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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춘훈 <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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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일자 신문에 실린 내 칼럼의 제목은 <전두환 폐족(廢族)이 정답이다>였습니다. 이민 온 지 오래된 올드 타이머나, 퀴퀴한 냄새 나는 옛날식 한자 단어에 익숙치 않은 4~50대 독자들에게, ‘폐족’이라는 사어화(死語化) 되다시피 한 두 글자의 단어는 꽤 낯설었던 모양입니다. 몇몇 독자가 전두환 폐족의 의미를 물어왔습니다. 폐족의 사전적 의미는 “왕조 때 조상이 형을 받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족속”입니다. 중죄 혐의로 사형을 당해 죽은 조상이 있는 집안은, 그 자식들이 대대로 벼슬을 할 수 없게 만든 제도지요. 2007년 대선에서 정동영 후보가 참패를 하자, 노무현 대통령의 오른팔 격인 안희정은 자신을 포함한 친노 진영 스스로를 폐족이라 부르며 고개를 떨궜습니다. “친노라 표현돼 온 우리는 폐족이다. 죄 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이다…”
전두환 문제, 폐족개념으로 다뤄야
조상이 지은 죗값을 자손이 대를 이어 치르게 만든 폐족제도는 일종의 연좌제(連座制) 개념으로, 현대적 법 정신엔 당연히 맞지 않습니다. 허지만 전두환 폐족이나, 노무현 폐족 같은 표현은 왕조적 폐족개념과는 다소 의미가 다릅니다. 전두환은 내란-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전직 대통령입니다. 왕조시대였다면 의문의 여지없이 사사(賜死)나 참형으로 다스려졌을 중죄인이지요. 이런 사람이 무려 9천억원이 넘는 검은 돈을 기업들로부터 갈취해 ‘자손만대의 부귀영화를 위해’ 꼼쳐놨다 들통이 나 법의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9000억원은 연 3%로 은행에 예치해도 1년에 270억원의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어쩌면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전두환의 자손들은 이 ‘대도(大盜) 조상’의 은덕(?)을 입고, 은행이자만으로도 1%의 국민이 누릴 수 있는 초호화 생활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겁니다. 전두환은 2.200여억원의 추징금 중 1.600여억원을 아직 내지 않고 버티고 있습니다.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죽는 시늉인데, 검찰 발표로는 국내외 여기저기서 수십. 수백. 수천억 짜리 수상한 돈과 채권, 미술품, 땅과 건물 등의 부동산이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나오고 있습니다. 노무현의 오른팔 안희정 처럼 전두환 진영에서도, 가령 장세동이나 허화평 같은 충복이 나서 스스로 폐족선언을 하고, 아들 딸과 처남 등에 은닉해 놓은 불법 자금을 회수해 미납 추징금을 납부했더라면, 그리고 국민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했더라면, 여론이 이토록 악화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요즘 유행어 말마따나 ‘셀프(self)’ 폐족이 안되니까 강제(mandatory)폐족이라도 시켜, 중죄인의 자손들이 큰 소리 치며 사는 끔찍한 세상이 되는 것 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여론이 끓고 있는 겁니다. <전두환 폐족이 정답(正答)이다>라는 내 칼럼 제목은 그런 뜻으로 붙였습니다.
조선왕조 형법은 英美法?
