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위대한 정치 지도자 넬슨 만델라의 타계 소식에 세계가 추모의 물결에 휩싸였다. 28년 간의 감옥살이를 포함한 불굴의 투쟁 끝에 20세기 인류 최악의 야만 중 하나였던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고 남아공 첫 흑인 대통령에 올라 인종갈등으로 분열된 나라에 민주주의와 화해의 초석을 놓은 영웅의 죽음은 지구촌에 깊은 상실감을 안겼다. 국부(國父)를 잃은 남아공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제이콥 주마 대통령은 “우리 나라는 가장 위대한 아들을 잃었다”며 만델라의 부고를 알리자 그가 운명한 요하네스버그 자택 앞에는 어둔 밤을 뚫고 달려온 수백명의 시민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는 전통적 방식으로 애도를 표했다. 만델라가 한때 거주했던 민주화 성지 소웨토, 요하네스버그의 넬슨만델라광장 등에도 추모객이 모여들었다. 만델라 영결식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심 온 <취재팀>
국제사회의 지도자들도 앞다퉈 애도의 뜻을 밝혔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만델라를 “정의로운 거인”으로 칭하며 “인류의 존엄, 평등, 자유를 위한 그의 투쟁은 전세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강조했다. 교황 프란시스코는 남아공 정부에 보낸 애도 서신에서 “만델라를 본보기 삼아 국가들이 정의와 공익을 위해 노력하기를 희망한다”고 적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이 시대의 위대한 빛이 졌다”고 추모했고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투쟁으로 남아공과 세계 역사를 만든 우상”이라고 했다. 주마 대통령은 만델라의 장례식이 15일 고인의 고향이자 말년의 거처였던 쿠누에서 국장으로 치러진다고 밝혔다. 1994년 남아공 흑인정부 출범 이후 첫 국장으로, 간소한 장례를 원했던 고인의 생전 바람과는 거리가 있다. 주마는 장례일까지 열흘 동안을 국가 애도기간으로 정하면서 10일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경기장에서 추도식이 거행되며 11~13일에는 만델라의 시신이 수도 프리토리아의 정부 청사에 안치돼 일반에 공개되었다. 백악관이 오바마의 장례식 참석 계획을 밝히는 등 세계적 명사 1백여명이 만델라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9만명의 일반 국민 참여는 선착순으로 참석했다.
세계 정상 1백여명 참석 장엄한 추도식 거행
‘아프리카의 땅이 낳은 아들’로 소개되며 우레 같은 갈채 속에 연단에 오른 오바마 대통령은 만델라를 “역사의 거인” “20세기의 위대한 해방자”로 칭송하고 “당신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그의 유산”이라고 존경심을 표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역시 “만델라는 증오를 미워하고 용서의 힘을 보여줬다”고 추모했다. 이날 영결식은 쏟아지는 빗속에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시작됐다. 거인 만델라의 미완으로 남긴 꿈, ‘자유롭고 평등한 아프리카와 지구촌’에 대한 열망과 추모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장례를 치를 때 비가 온다면 신이 그를 천국으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남아공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시릴 라마포사 부의장이 이날 정오께 역사적인 영결식의 막을 열었다. 먼저 특정 종교나 종파에 얽매이지 않은 추모 기도가 진행됐다. 유대교,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형식의 기도가 차례로 이어졌다. 만델라 자신은 감리교 신자로 세례를 받았지만 인종·성별·종교 등 어떤 이유로든 차별이 없는 ‘무지개 나라’를 꿈꾼 거인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자는 뜻에 따른 것이다. 영결식은 세계 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행사가 됐다. 남아공 정부는 91명의 국가·정부 수반, 10명의 전직 수반, 86명의 사절단 대표, 75명의 명사가 참석했다고 발표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 등 유럽·북미 국가의 정상뿐 아니라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국제무대에서 좀처럼 환영받기 힘든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처럼 분쟁과 혼란이 그치지 않는 나라의 정상들도 추모의 발걸음을 했을 정도다. 만델라 추모 열기는 윈스턴 처칠,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 존 에프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때의 열기와 같은 분위기였다.
반목 세계 정상들 화해의 자리로 삼아
10일 오후(현지시각)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에프엔비(FNB) 주경기장.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는 영결식 단상에 들어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반갑게 악수를 했다. 카스트로 의장도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20세기 중반 핵전쟁 직전까지 치달았고 지금도 적성국인 두 나라 정상이 거인의 죽음 앞에 역사적인 악수를 했다. 양국 정상이 공식석상에서 악수한 것은 1959~1961년 쿠바혁명 이후 처음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불법 사찰로 대립중인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과는 가벼운 포옹과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러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악수를 한 것을 두고 분분한 해석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오랜 적성국 관계인 두 나라 정상이 공개석상에서는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손을 맞잡은 것을 두고 미국 보수 강경파들이 발끈하고 나선 것이다. 반면 쿠바 관영 매체는 이를 “역사적 이미지”로 보도한 외신을 전하며 악수 사진과 동영상에 대한 소셜미디어의 열광적 관심을 주요하게 보도했다.
