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년여 앞으로 다가 온 한국의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나설 유력 예비후보-이른바 ‘잠룡’들의 용틀임이 시작됐다. 야권에서는 안철수 문재인의 퇴조 속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무상보육 등 전 국가적 차원의 복지 확대를 이슈화 하며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안후보’로 급부상하고 있다. 여당인 새누리당 후보로는 김문수 경기지사와 김무성 의원이 한발 앞서 달리고 있는 가운데 충청권의 이완구 의원이 다크 호스로 떠 오르고, 정몽준 의원의 세 번째 도전을 향한 잰걸음도 더욱 빨라지고 있다. 여야 어느 쪽도 뚜렷한 대표주자가 없는 탓인지 최근 들어서는 ‘반기문 대망론(待望論)’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2016년 임기가 끝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현재로서는 가장 무난하고 경쟁력 있는 차기 대선후보감 이라는 게 여야를 아우르는 ‘대망론’의 핵심이다. 최근 휴가차 한국을 다녀 간 반 총장은 대선출마 용의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과거와는 달리 ‘시인도 부인도 않는’ 모호한 태도로 일관해 ‘반기문 대망론’의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 <임춘훈>
이석기 의원의 내란 음모,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사건 등 정치권이 대형사건으로 요동을 치고 있는 가운데, 2017년 19대 대통령 선거를 향한 ‘잠룡’들의 물밑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특히 8월 말 휴가차 귀국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유력 차기 대권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여야 후보들이 긴장 속에 ‘정중동’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9월 16일 발표된 문화일보의 대선후보 조사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처음으로 호감도 1위에 올랐다. 호감도가 24.9%로, 2위 안철수 의원의 19.9%보다 5%나 높았다. 다음으로 문재인(8.7%) 박원순(7.0%) 김문수(4.3%) 정몽준(4.1%) 김무성(3.2%) 손학규(2.8%) 안희정(0.5%) 김황식(0.4%) 등의 순이었다. 현재 자천타천으로 거론되는 차기 대선후보는 이들 외에 새누리당의 이완구 의원과 홍준표 경남지사, 민주당의 정동영 전 의원과 김두관 전 경남지사, 그리고 오세훈 전 서울시장, 나경원 전 의원, 김태호 전 경남지사 등이 있지만 존재감은 아직은 미미하다. 현직인 박근혜 대통령은 차기 후보의 빠른 등장을 원치 않고 있어, 여권후보들은 언제 어떤 형식으로 출사표를 꺼내 들지 속을 끓이고 있다. 특히 자기 세(勢)가 확실한 김무성 이완구 김문수 등은 레임덕을 우려해 후보의 조기등판에 부정적인 청와대의 눈치까지 살펴야할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박근혜의 이례적 반기문 환대
이런 정황 속에 유력언론의 여론조사에서 반기문이라는 기존 정치권 밖의 인물이 후보 호감도 1위로 올라서는 대이변이 일어나 기존 후보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반기문은 비 정치인인데다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없어, 조기 레임덕을 우려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부담을 가장 덜 갖는 후보다. 박 대통령은 반 총장에게 나름의 빚이 있다. 작년 18대 대선 때 새누리당의 친이명박계는 반 총장에게 박근혜 대항마로 나서 줄 것을 요청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자신의 뜻을 박근혜 측에 분명히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후보로서는 대선가도에 돌출한 반기문이라는 거대 장애물 하나를 제거함으로써 손 쉽게 후보 자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8월 22일 귀국한 반 총장을 유난히 환대했다. 23일 청와대를 예방한 반 총장을 영빈관 밖 까지 배웅하는 예를 갖췄고, 현 정부의 ‘숨은 실세’로 알려진 최외출 영남대 부총장과 반 총장의 만남도 주선했다.

반 총장은 박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한국정부의 비무장지대(DMZ) 세계평화공원 조성계획과 관련, “유엔 차원에서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강창희 국회의장 및 정홍원 총리와의 면담, 윤병세 외교부 장관 만찬 등의 일정을 소화했고, 자신의 저서 ‘반기문과의 대화’의 한국어판도 방한기간에 맞춰 출간했다. 26일 반 총장은 외교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개성공단 운영 정상화 합의’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실무협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방북계획’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 등에 대해 “박 대통령이 박수를 칠” 숱한 발언을 쏟아냈다. 휴가 중인 유엔 사무총장으로서는 범상치 않은 파격행보다. 반기문 총장은 26일 기자회견에서 “대선출마 제안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변인이 답변 하세요”라고 답했다. 이전 까지는 분명하게 “출마하지 않는다”라고 선을 그었었다.
반기문의 수상한 귀국 행보
‘반기문 카드’는 지리멸렬해 있는 야권, 특히 제1 야당인 민주당으로서도 2017년 대선 필승전략으로 탐내 볼만한 카드다. 반기문의 유엔 사무총장 도전은 노무현 정권의 작품으로, 야권의 취약점인 이념시비를 자연스레 피해갈 수 있다. 박지원 의원은 26일 한 방송에 출연해 “반기문은 경쟁력 있는 카드다. 그가 원한다면 영입해 볼만 하다”라며 그의 영입문제를 다시 끄집어 냈다. 박 의원은 3년 전 당 원내대표 시절 ‘반 총장 영입안’을 처음 제기했던 장본인이다. 그가 이번에 다시 이 얘기를 꺼낸 것은 개인의견이라기 보다 필승카드가 아직 없는 민주당 내에 이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반 총장의 임기는 오는 2016년 12월 31일 끝난다. 19대 대선 1년 전으로, 본국 대통령 선거라는 ‘잿밥’에 눈이 멀어 유엔 사무총장 일을 게을리 했다는 비판 여지를 최소화 하면서, 무리 없이 대선 판에 뛰어들 수 있는 절묘한 타이밍이다. 반 총장이 유엔 일을 무사히 마치고 모국의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물론 없다. 평상을 직업외교관으로 살아온 그의 개인적 성품과 자질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는 대중정치인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갈등조정이라는 측면에서 국제적으로 높은 점수를 얻지 못하고 있고,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에게 독자적인 지지세가 없는 것도 정치인으로서의 변신엔 걸림돌이다.
반기문, 여야 어느쪽으로 갈까
이번에 나온 여론조사에서 반 총장에 대한 호감도는 새누리당 지지층이 민주당 지지층 보다 3배 이상 높았다. 민주당 후보 보다 상대적으로 새누리당 후보 중에 아직 뚜렷한 간판 주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인 듯하다. 무소속 안철수 의원은 반기문 총장에 이어 호감도 19.9%로 여전히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가 차기 대선에 나와 실제로 대권을 거머쥘 수 있다고 믿는 국민은 많지 않다. 그는 오는 10월 재보선을 이미 포기했다. 내년 봄 지자체 선거 전망도 암울하다. 최창집 교수 등 안철수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측근인재들은 거의 그의 곁을 떠났다. ‘안철수 신당‘은 이미 물 건너갔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민주당의 문재인 의원도 지난 번 NLL발언과 이석기 사태를 거치며 지지율이 내리막 길을 걷고 있다. 이런 여러 정치상황이, 마치 지난 2년 동안 한국의 정치판을 강타한 ‘안철수 현상’처럼 ‘반기문 현상’을 불러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반기문이 온 몸을 던져야 하는 진흙탕 싸움인 한국의 정치판에 과연 실제로 뛰어들게 될지, 뛰어 든다면 그에게 꽃가마를 보낼 쪽은 여야 어느 쪽이 될지, 주목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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