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년 2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발생한 김훈 중위 사망사건이14년만에 LA거주 전직 군방첩부대 출신 동포에 의해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사실을 밝혀내 잔잔한 충격을 던졌다. 1998년 사건 당시 초동수사에서 군 당국은 김훈 중위가 자살을 한 것이라며 사건을 덮어 버리려 했다. 그러나 그 후 김 중위의 소대원들이 북한군과 접촉한 사실까지 세상에 알려지며 군의문사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더구나 김 중위의 사건이 당시 남북 병사들간의 부단한 접촉이 세상에 알려질가 김 중위 사건을 ‘자살’로 단정지은 것이 아닌가로 의혹을 받아왔었다. 이런 김중위의 의문사가 다시 세상에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급기야 국민권익위원회가 국방부에 전면 재조사를 지시한 끝에 자살이 아닌 김중위의 소대원에 의한 타살로 결론 내려지는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으로도 잘 알려진 이 사건은 남북 군인들간의 접촉을 덮으려 했던 군 당국의 전형적인 은폐사건 이었다. 당사자인 김훈중위는 지난 1998년 억울하게 의문사를 당한 것도 부족해 정신질환에 의한 자살이라는 오명을 쓰고 죽은지 14년만에 죽음의 진상이 밝혀진 것이다. 고 김 중위 의문사와 LA동포의 끈질긴 사건 추적의 전말을 <선데이저널>이 추적 취재해 보았다. 성 진(취재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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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훈 중위 어머니가 아들 영정을 들고 오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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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3일은 추수감사절 다음날인 ‘블랙 프라이데이’였다. 많은 한인들도 쇼핑을 위해 백화점 등에 몰리고 있을 이날 오전 11시 LA한인회관 대회의실에는 약 50명의 노병들이 모였다. 예정된 ‘연평도 포격 2주년 규탄대회’ 순서가 끝날무렵, 한 인사가 연단 앞에 나서서 “오늘 이자리에서 한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면서 “지난 14년동안 한 국군 중위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이번 대선 에서 좋은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어 그는 “우리 군은 언제부터인가 군기가 빠져 있다”면서 “지금 우리 군에서 의문사가 많이 있으나 진상이 밝혀진 것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지난 14년 동안 미국 땅에서 고국의 한 국군의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안보행사 때면 참석해 호소해 온 최중성씨의 피나는 노력에 군의문사 해결에 크나큰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암살 후 자살로 위장 처리
한국에서 군사정권 시절 군에서 병사들의 의문사는 ‘묻히는 사건’일 뿐이었다. 군 복무 중 자살자가 나와도 군은 사망원인을 밝혀주기보다는 유가족들에게 신속한 장례를 종용하기 일쑤였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1980~1992년) 군 자살자는 연평균 224명. 지난해 군 자살자(97명) 에 비하면 전체 병력 수를 감안해도 엄청난 숫자다. 이같은 군의문사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1998년 2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발생한 김훈 중위 사망사건이다. 당시 초동수사에서 군 당국은 김훈 중위가 자살을 한 것이라며 사건을 덮어 버리려 했다. 그러나 김 중위의 소대원들이 북한군과 접촉한 사실까지 세상에 알려지며 군의문사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더구나 김 중위의 사건이 당시 남북 병사들간의 부단한 접촉이 세상에 알려질가 김 중위 사건을 ‘자살’로 단정지은 것이 아닌가로 의혹을 받아왔다.

남북 군인들간의 빈번했던 당시 접촉 행위가 알려질가, 김 중위 부대 소속원이 김 중위를 암살하고 자살로 위장한 사건이라는 의혹을 줄곳 받아왔다. 김 중위는 JSA의 경비초소에서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상을 입고 죽은 채 발견됐으며 최초 현장 감식 두 시간 전에 이미 ‘자살’ 보고가 이뤄지는 등 부실한 초동수사로 논란을 빚은 바 있다. 김 중위 사건을 조사한 국민권익위원회는 김 중위의 순직 처리를 권고했으나 국방부 조사본부는 ‘정신질환에 의한 자살’로 결론을 내렸다.
