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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춘훈(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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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포털의 블로그에 올라 온 짧은 글 한편에 우연히 시선이 꽂혔습니다. “지난 한 주도 힘드셨지요? 왜 우리의 삶은 이다지도 모질고 고달플까요. 좋은 음악 하나 올려 드릴테니 감상하시고 큰 위로와 평안 얻으세요….” 모찰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라도 올라왔나 싶었는데, 하이고! 송대관의 뽕짝 <네박자>였습니다. “니가 기쁠 때 내가 슬플 때 누구나 부르는 노래, 내려 보는 사람도 위를 보는 사람도 어차피 쿵짝이라네”로 시작되는 바로 그 노래지요. 이 거친 사회, 모두가 불행해 지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 으스스한 시대에, 송대관은 “웃고 웃는 인생사, 연극 같은 세상사 모두가 네박자 쿵짝”이라며, 허허(虛虛)히 4분의 4박자 ‘정통 뽕짝’을 뽑아대고 있습니다. 유난히 신산(辛酸)했던 올 한 해를 어떤 사람은 송대관 노래를 패러디해 경박, 부박(浮薄), 야박, 천박의 ‘네박자 세상’이라 풍자했습니다. 여기에 ‘쪽박’을 넣어 다섯 박자, ‘피박’을 추가해 여섯 박자 노래를 불렀다는 사람의 얘기도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한국일보 이준희 편집인은 <화가 가득 찬 사회>라는 최근 칼럼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행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굳어있다. 건드리면 금세 눈썹을 치켜 올릴 듯 한 표정이다…택시를 타도 유쾌하거나 긍정적인 얘기를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시국이나 일상에 대한 개탄에서 시작해 급기야 분노로 치닫기 십상이다…인터넷 댓글이나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들 조차 그 섬뜩한 적개심이나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증오를 보면, 공동체가 유지되는 게 희한할 지경이다. 우리사회가 화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모두가 타인에게, 자신을 제외한 모든 대상에게, 잔뜩 화가 나 있거나 금세 화 낼 ‘준비’가 돼 있는 사회, 2013년 계사년 12월, 한국 세모(歲暮)의 거리 풍경입니다.
불행을 세일하는 사회
울고 싶은데 귀싸대기 올려 준 꼴입니다. 잔뜩 화를 낼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한테, 27세의 한 대학생이, 마음껏 열 불 내며 타인을 증오하고 세상을 조롱할 ‘멍석’을 깔아줬습니다. 지난 10일부터 한국의 대학가 등 오프라인과 SNS 등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른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쓰기 캠페인입니다. 고려대 4년생 주현우는 이날 손 글씨로 쓴 2장짜리 대자보를 교내 게시판에 붙였습니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친근한 문안인사로 시작되는 대자보는 철도노조 파업, 국정원 부정선거, 밀양송전탑, 의료보험과 비정규직에 대한 비판에 이어 ‘88만원 세대의 비애’에 대한 소회로 끝을 맺었습니다. 주현우의 대자보를 찍은 사진이 SNS에 오르면서 페이스북에 개설된 ‘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지는 단숨에 30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좋아요’를 눌렀습니다. 오프라인에선 ‘안녕하지 못하다’는 제목을 단 ‘화답 대자보’가 전국의 대학에 게시됐고, 심지어 전라도 일부지역의 고등학교와 일부 해외 교포사회에도 나붙었습니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치기어린 한 젊은이의 ‘지적(知的)오만’ 정도로 치부된 이 대자보 릴레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절대로 안녕하지 못한’ 젊은이들의 폭발적 호응 속에, ‘화로 가득 찬 사회’의 일그러진 초상화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송대관의 네박자를 들으며 위로와 평안을 얻던 많은 민초들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소동 속에, 다시 화 난 표정으로 돌아섰습니다.
