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공천과정에서 친박계 의원들이 대거 탈락하자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친이계를 향해 “나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기간 내걸었던 공약을 잇따라 바꾸려는 조짐이 보이자 세간에서는 이 말을 인용 “나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여기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계속되면 지난 2008년 5월 광우병 촛불사태 때와 같은 위기가 올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른바 9월 위기설이다. 현재 박근혜 정부가 언론보도를 통제한다는 의혹이 나올 정도로 공약파기와 관련된 문제가 외부로 흘러나오고 있지 않지만 본국의 여론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다. 일단 전국민적으로 가장 민감한 납세문제가 도화선이 되고 있다. 본국의 월급쟁이들에게 이 문제는 ‘화약고’와 같다. 그가 선거 과정에서 ‘증세 없는 복지’를 외치며 중산층의 표를 끌어모았는데 막상 정권을 잡고 나니 증세 얘기가 흘러나오는 것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하지만 ‘증세없는 복지’라는 선거공약을 지키기 위해선 경기활성화에 따른 세수 증가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세수는 오히려 급감세를 보이고 있다는데에 박 대통령의 고민이 있다. 이런 가운데 국정원 댓글 사건을 비롯한 여러 문제들이 지뢰밭처럼 도사리고 있어 9월 개학과 더불어 조만간 제2의 촛불사태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리차드 윤 취재부 기자> 지난 주말 서울시청 광장에는 국정원 댓글사건을 성토하는 국민 10만여명이 모였다.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 일부 진보 언론을 제외하고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아서 크게 화제를 모으지 못했지만, 이날 집회 참석자는 <선데이저널>과의 통화에서 “마치 2008년 4월 광우병 촛불 사태때와 마찬가지로 민심이 거셌다”고 했다. 이 참석자의 말처럼 박근혜 정부를 향한 국민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다. 국정원 댓글 사건과 같은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박 대통령이 계속해서 공약을 파기한다는 논란이 여론을 악화시키고 있다.
말 바꾸기 계속 저항감 확산
본문에서 언급한 증세 논쟁은 하나의 공약파기 논란에 불을 붙인 사건이 됐지만 사실 박 대통령의 공약파기 논란은 취임 전부터 이미 시작됐다. 대표적인 것이 기초연금을 둘러싼 공약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기간 중 “65세 이상 모든 어르신과 중증 장애인에게 현재의 2배(약20만원)을 지급한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하지만 당선 직후부터 재원과 형평성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결국 기초연금 정책을 결정한국민행복연금위원회는 기초연금 지급 대상자를 전체 노인에서 하위소득 노인 70~80%로 줄이는 것으로 결정했다. 20만원을 모두 줄 지 10만원~20만원을 차등 지급할 지는 결정하지 못했지만, 대상자는 노인의 70~80% 수준으로 하기로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선 공약은 지키지 못하게 됐다. 이에 대해 김상균 국민행복연금위원장은 “경제적 상황의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공약은 커녕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만 높일 최악의 방안”이라는 비판만 받았다. 4대 중증질환 100% 국가보장도 논란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4대 중증질환 보장성 강화 방안을 발표했지만 선택진료비와 상급병실료, 간병비 등은 빠져 있고 4대 중증질환 이외 질환자와의 형평성 문제도 계속되고 있다.