이달 초 미국 오하이오 주의 한 지방법원은 살인과 성 폭행, 납치 등 모두 329건의 엽기적 사건을 저지른 한 피고인에게 징역 1000년을 선고했습니다. 그 얼마 전 조지아 주의 한 법원도 아동 음란물 동영상 2만6천여건을 인터넷 사이트에서 내려 받아 갖고 있던 64세의 지역 방송사 사장에게 징역 1000년을 선고 했습니다. 음란물 단순소지 혐의라면, 한국에서는 징역 1~2년 정도에, 그나마도 약간의 벌금만 내면 집행유예로 간단히 풀려 날 사건입니다. 이런 재판에서 징역 1000년이라니 ‘개그 콘서트’ 하는 거냐고 비웃을 사람 많을 겁니다. 미국은 피고인이 여러 건의 죄를 지었을 때 죄목별 형량을 정한 뒤 이를 합산해 전체형량을 매기는 영미식(英美式) 법을 씁니다. 조지아의 방송사 사장은 음란물 2만 6천건 가운데 죄질이 나쁜 50건을 아동 성 학대에 쓴 혐의를 받았습니다. 1건당 법정 최고형이 20년, 피해자가 50명이니 합산형량 1000년이 나온 거지요. 영미식과는 달리 유럽식인 한국의 형법은 여러 죄 가운데 법정형량이 가장 무거운 형량의 최대 2분의 1까지 가중처벌을 하는 방식을 씁니다. 대체로 형량이 피고한테 유리하고, 법정 최고형량도 무기와 사형으로 단순화 돼 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 있었던 고위 공직자 독직사건 중 뇌물액수와 처벌 형량이 가장 높았던 사건은 ‘뇌물 검사’로 알려진 김광준 전 서울고검 검사 사건입니다. 지난 7월 9일 열린 재판에서 김 피고인은 징역 7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뇌물 중 유죄로 인정된 금액은 3억8천만원이었지요. 이 김광준 케이스를 원용해 전두환이 아직 납부하지 않고 있는 추징금 1600억원을 실형으로 대체해 감옥에 보내면 몇 년이나 살게 될까요? 미국식(영미식) 단순 형량 합산으로는 대충 2900년 징역감입니다. 유럽식 형법은 범죄를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보는 반면 영미식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로 봅니다. 극악 범죄의 경우 유럽식은 최고 종신형이나 사형으로 처벌이 끝나지만, 영미식은 죽음 이후에도 처벌이 양형만큼 계속되는 개념입니다. 왕조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폐족이라는 이름의 영미식 형법 개념으로 전두환 같은 못된 죄인을 엄하게 징치(懲治)했던 것 같습니다.
전두환이 박근혜 도우미로
엊그제 전두환의 처남 이창석이 구속됐습니다. 수천억원의 전두환 불법자금을 은닉 관리해 온 장본인으로 알려진 이창석의 구속으로, 5000만 국민과 전두환 일가가, 전의 숨겨놓은 검은 돈을 놓고 벌이는 신판 ‘쩐의 전쟁’이 본격 개막됐습니다. 이창석 다음은 그의 탈세 공범인 전두환 차남 전재용입니다. 그 다음은 장남 재국, 3남 재만, 딸 효선, 며느리 이상아 등이 검찰의 포토 라인에 서다가, 아마도 이중 몇몇은 더 험한 꼴을 당하게 될 겁니다. 현재까지 검찰이 압류한 전두환 일가의 꼼쳐놓은 재산은 오산 땅, 한남동 부지, 이태원 고급 빌라 3채, 이순자의 30억원 짜리 연금보험, 연희동 자택 가재도구, 7~8억원으로 추정되는 겸재의 산수화 등 50억원 대의 미술품입니다. 모두 합쳐도 미납 추징금 1600여억원엔 턱없이 부족하고, 이들 압류재산에 전두환의 비자금이 유입됐다는 것을 입증하는 문제도 난제입니다. 육사시절 성적이 꼴찌였다는 전두환의 ‘잔머리’를 수능성적 1% 이내의 수재라는 대한민국의 쟁쟁한 검사들이 당해내지 못하고 진땀을 빼고 있는 것은 한편의 코미디입니다. 전두환은 보스 기질이 탁월한 인물이라는데, 그 보다는 천부적인 ‘장물아비 기질’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 같습니다. 검찰의 전두환 목 조르기는 세법개정- 국정원 사태 등 잇단 악재로 고전 중인 박근혜 정부엔 망외(望外)의 꽃놀이 패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들들이 잇달아 구속되고 은닉재산이 속속 드러나면 대통령의 지지도가 10% 쯤은 오를 겁니다. 찌든 삶의 무게에 깔려 신음하고 있는 서민들에게 전두환 주변에서 요즘 나오는 억,억 소리는 억장 무너지는 소리 그 자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