이 시대에 안녕하면 역적? 지금 한국의 온 오프 라인은, 행복한 얼굴을 하거나 나는 안녕하다는 말을 하면 맞아죽기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철도파업, 밀양송전탑, 심지어는 삼성서비스 직원의 자살 때문에 안녕하지 못하다는 따위의 대자보가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은 과연 코레일이 누적부채 170억 달러에, 웬만한 경력의 철도노조원이면 연봉이 10만 달러나 되는 ‘개판 공기업’이라는 사실을 알기나 하고, 파업노동자들이 불쌍해서 안녕치 못하다는 대자보를 붙이는 지 모르겠습니다. 대자보 릴레이를 처음 시작한 주현우가 평범한 대학생이 아닌 급진 노동당 당원임이 밝혀지면서 보수성향의 젊은이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북한의 살인 독재자 김정은의 만행을 보고 한 마디도 못하는 당신들, 국정원의 박근혜 지지 댓글은 안 돼도 공무원 노조나 전교조의 문재인 지지 댓글은 옳다는 당신들, 북한과 김정은을 비판하면 국정원 알바라고 몰아세우는 당신들, 내가 하면 로맨스, 니가 하면 불륜이라는 당신들 때문에 정말 우리는 안녕치 못합니다”라는 ‘맞불 대자보’도 붙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갈기갈기 찢어진 나라에서, 이제는 미래의 희망인 젊은이들 까지 두 패로 갈라져, 이념적 드잡이 질을 해대고 있는 형국입니다.
야당과 대타협 승부수를
지금 안녕한지를 꼭 묻고 싶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이 어수선한 세모에, 박근혜 대통령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박 대통령의 집권 1기인 올 한 해가 경박 부박 야박 천박의 ‘4박자 세상’이라고 누구는 읊었습니다. 쪽박과 피박을 보태 ‘6박자 세상’이라 투덜댄 이도 있지요. 4박이건 6박이건 이 ‘박 소동’의 다른 한 편엔 또 다른 박, 즉 대통령 ‘박’근혜가 있습니다. 입 가진 사람은 거의 안녕치 못하다고 아우성인 나라, 화로 가득 찬 사회, 누구나 금세 화를 낼 준비를 하고 있는 나라를 만든 책임은 누구보다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부정선거와 독재를 말합니다. 검찰이 현직대통령의 부정선거 혐의를 밝혀내려 혈안인 나라, 야당이 동의 안하면 작은 법안 하나 통과시키지 못하는 국회, 공무원 경찰 군인까지 나서 대통령을 씹어대도 처벌은커녕 ‘영웅’ 대접을 해주는 나라….그런 나라가 독재국가일 수는 없습니다. 헌데 야권 등 반대세력은 그를 독재자, 심지어 유신독재자라고 까지 부릅니다. 언제부터인가 박근혜에게선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취임초기 많은 이들이 아버지 박정희 보다 어머니 육영수를 닮은 모습, 그런 리더십을 보여 달라고 주문했지만, 그는 갈수록 ‘아버지 코스프레’에 열중입니다. 독선 불통 아집 경직 완고 그리고 ‘탈정치’가, 박근혜 표 정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습니다. 청와대 참모와 여당수뇌부, 내각의 장관들도 고집불통의 대통령 따라하기에 바쁩니다. 코레일의 여사장 최연혜는 대처 영국수상처럼 자기가 무슨 ‘철의 여인’이라도 된 듯 설쳐대고 있습니다. 파업노조원들을 수천명씩 무더기로 직위해제 하면서, “원칙에서 벗어나는 협상은 없다”고 노사협상의 문을 걸어 잠궜습니다. 직위해제는 해고와는 다른데도, “근로자들을 엄동설한의 차가운 거리로 내 몰았다”는 식의 댓글과 대자보가 나붙으면서, 박근혜 정부를 비정한 유신독재 정권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한 2명의 야당의원에 대한 제명결의를 낸 여당의 과잉충성, 대통령 하야요구에 대한 반박성명을 발표하면서 ‘설음에 겨워‘ 울먹인 청와대 홍보수석의 오버, 여야영수회담을 하면서 야당대표의 앞가슴에 이름표를 달게 한 오만, 이런 것에서 많은 국민들은 박근혜 정권의 ’독재틱(tic)‘하고 ’유신스러운‘ 모습을 봅니다. 대통령이 야당에 먼저 손을 내 밀어야 합니다. 야권이 요구하는 국정원 댓글사건 ‘특검’을 받아주고 야당에게서 받을 것을 받는 대타협을 해야 합니다. 검찰이나 특검의 조사결과 자신이 부정선거에 직접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응분의 책임을 지겠다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져볼만 합니다. 댓글사건이 명쾌하게 처리되지 않으면, 5년 임기 내내, 박 대통령은 정통성 시비로 시달리다 실패한 대통령으로 청와대를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내년 갑오년은 청말띠의 해 라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청마를 행운을 가져다주는 유니콘이라 한다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