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호 정치범수용소의 주인공 탈북자 ‘신동혁’의 충격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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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혁씨(왼편)과 브레인 하덴(번역자)
신동혁 씨는 현대판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제14호(개천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난 사람 중 탈북한 최초의 인물로 자신의 수용소 삶을 책으로 발간해 전세계적으로 북한정치범 수용소를 고발해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현재 뉴욕타임스 북리뷰에서 4위에 올랐다. 북한이란 땅 자체가 감옥과 다름이 없는데 그 감옥 사회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감옥인 정치범 수용소에서 그는 소위 “표창결혼”(모범죄수끼리 짝지어주는 결혼)으로 맺어진 부모에게서 태어난 특이한 인물이다. 탈북한 그를 심리학자들이 연구대상을 삼기도 했다. 그는 지난 14일과 15일 오렌지카운티 어바인 베델한인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크리스천북한포럼대회에 초청을 받아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비참한 현실을 증언해 2천여 명의 참가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참석자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북한 참상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고, 마구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각종 학살이 북한 땅에서 자행되고 있는데 우리가 기도만하면 되는가”라고 토로했다. <편집자주>
 
그가 맡은 첫 번 주제는 ‘북한 인권희망은 있는가’라는 제목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그는 먼저 좌중을 둘러보며 ‘여러분은 북한 인권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좌석에서는 ‘그렇다’라는 대답이 들렸다. 하지만 신동혁 씨는“나는 북한 인권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정치범수용소에서 어머니와 형이 공개처형으로 죽는 것을 보았다”면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서 죽기 싫으면 도망치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런 곳에서 어떻게 희망을 볼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나 24년간을 살았다고 말한 그는 “북한 인권을 한다면서 북한 인권백서를 발표하든가, 세미나를 하는 것 등은 나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정부에서 5개 정치범 수용소에 15만 3천명이 있다는 공식발표와 함께 비공식적으로는6개 수용소에 20만 명이 수용되어 있다라는 것은 그리 중요한 수치가 아니다”면서 “북한에서 수용소 인구는 정식 인구조사에도 포함이 되어있지 않다. 오직 이들이 만들어 내는 물품에만 관심이 있다. 단순히 생산도구일 뿐이다.”라고 밝혔다.


현재 20만 명이상이 정치범 수용소생활


신동혁 씨는 “북한정권은 하루 밤 사이에 이들(수용소정치범)을 모두 죽일 수 있다.”면서 “북한정권은 7억 달러를 퍼부어 위성을 쏘아 올리는 집단이다.”면서 이런 그들에게 인권에 대한 희망은 없다는 것이다.
신동혁 씨는 “탈북자인 우리가 ‘도와 달라’고 말할 때 어떤 이들은 ‘당신들이 먼저 싸워야 하지 않는가라고 한다”면서 “지금까지 4년이 지났으나 북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리고 나는 똑같은 말(수용소실태)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남한의 어느 한 정치인은 ‘북한주민들이 알아서 해야지…’라고 한다.”면서 “어떤 때 우리들 탈북자들을 ‘변절자’로 매도하기도 한다.”면서 한탄했다.



그는 사회에서 북한 인권을 도와달라며 ‘내가 이렇게 살았다’고 했을때 상대방들은 ‘증거가 있는가’라고 되묻기도 하여 절망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고 했다. 지난해 봄 ICC(국제형사재판소)의 한 검사를 만났는데 그는 ‘북한 인권에 대해 지금 할 수 있는 것(기소를 의미)이 없다’며 ‘증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 너무 실망했다. 그 검사는 ‘만약 북한에서 학살사건 재발했을 때 학살 당사자를 기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희망이 없다’고 느꼈다.











 ▲ 신동혁의 탈출기

그는 많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의 영상을 보고 ‘이것이 증거다’라고 말하겠지만, 이미 우리는 우리가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보는 것은 이미 지나간 것을 보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홀로코스트’가 발생하고 25년 후 우리는 캄보디아에서 “킬링필드”라는 학살의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우간다, 수단 등지에서의 학살사건 등은 모두 지나간 다음에 영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동안의 이 같은 학살사건에 대해 국제사회는 다 알고 있었지만 행동으로 이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미국무부를 방문했을 때 한 관리가 ‘우리가 홀로코스트를 막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 그는 “코소보 학살사건’때 유엔은 쳐다보기만 했다.”면서 “학살이 끝난 다음에야 전범을 기소했는데, 아직도 그 재판은 계속되고 있는데 학살이 끝난 다음에 기소를 한들 학살당한 사람들이 살아나는가.”라고 항변했다.

