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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춘훈(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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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동안 한국을 다녀왔습니다. 윤창중이라는 ‘청와대 괴물’이 워싱턴에서 저지른 엽기적인 성추문으로, 나라 안이 온통 멘붕에 빠져있던 때였습니다. 한국은 1인당 우황청심환 소비량이 세계 1위라고 하지요. 사흘이 머다 하고 심장 콩닥거리게 하는 깜짝 사건이 단속적으로 터져 나오는 나라에서, 한방 심장약인 우황청심환이 구급용 가정 상비약으로 애용되는 까닭을 짐작할 만 했습니다. 보름 만에 돌아 온 LA는 보름 전 그대로 평온했습니다. 그동안 개스 값이 조금 올랐고, 주식 값도 제법 올랐더군요. 서민경제를 견인할 부동산 시장의 상승세가 이어지는등 한국이나 유럽 보다 미국의 경기가 선제적으로 호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여러 경제지표들이 잇달아 발표됐습니다. 헌데 한인 비즈니스들은 여전히 꽁꽁 얼어있습니다. 교포 자영업자들의 주력업종인 식당 마켓 옷가게 세탁소등 거의 전 업종이 4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장기불황의 늪에서 좀체로 헤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권 사장에게 그동안 장사가 좀 나아졌느냐고 물었더니, 억센 부산 사투리로 이런 대답이 돌아 왔습니다. “말도 마이소. 장사 안돼 죽겠심더–. 이게 다 그놈의 윤창중 때문이 아입니꺼?”
송호근 교수가 지적한 윤창중의 진짜 죄
권 사장 말 마따나 ‘그놈의 윤창중’은, 지금 200만 재미교포들의 공공의 적 제1호가 돼있습니다. ‘그놈’이 저지른 죄업은, 인종차별과 언어장벽, 힘겨운 막 일등 온갖 ‘멸시천대’ 속에, 내 자식만큼은 이 나라의 떳떳한 주류시민으로 만들겠다며 인고의 삶을 살아 온 모든 이민 1세들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안겼습니다. ‘그놈’이 희롱한 스무 살의 교포 인턴은, 200만 재미교포 모두가 ‘가슴 짠해 하는’ 딸이자 조카며 손녀딸이 됐습니다. 교포사회는 이번 사건을 피해자인 인턴과 그 가족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모두’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윤이 미국법정에 서느냐 안서느냐, 경범이냐 중범이냐, 감옥에 들어가느냐 안들어 가느냐, 그런 법적 문제는 어느 면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 희롱이나 성 폭력 같은 육법전서 속의 범죄 보다 더 중요한 정서적 범죄, 디아스포라의 고단한 삶을 사는 재외 동포들의 자존감을 찢고 훼손한 정신적 범죄의 무게가 훨씬 더 육중해 보입니다. 하버드 유학생 출신인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 교수가 윤창중이 이번에 저지른 ‘진짜 범죄’를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정리했더군요. “첫사랑과 같은 (1세들의) 고국환상을 오염시킨 죄, 이민사에 반 인류학적 애환을 몰각한 죄, 교민들이 눈물로 쌓아 올린 대외적 자긍심을 훼손한 죄–”
대통령의 거짓 사과 쇼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주 윤창중 사건에 대해 ‘대국민 사과’라는 것을 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겠다는 ‘공자 말씀’과, ‘윤창중이 그런 인간인지는 몰랐다’며 인간적 배신감을 토로한 것을, 청와대 당국자는 ‘사과’라고 써 달라고 언론에 주문했습니다. 사과 형식도 수석 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며, 남의 얘기하듯 슬쩍 한마디 하고 넘어가는 모양새를 취했습니다. 진정성이 보이는 사과가 아닌 만큼, 대통령의 별난 인사 스타일이 앞으로 쉽게 시정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 이틀 전엔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이 역시 겉치례 사과를 했지요. 누구보다 피해 인턴과 가족, 그리고 교포사회 전체를 향해 진심어린 사과를 했어야 하는데, 그는 “대통령한테 죄송하다”고 생뚱맞게 자기 보스한테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대통령은 이번 윤창중 사태를 일으킨 원인 제공자입니다. 온 세상이 반대하는 인물을 고집스레 대변인 자리에 앉혀, 이런 국가적 ‘흉사’를 자초했습니다. 대통령은 사과를 해야 할 당사자이지 사과를 받아야 할 대상은 결코 아닙니다. 재미교포들의 공분을 결정적으로 촉발시킨 것은 윤창중이 한국으로 야반도주한 이틀 후 서울에서 가진 기자회견입니다. 그 역시 사과를 하겠다며 “누를 끼쳐 죄송하다”고 대통령한테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는 인턴여성을 시종일관 가이드라 부르며, 성희롱 사실을 전면 부인하는 후안무치를 드러냈습니다.