잇단 공약파기에도 오리발
미국과 관련한 문제로는 전시작전권 문제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공약집에서 전시작전통제권을 차질 없이 추진해 한국군 주도의 새로운 한미연합방위체제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겠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해 11월 5일에는 외교안보통일정책을 발표하면서 “북한의 도발을 억지하기 위해 한미 동맹을 포함한 포괄적 방위역량을 강화해 나가고, 2015년 전시작전권 전환을 차질 없이 준비하겠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3월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척 헤이글 미국 국방부 장관에게 2015년 12월로 예정된 전작권 환수시기를 다시 한 번 연기하자고 제안한 사실이 헤이글 장관의 입을 통해서 확인됐다. 국방부와 청와대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핵실험 등 북한에 의한 안보위협이 증가했다는 점을 전작권 재연기 요청의 이유로 들었지만 북한의 위협이야 남북관계에서 ‘상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선 공약을 사실상 뒤집은 셈이어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재정여건을 감안하지 않고 무리하게 약속했던 각종 지역 공약도 상당히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지방선거를 앞둔 여권으로서는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정부가 지난 5일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확정한 ‘지역공약 이행계획’을 보면 박근혜정부의 지역공약은 모두 106개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세부 사업공약은 167개다. 이 가운데 69개가 신규 사업인데 총사업비가 84조원이나 필요하지만 갈수록 나빠지고 있는 경제여건 등을 감안하면 공약사항이라고 해서 무조건 돈을 쏟아 부을 수는 일이다. 정부는 고육지책으로 사업 계획을 변경하거나 축소하는 등의 방법으로 국민들에게 약속한 공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입장이지만, 사업계획을 확정하고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치면서 다음 정권으로 넘겨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해당 지역 입장에서는 대선 때 약속한 지역 공약을 경제성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며 사업의 축소, 보류, 취소 움직임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진통이 불가피하게 됐다.
세법개정안 논란 본격화
이런 상황에서 세법개정안 논란은 공약파기 논란을 본격화했다. 이번 세법개정안이 중산층의 소득을 실질적으로 줄이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대선공약 후퇴 논란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4대 중증질환 진료비 등은 예전에 없던 복지 혜택을 신설하는 문제여서 시기를 늦추거나 대상을 축소해도 국민이 체감하는 불편은 작을 수 있다. 전작권 문제는 이념적 이슈의 성격이 강하다. 반면 세법개정안은 국민생활과 직결되고 당사자가 수백만명이라는 점에서 인화력과 폭발력은 강할 수밖에 없다. 분노의 핵심은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을 어겼고, 사실상 증세(增稅)인데도 증세가 아니라고 우기며 진솔한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인터넷 게시판 등에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국민에게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 증세 없이 세제 개편을 통해 누락된 세금을 철저히 걷는 것으로 복지 재원 마련이 가능하다”고 약속한 것을 들며 “속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국정원 대선개입이 도화선
박근혜 대통령은 원칙, 신뢰, 약속을 지킨다는 이미지를 장점으로 평가받아왔다. 그녀는 세종시 문제,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등을 통해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거나 원칙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2012년 대선 때는 이러한 이미지는 국정운영에서의 안정감에 대한 기대로 연결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정작 대통령이 되고 나서 주요 공약들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꾸고 여기에 대해서 국민들에게 이해나 사과를 구하는 과정을 생략, 비판을 받고 있다. 박 대통령이 ‘약속과 신뢰의 정치’를 강조해왔다는 점에서 국민적 저항이 예상되고 있다. 이런 상황들이 계속되자 정치권과 언론계 등에서는 9월 위기설 등이 흘러나오고 있다. 현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론통제 등으로 인해 사안이 축소되고 있을 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국민적 저항은 억누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1000명이 넘는 언론인들이 시국선언을 하는 등 폭발 조짐은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지난 7일 언론인 1954명은 국정원 사태와 관련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파괴한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이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과 언론의 외면으로 묻히고 있다”며 시국선언에 나섰다.
朴정부, 언론 보도통제까지
이들은 “국정원의 선거 개입을 다룬 시사 프로그램과 뉴스가 방송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독재 정권에서나 있을 법한 국가기관의 보도통제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며 “선배 언론인들이 투쟁과 희생으로 쟁취한 언론의 자유마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언론뿐만 아니라 2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결집해 국가정보원의 선거 및 정치 개입을 규탄하는 대규모 촛불집회를 열면서 그 세가 점점 확산되는 분위기다. 시국 선언도 확산일로다. 국정원 선거개입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촉구하는 전국의 대학교수와 9개 대학 총학생회 소속 대학생,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신부 등의 시국선언도 이어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인 2008년 정국을 뒤흔들었던 촛불에 다시 불이 있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이 촛불이 얼마나 늘어날지 예상키 어렵지만 제 2의 촛불정국이 올 가능성에 점점 무게가 실린다. 정가에 나돌고 있는 9월 위기설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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