그리고는 좌석을 응시하며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북한에서는 아직도 이 같은 학살사건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계속 증거만을 요구하고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는“학살로 인해 땅에 파묻힌 영혼들을 여러분들이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에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없다. 눈에 보이 않는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면서 “세계에서 가장 유례가 없는 끔직한 일이 북한에서는 매일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소리쳤다.

신동혁 씨는 “만약 한국에서 오늘 여기서처럼 북한 인권문제를 두고 이같이 큰대회가 개최됐다면 크게 붐이 일어날 것이다.”면서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미국땅에 와서 한다는 것이 슬프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국의 정부나 정치인이나 국회는 지금 김정은의 학살을 계속 방관하고 있는 것이다.”면서 “이들이 ‘확인할 수도 없고 증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학살에 대한 공범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대한민국 헌법에는 북한주민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되어있다.”면서 “증거만 대라고 요구하는 이 현실에 무슨 희망이 있는가”라고 토로했다.
그는 “인류역사상 가장 끔직 했다는 ‘홀로코스트’도 길어야 13년이었다.”면서 “하지만 북한정치범 수용소에서 학살행위는 벌써 60년째 계속되고 있다. 이 수용소 사람들은 죽는 것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말했다.


상상 초월한 지구상 최악의 수용소실태


그는 24년 수용소생활을 ‘내 운명이다’라고 생각했다. 신씨는 “이런 나에게 어떤 분은 ‘아~ 수용소에서도 살만 하구나’라고 말했다.”면서 “수용소는 철조망으로 둘러있지만 밥도 주고 공부도 시키니 살만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앞으로도 수용소에서 계속 사람들이 태어나니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면서 “하지만 여러분은 수용소의 실상에 대해서는 결코 상상을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오늘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지만 나는 북한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모른다. 나는 그곳을 바꿀 수 없기에 도망쳐 나온 것이다.”면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희망을 거는 것은 여러분들이 수용소를 없앨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호소했다.



그는 탈북해 중국에서 한인교회 7개를 찾아갔는데 6개 교회에서 거절을 당했다고 했다. 나머지 한 개 교회에서 중국 돈 20원을 받아 간신히 상하이로 갔으며, 2006년 2월 27일 상하이 총영사관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해 8월에 그는 한국에 들어갔다.
그는 탈북해 중국을 유랑하면서 공안원들의 눈을 피해 옥수수 덤불속에서 잤을 때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수용소 내에서 공개 처형을 수 없이 보았다고 했다. 매년 3월과 11월에 공개처형이 있다. 보통 한명내지 3명까지도 처형한다. 간수들이 공개 처형 전에 이들 처형대상자에게 눈도 가리고 입도 막은 채 끌고 나온다. 보통 총 3발을 쏘아 죽인다고 했다.
당시 신 씨가 이 같은 공개처형을 보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모두가 죽을때 하늘을 본다는 것이었다. 그는 “처형당하는 그들은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하느님 감사합니다. 지금 고통을 끝나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면서 “아마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하느님을 모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 씨는 자신의 탈북에 대해 “분명히 저를 통해서 하느님이 무엇인가를 전달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내입으로 통해서 북한 땅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그들이 마지막 하느님에 의해 천국갈 때까지 고통뿐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전하라고 저를 선택한 것이라 생각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오직 탈북자들인 우리는 입을 통해서 말할 뿐이다.”면서 “학살당한다는 증거를 원한다면 이미 그들은 죽은 다음일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또 그는 “죽고 나서 천당 가라고 기도합니까. 그들이 살아있어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태어난 신동혁의 삶

