨리 다가왔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북한은 인터넷 발달에 나름 힘을 쏟아왔다. 폐쇄국가에 웬 인터넷 이냐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북한은 이 분야에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 이상의 관심을 기울였다. 2008년 12월 체제에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외부 자본을 유치해 휴대전화를 다시금 개통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북한은 2002년 11월 휴대전화를 처음 개통했다가 2004년 4월 용천역 기차 폭발사건이 터지자 중단했다.
 




탈북자 출신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 프로필

-김일성대학 졸업(1992)
-1998년 탈북, 2002년 한국 입국, 2002년 이북5도민연합회 기자를 거첬다.
-2003년 ‘동아일보’ 공채 입사, 현 ‘동아일보’ 편집국 국제부 기자, 저서로는 ‘세계의 명문 직업학교를 가다’, ‘외국특파원들이 본 두개의 코리아’,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 등이 있다.
-동아일보에 2003년 말에 입사 , 300대 1의 경쟁률6명의 기자선발에 합격.
-영어와  중국어 능통. 외국어 공부는 어릴 때부터 충실히 했다. 대학교육 과정에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중국어는 독학했다.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라는 제목의 블로그를 통해 꾸준히 북한의 실상을 밝힘으로써 방문자가 4,000만 명을 돌파한 파워 블로거인 그가 들려주는 또 다른 ‘흥미로운 북한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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