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한국대선 후 외신이 본 한반도 주변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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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중요 언론들은 최근 한국과 일본에서의 선거에서 모두 보수, 친미성향의 정치인들이 집권해 미국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들 한,일 양국이 저마다 국익을 앞세워 민족주의 성향으로 나갈 가능성이 많아 한,일 양국의 갈등으로 미국으로서는 새로운 부담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이들 언론들은 미국의 맹방인 한국과 일본의 새로운 지도자들이 양국간의 갈등 요인인 ‘독도 분쟁’과 ‘일본군 성노예’ 문제로 미국의 대외정책의 부담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한반도와 주변국의 새로운 통치자들이 하나같이 보수강성 집안의 인물로 이같은 현상으로 극동 아시아에서 새로운 냉전기류가 일어나며, 자칫하면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국제적 긴장상태가 되어 가고 있다고 전망했다.
김 현(취재부기자) 
 











미서부의 최대 일간지인 LA타임스는 ‘한국에서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 승리해 남북한은 공히 과거 냉전시대 통치자들의 자손들이 집권하게 됐다”면서 ‘일본도 과거 전쟁내각의 장관의 손자가 집권했으며, 중국도 모택동 혁명동지의 아들이 통치자가 됐다’고 지적하면서 한반도와 주변 강국의 새 지도자들이 모두 과거 냉전시대 통치자들의 후손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집안의 내력이 새 지도자들의 통치방식이 따라가지 않을지라도, 우연히도 극동 아시아의 새지도자들의 형태가 유사하다’고 지적하면서 ‘북한의 김정은은 철권통치자였던 김일성의 손자이고, 남한의 박근혜는 박정희 군사정권 통치자의 딸이고, 일본 아베 총리는 과거 2차대전 당시 전쟁내각의 각료인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중국의 시진핑 차기 주석은 공산당 혁명원로인 시중쉰의 아들이다’라고 지적했다.


급변하는 국제정치 미래 불투명


이 신문은 극동지역 특파원인 바바라 데믹이 베이징에서 지난 23일자에서 발신한 기사를 통해 ‘최근의 극동지역 의 정치적 변화에서 미래는 극히 불투명하다’면서 ‘동북아 지역에서 새로운 집권자들의 판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예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국방대학원의 한용섭 교수의 말을 인용해 ‘단기적 전망으로 본다면 이지역에서 새로운 형태의 냉전이 발발할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는데, 한 교수는최근 중국의 새로운 지도체제 변화에 대한 회의에서 이같이 지적했다.



이 신문은 ‘새로운 정권교체기는 언제나 민감한 시기’라면서 ‘새로운 통치자들은 항상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려 민족주의 성향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새지도자인 시진핑 은 전임 후진타오로부터 권력을 인계 받은지 10일만에 중국의 새로운 항공모함 취항식에 참석 해 중국의 군사력 강화를 천명했다.
2020년까지 세계 최대 경제국가를 목표로 하고 있는 중국은 이미 패권주의 성향으로 나가고 있으며 주변 국가들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김정은은 한국의 18대 대선을 치루는 시기에 세계여론에 반하는 미사일 발사를 강행 했으며, 박근혜 대선 승리 3일전에 일본 총리로 재선출된 아베 신조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부활시키는 언변을 늘어놓았다.


한일 감정 악화 미국의 골치거리













한편 뉴욕타임스(NYT)는 한국과 일본에서 친미 성향의 보수정권이 들어서게 됐지만 앞으로도 양국의 긴장 관계가 지속되면서 미국의 아시아 전략을 어렵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고 지난달 21일 전망했다.
이 신문은 한,일 두 나라의 악화된 관계는 이미 미국에 골칫거리로 작용하고 있다며 양국 정부는 지난여름 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려다 독도와 과거사 분쟁에서 비롯된 여론 악화로 무산됐다고 밝혔다.
또 이 신문은 미국이 재정 부담을 덜려고 두 나라에 안보비용 확대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 역시 성과를 내지 못했다며 전문가들은 일본 차기 총리인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에게 특사 파견 등을 통한 관계 개선 의사를 보이고 있지만 여의치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스탠퍼드대학 동아시아 전문가인 대니얼 스나이더 연구원은 “미국은 양국 모두 보수정권이 들어선 것을 대단하게 생각하겠지만 두 나라는 사소한 (정보교류) 협정조차 서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대통령 퇴임 이후에는 양국 관계가 다소 나아질 것이라는 관측도 있지만 일본군 성노예 등 민감한 사안에서는 어느 쪽도 양보하기 힘들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라고 이 신문은 분석했다.
그리고 이 신문은 극우 성향의 아베는 2006∼2007년 총리 시절 성노예가 강제 동원됐다는 한국 정부와 대다수 역사학자의 견해와 달리 일반적인 매춘부였다고 주장, 한국 정부와 미국 의회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고 전했다.
당시 박 당선인은 국회의원 신분으로 아베의 발언을 비판한 미국 의회 청문회에 참석한 바 있다.