신동혁 (申東赫, 출생시 이름: 신인근, 1982년 출생)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제14호(개천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난 사람 중 탈북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의 부모는 수용소 규칙을 충실히 따르는 대가로 주어지는 “표창 결혼”으로 신동혁을 낳았고, 수용소의 다른 구역에 거주하는 아버지를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자라면서 어머니와의 관계도 순탄하지 않아서 그는 어머니를 단순히 “먹을 것을 위한 경쟁자”로만 보았고, 신동혁의 어머니는 그를 심하게 때리기도 했다. 14살이 되었을 때, 신동혁은 어머니와 형의 수용소 탈출계획을 엳듣게 되고 이를 몰래 수용소 간수에게 알렸다. 가족을 밀고한 대가로 포상을 기대했던 그에게 수용소 간수들은 정보를 얻기 위한 심문과 고문을 자행했다. 고문과정에서 신동혁은 뜨거운 불 위에 매달려졌고 간수들은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꼬챙이로 배를 찔렀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그는 등에 심한 화상을 입었고 많은 흉터를 얻었다.
1996년 11월 29일, 신동혁의 형과 어머니는 수용소 탈출을 시도한 이유로 공개 처형되었고 그는 이것을 직접 목격했다. 가족의 탈출계획으로 고초를 겪은 신동혁은 그들에 대한 반감으로 처형을 지켜보면서도 슬퍼하지 않았지만, 이때의 기억은 탈출이후 그에게 정신적 부담이 되었다.
수용소내의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신동혁은 평양에서 14호 관리소로 끌려오게 된 40대의 박씨 성을 가진 수감자를 알게 되고, 그와 친해진다. 박은 신동혁에게 관리소 밖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신동혁은 특히 그가 경험에 보지 못한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로 만든 음식이야기에 푹 빠져 들었다.
수용소내의 음식은 옥수수, 배추, 소금으로 만든 죽과 때때로 잡히는 들쥐와 곤충 등이 전부였다. 탈출하면 원하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기대에 신동혁은 박과 수용소를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이들의 당초 계획은 신동혁이 수용소를 빠져 나갈 길을 안내하고, 북한을 벗어나게 되면 박이 안내를 하는 것이었다.
2005년 1월 2일, 신동혁과 박은 수용소 철책부근의 작업에 함께 투입되었다. 간수들의 순찰간격이 길다는 것을 눈치 챈 둘은 간수들이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탈출을 감행했다. 박이 먼저 철책 밑을 통과하려고 시도했지만,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책에 몸이 닿아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신동혁은 박의 시신을 방패로 삼아 철조망을 통과 할 수는 있었지만, 다리가 걸리는 바람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된다.
수용소를 탈출한 신동혁은 인근 농가로 들어가 낡은 군복으로 갈아입는다. 군복은 신동혁의 신분을 군인으로 위장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는 필요한 식량을 훔치면서 북쪽의 국경지대로 다가갔다. 수용소에서 태어나고 자란 신동혁은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지만, 탈출 후 민가에서 훔친 쌀 한가마니를 팔아 돈을 마련하고 이것으로 간식과 담배를 샀다.
중국과의 국경에 도달한 신동혁은 담배와 훔친 음식으로 국경 경비대원을 매수하고,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중국을 떠돌며 노동일을 하던 신동혁은 상하이의 한 음식점에서 한 기자와 우연히 만난다. 신동혁의 탈북 경험이 가진 가치를 알아본 기자는 주중한국대사관에 보호를 요청하고, 신동혁은 곧 한국으로 보내지게 된다.
신원 확인을 위한 한국정부의 심사를 거친 신동혁은 그의 경험을 토대로 한 수기를 작성하고, 그의 이야기가 언론에 알려진다. 후원자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신동혁은 그곳에서 신인근이라는 그의 본래 이름에서 신동혁으로 개명하고,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의 현실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했다. 이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신동혁은 북한수용소 철폐를 위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14호 수용소로 부터의 탈출 워싱턴포스트의 동아시아특파원을 지낸 블레인하든은 신동혁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2012년 “14호 수용소로부터의 탈출 : 북한에서 자유세계로 탈출한 한 탈북인의 놀라운 여정”을 출판했다. 자신의 자서전 성격의 이 책에서 신동혁은 어머니와 형의 처형과정에서 그가 숨겨왔던 밀고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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