미 공화당 대선 후보 출신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독재정권을 유지할 선전거리만 제공했다”며 “미국인을 계속 교도소에 가두는 사람과 도대체 왜 악수했느냐”고 비난했다. 하지만 미 백악관 관계자는 10일 <에이비시>(ABC) 방송에 “(악수는)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영결식에서 집중한 것은 만델라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뿐이었다”고 해명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최근 이란과 핵 협상을 타결한 것과 연결지어 미국-쿠바의 화해 무드를 점치는 시각에 제동을 걸려는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8일 마이애미에서 열린 민주당 모금 행사에서 “미국의 대 쿠바정책을 바꿔야 할 때”라고 말한 바 있다. 쿠바 관영 온라인매체인 쿠바데바테(cubadebate.cu)는 “두 사람의 악수가 소셜 네트워크에서 열광적 반응을 불러왔다”며 관련 사진과 동영상을 자세히 보도했다. 악수 장면의 사진설명으론 “오바마와 라울이 만델라 영결식에서 만났다.
일반 국민 9만여 명 축제처럼 선착순 참여
남아공 헌법에 포함된 인권 조항은 자세하고 많다. 그리고 전통적인 정치, 시민적 권리뿐 아니라 경제, 사회적 권리도 포함했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널리 알려진 말로 바꾸면 ‘사회권’을 헌법에 명시한 몇 안 되는 나라가 바로 남아공이다. 헌법에 규정된 건강의 권리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모든 사람이 보건의료 서비스(생식 보건과 응급 의료 포함)를 받을 수 있는 권리이고, 둘째는 어린이들이 기초 보건 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이다. 여기에 더해서, 형무소 수감자를 비롯한 수용인이 국가 부담으로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런 조항들은 헌법에 규정되었다는 것을 빼면 평범해 보일지 모른다(물론 한국의 헌법과 비교하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비범하다). 그러나 사회권에서 뜨거운 논쟁거리인, 국가의 책임을 규정한 부분이 더 중요하다. 바로 헌법 27(1)(B)절이다. 국가는 권리의 점진적 실현을 위해, 가능한 자원 범위 안에서, 합당한 법률적 수단과 다른 수단을 마련하여야 한다. 이는 단순히 선언적 조항이 아니다. 국가는 책임을 무한정 미룰 수 없으며, 오히려 가능한 한 신속하게 권리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인권 논의에서는 보통 ‘림버그 원칙’이라 부른다). 남아공의 정부 기구들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정책과 사업에 이런 헌법상의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고려해야 했다. ‘가능한 자원’과 ‘합당한 수단’을 둘러싸고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이 벌어진 것도 이러한 헌법적 기초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델라의 리더십은 그야말로 바다와 같은 포용력에서 나온 것이다. 만델라는 그와 갈등을 일으켰던 정적들에게 늘 먼저 손을 내밀었지만, 박 대통령에게는 이런 용기가 없어 보인다. 만델라는 그가 평생 싸워 왔던 백인 정권의 수장과 공동 정부를 수립하였지만, 한국에는 이런 아량이 없어 보인다. 만델라는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때 늘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았지만, 이런 여유도, 유머도 없는 것 같다. 적과 동지뿐이며 반대자에 대한 단호한 조치는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대립과 갈등을 오히려 키울 뿐이다. 과연 이 땅에는 만델라와 같은 지도자가 언제나 나타날 것인가
리더십은 관용과 평등으로
남아공의 국가 건설은 아직도 진행되는 과정 가운데에 있다. 그 과정이 힘에 겨운 것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건강권 실현의 꿈 역시 갈 길이 멀다. 2009년을 기준으로 할 때, 1인당 국민 소득은 1만 달러 수준이지만, 평균 수명은 채 60세를 채우지 못한다. 건강과 의료의 불평등도 극심하다. 복잡한 국제 관계와 사회경제적 역동 속에서 인권의 지향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만델라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다. 그러나 역사적 평가가 무슨 흑자-적자의 장부 맞추기가 아니라면, 인권 그리고 건강권이라는 보편의 유산에 좀 더 주목해야 한다. 에이즈를 드러내는 데에 소극적이던 만델라는 대통령을 퇴임한 이후에 달라진다. 공개적으로 문제를 드러내고 의제로 만드는 데에 앞장섰다. 2005년 아들이 에이즈 때문에 사망했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한 것이 대표적 사건이다. 때로 자신의 정치, 사회적 명성을 활용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HIV 양성”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대중 앞에서 나서기도 했다.