위안부 독도문제 외교적 난제


박 당선인은 선거운동 기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성노예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일본 지도자들이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서울시립대의 황지환 교수는 “두 사람의 집권으로 한•일 관계는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이 신문은 최근에 양국 관계의 개선을 위한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 노력이 진행되고 있어 주목된다고 밝혔다.
미국과 일본 당국자들에 따르면 커트 캠벨 미 국무부 차관보가 지난달 일본을 방문해 아베에게 위안부 문제를 사죄한 ‘고노 담화’의 수정을 보류할 것을 요청했다. 외교 분야에서 박 당선인 에게 조언을 해온 이정민 연세대 교수는 “양국 모두 외교적으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이 같은 문제점에도 중국의 군사력 증강과 북한의 핵무장에 대처해야 하는 미국으로 서는 한국과 일본의 이번 선거 결과를 승리로 간주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어떤 인물인가  

전형적인 매파 정치인, 평화헌법 개정












아베 신조 총리는 일본의 전형적인 매파 정치인이다. 자유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이자 제90대•96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제21대 자유민주당 총재이다. 총리가 되기 전에는 제37대 자유민주당 간사장을 지냈으며, 제72대 내각관방장관, 제21대 자유민주당 총재를 지냈다. 2012년 12월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여, 5년 3개월만에 다시 총리로 올랐다.
아베 총리의 집안에는 정치가를 지낸 이들이 많다. 조부는 중의원 의원을 지낸 아베 간이고, 외조부는 제56•57대 총리를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 종조부는 제61•62•63대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 아버지는 외무대신을 지낸 아베 신타로, 남동생은 참의원 의원인 기시 노부오이다. 부인은 모리나가 제과 사장 마쓰자키 아키오의 딸 아키에이다. 한때 한류에도 푹빠졌던 부인이다.
아베 총리는 대학 졸업 후 고베 제강소의 직원으로 일했고, 외무장관의 비서관을 지냈다. 내각관방장관, 내각관방부장관, 자유민주당 간사장, 자유민주당 총재를 지냈으며, 2006년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이듬 해 사임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 자민당 간사장과 관방장관 등 출세 코스를 거친 아베 총리는 2006년 9월 만 52세의 나이로 전후 최연소 총리에 올랐다. 관방 부장관 시절인 2002년 북일 정상회담 전후 일본인 납북 문제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여 대중의 인기를 얻은 덕분이었다.
총리 취임 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시절에 냉각된 외교 관계를 복원하겠다며 중국과 한국을 잇달아 방문하기도 했지만, 재임 기간 대부분을 애국심 교육을 내건 교육기본법 개정과 방위청의 방위성 승격, 개헌 절차를 규정한 국민투표법 강행 통과, 대북 제재 등에 쏟아부었다. 그의 소신은 일본의 평화헌법과 교육, 경제, 안전보장 등 이른바 ‘전후 체제’가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만큼 대담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첫 총리 임기는 정확히 1년으로 끝났다. 측근의 추문이 잇달아 불거진데다 미국 하원이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을 비난하는 결의를 내놓는 등 위기에 처하자 건강 악화를 호소한 끝에 스스로 사임했다.
이후 한동안 잊혀진 인물이 됐지만 동일본 대지진 이후 ‘강한 일본’을 바라는 여론을 등에 업고 총선에 승리해 권좌에 다시 복귀했다. 5년 전 사임 이유로 거론한 궤양성 대장염은 신약 덕분에 완치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아베 총재의 건강과 위기관리 능력에 여전히 의문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어릴 때는 야구, 대학에서는 양궁을 좋아해 2005년부터 일본양궁연맹 회장을 겸임하고 있다.
부친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과 친했고, 아베 총리는 동갑인 신동빈 롯데 회장과 어릴 적 부터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 아키에(昭惠.50) 여사는 2010년에 세상을 떠난 탤런트 박용하의 열렬한 팬으로 유명하다.
2006년 방한시에는 서울 광희초등학교에서 한글 교과서를 술술 읽어 화제가 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한국어 공부나 한국 드라마 시청을 모두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퍼스트레이디 시절인 2007년 4월 외신 인터뷰에서 “같은 여성으로서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정말로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등 아베 총리의 보수 우익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드는 역할을 했었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다. 