김 중위 사건은 두 차례의 군 조사와 한 차례의 국회조사 등을 거치며 14년째 자ㆍ타살 여부를 놓고 군과 유가족들이 다툼을 벌여 왔는데 지난 8월7일 국민권익위원회가가 김훈 중위 사망 원인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며 김훈 중위를 순직 처리하라고 국방부에 권고했다. 처음으로 국가 기관이 ‘자살’에서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라고 판정한 것이다. 이처럼 자살로 단정됐던 김훈 중위 사건이 본국의 국민권익위원회가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며 ‘순직 처리’를 권고했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지난 14년간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전심전력을 보낸 LA동포 최중성(재미육군방첩부대 서부지역 동우회장) 씨가 있다. 그는 수년전 국회국방위의 재조사에서 김훈 중위의 타살가능성을 높혀주는 재조사 과정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LA 동포 최중성씨, 재조사 결정적 역활
예비역 영관장교인 최중성씨는 1998년 2월 김훈 중위 사건 발생 직후 언론보도를 접하고 자신의 방첩부대 경험으로 판단하고, 모든 정황으로 볼 때 타살임을 확신하고 당시 ‘김훈중위 사인규명 촉구 공개 탄원서’를 본국의 관계 부처에 보내는 등 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앞장섰다. 또 뉴욕 주정부 한인 법의학자인 루이 노박사에게 이 사건의 과학적인 조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에도 본국 관계부서에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당시 1998년 9월에는 한인 720명의 서명을 받아 진상규명탄원서를 제출했고 그 해 10월에는 ‘고 김훈중위 살인범 체포 촉구 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위원회에서는 김훈중위 사건을 ‘진상규명’의 차원을 넘어 ‘타살’로 결론짓고 당시 살인범 체포를 촉구하는 820명이 서명한 성명서를 처음으로 본국에 보냈다. 최 씨는 “처음에 제가 김훈중위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했을 때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면서 심지어 “본국에서조차 사망한 군인을 미주사회에서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했다.

그는 “처음 신문기사를 읽을 때부터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 느꼈다”면서 “우선 김 중위의 아버지 김척 장군의 경력을 살펴보니 야전군 출신으로 철저한 군인이었고 천주교에 독실한 신자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모든 정황으로 볼 때 김 중위가 자살할 어떤 상황도 아니었다”면서 “이곳에 있는 예비역 군 관계자들과의 모임에서도 ‘김 중위 사건’은 타살이며, GP에서의 반란(하극상)일 가능성을 예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죽은 김훈 중위 옆에 놓인 철모 상태, 오른손의 화약혼 흔적 없음과 머리에 둔기 자국 등 타살에 심증 등등이 여러가지라고 강조했다. 그는 매릴랜드 법의학자에게도 김훈 중위 자료를 전달해 ‘사망자가 스스로 방아쇠를 당겼다고볼 수 없다’라는 소견서를 받아내 김훈 중위의 ‘자살설’을 부정하는 자료를 얻기도 했다.
당시 김 중위 사건 발생 1개월전에 북한군 보위부 간부가 귀순을 했는데 북한측이 공공연히 보복행위를 하겠다며 공갈을 했는데, 이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란 의혹을 최 씨는 주장했다. 최 씨는 ”나는 처음에 주위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군 출신이란 점에서 비록 고 김훈 중위와 저는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유가족의 고통을 생각하고 억울하게 자살의 불명예를 쓴 젊은이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동기를 설명했다. 최중성씨는 “이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지 않을 경우 대한민국의 군기가 흐트러질 것”이라는 전직 군인으로서의 우려도 작용했다. 그래서 그는 사건 발생 후 5월에 한국에 정부 기관은 물론 군 연대장급까지 공개성명서를 보냈다. 이같이 본국 각계에 성명서를 보내자, 유족 측에서 이를 알고 김 중위의 아버지 김척 예비역 장군이 미국에 있는 최 씨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특히 김훈 중위의 어머니는 최 씨에게 울면서 전화로 감사를 표명했다.