만델라는 1918년 이스턴케이프주 트란스케이 지역의 작은 마을 쿠누에서 태어났다. 트란스케이는 남아공의 주요 부족 중 하나인 코사족의 자치지역 중 하나로, 백인 분리주의 정권 시절에 백인들이 만든 코사족 ‘괴뢰정권’이 세워졌던 곳이기도 하다. 만델라는 이곳에서 코사족의 한 갈래인 템부족 부족 지도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만델라는 헤알트타운의 기독교 감리교계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포트헤어 대학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평생의 동지인 올리버 탐보를 만난다. 대학 생활 첫 해가 끝나갈 무렵 만델라는 학교 측의 인종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회 싸움을 이끌다가 퇴학당했다. 이후 부족의 부름을 받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쳐나왔고, 광산 감독관으로 잠시 일하다 변호사 사무실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를 고용한 변호사 월터 시술루는 만델라의 정치적 후원자이자 평생의 동지가 됐다. 시술루의 영향으로 만델라는 남아공대학과 비트바테어스란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됐다. “나의 인생은 투쟁이었다”는 말은 그가 살아온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28년간의 감옥생활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는 흑인들과 백인들 모두를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로 이끌어가기 위해 싸웠다. 그를 본격 정치투쟁에 끌어들인 것은 1948년의 총선이었다. 이 선거에서 아프리카너(네덜란드계 백인)들이 주도하는 국민당이 승리하면서 극악한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가 시작됐다. 만델라는 1952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불복종 운동을 주도했고, 1955년에는 인종차별 철폐투쟁의 이념적 기반인 ‘자유헌장’을 발표하며 인종차별 이데올로기에 맞섰다. 동시에 만델라는 탐보와 함께 ‘만델라&탐보 법률회사’를 만들어 저소득층 흑인들을 위한 법률구조활동을 펼쳐 신망을 쌓았다. 이 시기 만델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비폭력 투쟁을 실현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였다. 당시 남아공에는 큰 규모의 인도계 공동체가 있었다. 만델라는 2007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사티야그라하(비폭력불복종운동) 100주년 기념축제에 노구를 이끌고 직접 참석해 간디를 기리기도 했다. 민족회의는 백인정권의 극심한 탄압 때문에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1950년대 말이 되자 민족회의는 정치적 기로에 놓였다. 앨버트 리툴리와 올리버 탐보, 월터 시술루 등 당시 지도부가 주도한 온건 노선에 젊은 당원들이 반발한 것이다. 컬러드(아시아계 유색인종)와 인도계, 공산당을 비롯한 백인 좌파 정당들과의 연대에도 균열이 왔다. 이 때 당의 일신을 위해 새 지도자가 된 인물이 만델라였다. 만델라는 1961년 무장분과인 ‘움콘토 웨 시즈웨(MK·국가의 창)’를 창설하고 사보타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의 노선은 대체로 비폭력 정치투쟁에 맞춰져 있었다.
감옥에서의 28년 1962년 만델라는 체포돼 불법파업을 일으킨 죄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요하네스버그 북쪽 리보니아에서 민족회의 지도부가 대거 붙잡혔다. ‘리보니아 재판’으로 알려진 기나긴 법정투쟁의 시작이었다. 이 재판에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는 만델라의 인생에서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격동의 시기였다. 이 때 만델라는 두번째 부인이 된 위니 마디키젤라를 만났다. 지금도 민족회의 산하 여성 조직을 이끌고 있는 위니는 만델라의 아내이자 투사 동료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동지적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만델라가 수감된 뒤 위니는 남편 대신 정치투쟁에 나서 민족회의 최고위 여성정치인이 됐지만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남성 편력과 살인·폭력교사 등의 혐의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만델라는 옥중에서 위니에 대한 소문을 접하면서도 언제나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교도관들은 내 귀에 ‘위니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말을 속삭이고 가곤 했다. 어떤 날은 위니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실린 신문기사를 던져놓고 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위니가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던가를 생각하면서 이해하려 애썼다. 그녀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 나이였다. 내가 수감돼 있는 동안 민족회의에서 나의 영향력을 유지시켜준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위니였다.”(자서전 <자유를 향한 긴 여정>에서) 케이프타운 앞바다 로벤섬에서의 17년을 비롯해 만델라는 28년을 창살 안에서 보냈다. 옥중에서 그는 공부를 하고, 동지들과 미래를 향한 토론을 하고, 젊은 흑인들을 가르치고, 무지한 백인들을 교화시켰다. 만델라는 자서전에서 “수감생활을 견뎌내기 위해 동지들과 온갖 주제를 놓고 토론했다”며 “아프리카에도 호랑이가 있느냐는 문제를 놓고 토론한 적도 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뒷날 그는 옥중에서 취미로 삼았던 화초 재배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