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대한민국의 번영과 성장은 국가의 부름을 받아 젊은 목숨을 바친 국군장병은 물론 경찰을 포함한 유공자들이 흘린 피의 대가이다.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건국하자마자 2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정권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3년간의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조약으로 일시 총성이 멎은 채 올해로 60주년을 맞는다. <선데이저널>은 한국전쟁을 통해 잊혀진 역사의 증언을 담는 특집을 연재한다. 제1편으로 나이 불과 15세에 전쟁에 징집된 변덕인 6.25참전소년병전우회 미주지회장의 이야기를 싣는다. 그는 현재 LA동부 하시엔다 하이츠에 거주하고 있는데 모국 정부가 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아 지금까지 고국 방문을 하지 않고 있다. 그는 휴전 60주년을 맞아 지난 5년 동안 집필한 자신의 소년병 이야기를 탈고했다. <성진 취재부 기자> ![]() 변덕인 회장은1935년 9월 황해도 봉산에서 대지주의 막내로 태어났다. 6.25전쟁이 발발한 당시 변덕인 회장은 황해도 사리원 제1중학생으로 전쟁 중에도 학교는 수업을 계속 하고 있었다. 1950년 10월에 들어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명의로 사리원시 반경 6km 밖으로 주민들은 피난하라는 전단이 수송기로 뿌려졌고 곧 이어서 제트기와 B-29폭격기 편대가 사리원 시내와 외각을 맹폭 하였다. 어린 중학생인 변씨는 부모와 함께 구월산을 끼고 북류 하는 재령강 유역 별포라는 마을로 피난했다. 북한 인민군 패잔병들이 군복 또는 평상복으로 재령 강변 둑길을 걸어 북으로 패주 하고 있었다. 이 무렵 구월산을 중심으로 재령군과 봉산군에는 자체 조직된 각 마을 치안대가 북한 패잔병을 습격하여 무기를 확보하고 패주 하는 북한 인민군 패잔병을 공격했다. 재령강 썰물이 빠지면 인민군 시체가 갈대 벌 해감 찌끼에 엉켜 장마철 홍수에 쓸려간 호박덩이처럼 뒹굴고 있었다.
12월 7일 사리원 집 마당에 수북이 쌓인 눈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변 씨의 아버지는 해수 병으로 연신 가래를 토해내며 황주목(수소돌 고개) 국도 길에서 후퇴하는 국군 차량에 손을 들어 아들도 함께 태워 줄 것을 사정사정 부탁했다. 그 정성이 받아졌는지 저녁 땅거미가 질 무렵 국군 두 명이 집에 뛰어들어 백미 7가마니를 차에 실었고 어린 중학생은 정신없이 그 차에 올랐다. 그의 어머니가 보자기에 싼 밥을 차에 던져 올리는 순간 차는 쏜살같이 달렸다. “어… 아버지 오마니….” 어린 중학생 눈에 순간 멀어져 가는 하얀 어머니 치마폭이 깃발처럼 펄럭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이내 그림자로 사라져 갔다. 그 국군차량은 6사단 소속 3/4톤 차였다. 이렇게 떠난 그의 피난길이 영영 부모를 다시 못 볼 이별이 되고 말았다. 부모와 영영 이별 천신만고 끝에 12월 10일 저녁 국군이 서울 남대문 길목에 그를 떨구어 주었다. 어머니가 꾸려준 등짐을 메고 국군이 준 쌀 서너 되가 든 자루를 손에 쥐고 무작정 걸었다. 의지와 관련없이 입대 12월 27일 오전 기간 사병이 취사장에 와서 어린 중학생에게 「신상명세서」 용지를 주며 ‘써내라’고 하여 사실대로 써냈다. 당시 취사장에서 일하는 할머니가 그가 신상명세를 써냈다는 말을 듣고 펄펄 뛰며 ‘일선으로 싸우러가는 군인이 된다’면서 취사반장에게 사정사정하며 도와주라고 신신당부했다. 사정을 알아본 취사반장의 말인 즉 미성년자는 징집 해당자가 아니므로 현역군인이 아니고 후방에서 지원하는 방위군, 철도경비, 지게 부대 등으로 보내진다는 것이었다.
그는 1951년 1월 중순 보병 7사단으로 전속 명령을 받고 전선으로 출발 전날 손톱, 발톱, 머리털을 깎아 「유물 봉투」에 넣고 군장을 새로 지급 받았다. 그가 속한 3내무반(30여 명)에 미제군화(신품) 2족 나왔고 그 외는 국산 훈련화였다. 교육대장이 제일 나이 많고, 어린 훈련병에게 군화를 지급 하라는 지시를 했다. 그에게 미군 군화가 지급됐다. 전선으로 출발하는 새벽 아침 각 사단에서 보충병을 인수하기 위해 트럭이 연병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7사단 표시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데 불현듯 두 명의 기간병이 ‘저쪽으로 가라’고 손짓해서 후미진 울타리 쪽으로 갔다. 다가선 기간병은 “야! 군화 벗어!” 그리고 중고 훈련화를 던져주었다. 그는 그렇게 좋아했던 군화를 벗어주고 그들이 준 중고 훈련화를 갈아 신고는 끈도 매지 못한 채 뛰어 갔다. 명부를 확인한 인솔 하사관이 늦게 온 그를 승차시킨 후 트럭은 훈련소를 빠져나갔다. 트럭은 전선으로 달리고 있었다. 「입영지원서」를 작성 제출한 일도 없고 후방으로 보내진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었다. 떨어진 훈련화 끈을 매면서 공포를 느꼈고 어린 중학생은 눈물이 나왔다. 그는 보병 7사단 3연대 2대대 6중대 소총병으로 일선에서 싸워야 했다. 소금국 주먹밥을 먹고도 2년 6개월 동안 키는 6cm나 자랐다. 1953년 7월 27일 양구 전선에서 휴전을 맞았다. 이렇게 해서 15세 중학생은 군인으로 징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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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휴전 60주년 숨겨진 秘史 발굴 특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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