북한 사주 받은 소대원의 하극상 결론
그는 탄원서를 통해서 김훈 중위가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부하병사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을 제시했는데 현재 정부 차원의 조사에서도 정황증거로 볼 때 이같은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최씨는 “본국에서 김훈중위 사건을 다시 조사하게 돼 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면서 “이 사건의 규명을 위해 저의 뜻을 이해하고 탄원서 서명에 참가했던 많은 한인동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뿐”이라고 밝혔다. 그는 ”본국 정부에서 철저한 조사를 통해 반드시 김훈 중위 살인범을 색출하여 억울하게 죽은 한 젊은이의 명예를 되찾는 길”이라며 “내년 2월 24일이면 공소시효가 만료되는데 그 이전에라도 해결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6년 만들어진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군의문사 문제를 독립적으로 다룬 최초의 정부기구로 579건의 군의문사 사건을 조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는데 이를 통해 수많은 군의문사가 세상에 알려졌다. 현재 각군 병원 영안실이나 군부대에는 유골함이나 시신의 형태로 모두 129구가 안치돼 있는데 이중 시신 상태로 가장 오랫동안 안치돼 있는 것이 나진영 해군 이병이다. 나 이병은 1998년 9월 부대 내 상습 가혹행위로 디스크를 얻어 휴가를 나왔다가 병원치료를 받은 뒤 집 앞 아파트 계단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부대에서 타살된 뒤 집으로 옮겨졌다는 유가족과 투신자살했다는 군이 사망원인을 놓고 14년째 다투고 있으며 민간병원에 안치한 2억원대의 시신보관료를 놓고 병원과 유가족은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2002년 3월 경계근무 중 불에 타고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된 반모 이병 사건도 10년 넘게 군과 유가족들이 타살과 자살여부를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다. △문의: 최중성 (323)208-1140
‘김훈 중위 사건’‘순직’처리 권고
대법원‘타살로 인정하라’계류 중
지난 1998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숨진 채 발견된 김훈 중위의 사건과 관련해 14년만인 지난 8월 7일 국민권익위원회가가 사망 원인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며 김훈 중위를 순직 처리하라고 국방부에 권고했다. 국가권익위원회는 대표적인 군 의문사 사건의 당사자인 김훈 중위에 대해 자살이 아니라 순직한 것으로 처리하도록 국방부에 권고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김 중위는 사건 당시 경비초소 순찰 이라는 공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정부가 그의 사망 원인을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했으므로 자살이 아닌 순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김 중위는 사건 당일(1998년 2월 24일) 정오 무렵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었다. 하지만 군의 최초 현장 감식이 있기 두 시간 전인 당일 14시쯤 이미 부대 내부에서 자살 보고가 이뤄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급한 자살예단으로 인한 부실 초동수사가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 왔다. 김훈 중위 사건이 99년 4월 자살로 수사가 종결되자 유가족인 아버지 김척 예비역 육군중장은 당시 서울지방법원에 제소했고 2년간의 재판과정을 거쳐 2000년1월 31일 김훈중위가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명확히 가리기 어렵지만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유족 측은 2011년 9월 “권익위가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해 김 중위의 죽음을 순직으로 인정해 달라” 는 민원을 제기했고, 권익위는 올 3월 국방부와 함께 사고 당시 상황을 재연한 격발 실험을 실시 했다. 권익위 관계자는 “사고 당시 김 중위의 왼손바닥에서만 화약이 검출됐는데, 이것이 가능한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김 중위가 왼손으로 권총 총열을 잡고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이라며 “그러나 같은 권총으로 재연을 해보니, 실험자 10명 모두 김 중위와 달리 왼쪽 손등에서 화약이 검출됐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이 같은 실험 결과가 김 중위가 자살을 하지 않았다는 결정적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군은 권익위의 조사 결과를 전달받는 대로 확인 절차를 거쳐, 2개월 내에 순직 여부를 최종 결정할 방침이다. 권익위는 이번 판단에 앞서 지난 3월 ○○특전여단 사격장에서 국방부 조사본부, 국립과학 수사 연구원과 함께 자살할 경우 발생하는 특징을 확인하는 격발실험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김 중위 손에서 나타난 혈흔은 스스로 격발한 자신의 손에서 나타나는 것과 다른 형태라는 것을 확인 하기도 했다. 하지만 권익위는 “이러한 사실은 김 중위 사망이 자살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지 타살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고 결론지었다. 김 중위 의문사 직후 유가족은 “군이 타살 단서가 될 수도 있는 사건 현장의 시설 훼손, 고인의 손목시계 파손 등을 간과했고 사건 현장과 사체의 사고 당시 상태를 보존하지 않았다”며 사망 원인을 규명해 달라고 국가에 호소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공동경비구역(JSA)’이 만들어지기도 해 김 중위 사건은 국민적 관심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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