 
중국인 13억여명 가운데 최고의 1인 자리에 오르는 시진핑(習近平•59)은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를 지닌 정치인이다. 혁명 원로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질곡의 청년 시절을 보냈고 지방에서 25년을 근무했다. 온화한 미소 속에는 덕을 중시하는 인품이 담겨 있지만 10번이나 거절당했지만 끝내 공산당에 입당한 것에서 보듯 강한 집념의 소유자이며, 날카로운 공산주의 이론가란 평가도 따라붙는다.
시진핑은 1953년 6월 시중쉰(習仲勳•1913~2002) 전 부총리의 두 번째 부인 아들로 태어났다. 시중쉰은 당의 혁명 원로이자 광둥성의 개혁•개방을 이끈 인물이다. 마오쩌둥(모택동)에 의해 숙청당했고 당에서 축출당한 개혁파 지도자 후야오방 전 총서기를 지지했다는 점에서 그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시진핑은 부친이 근무하는 중난하이에 자주 놀러갔고 저우언라이(주은래) 총리를 수수 (叔叔•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태자당 계열로 분류되는 쩡칭훙 전 부주석, 위정성 상하이시 서기 등과 어릴 적부터 교류했다. 시진핑의 고난은 1962년 부친이 권력투쟁에 밀려 실각하고 1966년 문화대혁명의 광풍까지 몰아치면서 한동안 어려운 시기를 견디어냈다.

1979년 여름 칭화대를 졸업한 시진핑은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에 배치돼 당시 겅뱌오(耿彪) 부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주위의 부러움을 뒤로한 채 그는 지방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하고 1982년 3월 베이징에서 300㎞ 떨어진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의 당위원회 부서기로 부임했다. 현의 3인자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최고 간부가 되려면 지방정부 간부의 길을 걷는 것이 좋다는 부친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시진핑은 1985년 푸젠(福建)성 샤먼(厦門)시 부시장으로 옮겼으며 이후 17년간 푸젠성에서 일하면서 당서기까지 지냈다. 푸젠성에서의 시간은 그가 정치적 기술을 연마한 시기다.
시진핑은 2002년 푸젠성 성장에서 저장(浙江)성으로 자리를 옮겨 2007년 초까지 재직했다. 당시 31개 중국 성•직할시•자치구 당서기 가운데 최연소급이었다. 그는 골수 현장주의자여서 저장성 서기 시절 동안 1년의 3분의 1을 출장으로 보냈다. 2006년 8월에는 하루에 315명 으로부터 진정을 받은 일도 있다. 저장성 서기 재임 당시 성의 국내총생산 (GDP•1조 5600억 위안) 이 상하이시(1조300억위안)를 능가하는 성취를 일궈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중국 전문가 리청 연구원은 “민간 기업을 발전시키는 데 시진핑이 인상적인 업적을 보여줬으며 이는 그가 개방적인 지도자임을 증명한다”고 평가했다.

시진핑은 2007년 3월 돌연 상하이시 서기로 옮겼는데, 부패로 낙마한 천량위의 뒤를 잇기 위해서였다. 천량위는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고려한 인물이다. 상하이방의 본거지에 그가 입성한 것은 장쩌민이 포스트 후진타오로 시진핑을 지목한 것을 의미했다. 시진핑은 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하고, 농촌이나 공장 등 현장 시찰을 즐겨했지만 상하이에서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상하이시 서기로 7개월 재직한 그는 마침내 2007년 10월 17차 당 대회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미는 리커창(李克强)을 밀어내고 차기 지도자를 예약하기에 이른다. 그의 인생 역정에서 보듯 시진핑이 어느 날 갑자기 벼락출세한 정치인은 아니다. 1997년 10월에 열린 15차 당 대회 에서 장쩌민이 포함된 최고 간부들 사이에서 후진타오 후임을 논의하면서 시진핑은 리커창과 함께 후보로 일찌감치 떠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진핑이 중국의 지도자로 등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정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임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치열한 권력투쟁 속에서 시진핑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면서 입지를 굳혀 갔다. 정융녠(鄭永年) 싱가포르국립대 동아시아연구소장은 “시진핑의 위상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더욱 강화됐다”고 말한다.
이는 중앙에서 그가 자신의 지도력을 발휘한 첫 케이스로 꼽힌다. 올림픽 준비는 외교뿐 아니라 국내 안보, 병참, 운송, 미디어 관리, 환경보호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작업이고 인민해방군, 경찰, 당, 정부, 지방관료들 사이에서 조정 역할을 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올림픽을 기회로 삼아 티베트의 분리주의 운동이 격화됐고 신장의 이슬람 분리주의자들도 동태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2010년 10월18일 톈안먼에서 서쪽으로 8㎞ 떨어진 곳에 있는 베이징의 징시빈관(京西賓館). 시진핑은 17기 중앙위원회 5차 전체회의 폐막일인 이날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선출됐다. 그가 군권 장악을 위한 중대한 관문을 넘었음과 동시에 사실상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르게 됨을 확정짓는 날이었다.
시진핑은 “사람은 유명해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고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시진핑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정치인이란 평가가 적지 않으나 이는 생존술이었을 수도 있다. 예상보다 그가 강력한 지도자가 될 것이란 전망도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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