워싱턴 광장에서 석고대죄를
주미대사관이 이번에 뽑은 인턴은 대통령 방미단의 통역 요원으로, 10대 1 이상의 높은 경쟁을 뚫고 채용된 우수한 교포 2세들입니다. 수도 워싱턴의 인턴 일자리는 미국 인턴십 문화의 꽃으로, 젊은이들이 한번 쯤 해보고 싶어하는 선망의 대상입니다. 이렇게 선발된 여성 인턴을 윤창중은 굳이 가이드라 폄하해 부르며 허리인지 엉덩이인지를 만졌고, 호텔 방으로 서류를 가져오게 하고는 알몸 차림으로 그녀를 맞았습니다. 윤창중은 혐의 내용을 전면 부인했지만, 가해자가 도주해 직접 진술을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경찰 조서는 피해자 진술 위주로 꾸며질 수 밖에 없습니다. 검찰 송치와 함께 조만간 체포영장이 발부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교포사회 일각에서는 그의 미국송환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자는 주장도 있지만, 강제 송환이나 자진 송환이 쉽게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윤창중은 지금 1주 이상이나 ‘잠수’를 탄 채 행방이 묘연합니다. 자살설도 있지만, ‘잡초’ 같은 질긴 인성의 소유자라는 그는 결코 자살을 할 위인이 아니라는 주변 사람들의 얘기가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송호근은 칼럼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미국 경찰에 스스로 출두해 미국 법의 처벌을 달게 받는게 식자의 도리다. 더 중요한 것은 워싱턴 광장에 엎드려 교민사회에 석고대죄 하는 것은 어떤가. 교민사회가 비난과 고통 속에서 결국 그 죄를 사해 준다면 고국 환상을 얼룩지게 한 오염은 씻겨질 것이다–.”
한국 부모들의 자식 사랑법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기대치가 대개 비슷합니다.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일자리, 좋은 배우자 만나, 성공한 사회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국에 이민 와 사는 1세 부모들의 바램도 이와 비슷하지만, ‘각론’ 부문에선 다소의 온도차가 있습니다. 좋은 학교, 좋은 커리어도 중요하지만,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당당히 이 사회의 ‘주류인’으로 사는 것, 부모가 못 이룬 아메리칸 드림을 자식들이 이뤄 줄 것을 대부분의 부모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으로 돈은 잘 벌지만, 한국 말은 입도 뻥끗 못하고 한국 음식은 물론 한인들을 만나는 것 자체를 피하는 순도(?) 100% 짜리 미국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평범하게 자랐지만 한국말 잘하고, 부모세대의 ‘고국환상’을 이해하며, 한국식당 찾아 김치찌개 사 먹고, 한인교회에서 한국말 예배를 보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어떤 쪽이 옳고 좋은가는 부모와 아이들의 선택이나 추구하는 가치관의 문제일 뿐 이렇다 할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윤창중을 경찰에 고발한 여성 인턴은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입니다. 미국 태생이면서 통역을 할 정도로 한국말이 유창한 것을 보면, 부모의 뿌리교육과 고국 사랑이 각별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큰 정신적 상처를 받았을 그가, 아버지 나라인 한국에 상심하고 실망해 엇나가게 되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합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박 대통령이 이 인턴 여학생에게 따스한 위로의 편지라도 한 장 써 보내면 어떨까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