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리아타운에 살고 있는 최자애 할머니는 70여년 전 일제강압시기의 초등학교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루는 교실에서 담임선생이 ‘집에 언니가 있는 학생은 손을 들어라’고 하자, 두 서너명 학생이 손을 들었다. 손을 들었던 한 학생은 그날 집에서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자 부모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실지로 그 일이 있고나서 얼마 후 담임선생과 면서기가 ‘언니가 있다’라고 한 학생 집에 찾아가 언니를 찾아 어디론가 보냈는데 그 것이 나중에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것을 한참 후에나 알게 됐다. 이같은 일은 비단 최 할머니가 살았던 고장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일제강압시절 한반도 곳곳에서 일어났던 비극의 역사이다.
정신대와 위안부는 달라
최 할머니는 아직도 초등학교 시절에 불렀던 ‘애국행진곡’을 기억하고 있다. 그 행진곡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보라 동해의 여명에/태양이 높게 빛난다, 천지의 정기가 발랄하고/희망은 *대팔주에 춤울 춘다> 이를 두고 최 할머니는 “그 당시 일본은 우리의 동해를 인정했는데, 지금은 이를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면서 “위안부 존재도 인정을 안하는 일본 정부는 미친 것”이라고 항변했다. ‘위안부’에 대해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일본군 성노예(Japanese Army Sex Slaves)라고 표현했다. 정신대로 징집된 여성들 일부가 전쟁말기에 위안부로 뽑혀나갔으나,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뉴스에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들만 소개되어서 한국에만 있다고 아는 경우도 많은데, 이 문제는 세계적인 문제이다. 미국인, 중국인이나 동남아시아 여성들도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발견되었으니 결론은 일본이 건드린 나라의 여성들은 대부분 위안부로 끌려갔다고 보면 된다. 즉슨 인종과 민족을 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일본의 당시 만행은 근대 전쟁사의 심각한 인권 유린 사례 중 하나이다. 다른 나라의 강간이나 성노예 사례 등은 최소한 전쟁 지도부의 윤리관에는 반하며, 군법으로도 금지된 행위 들인 반면에 일본에서는 지도부에 의해 권장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근대 들어서 많은 군대가 현지 윤락 업소와의 협력 체제를 통해 위안소를 운영해 온 것은 사실이나, 일본은 그것도 모자라 사실상 유일하게 군 당국에서 위안부를 본국 및 그 식민지 또는 점령지에서 직접 조달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영내 또는 주둔지로부터 도보로 이동 가능한 가까운 구역에 설치 된 위안소에 식민지 여성들을 강제로, 혹은 속여서 끌고 가 병사들을 상대로 강제적인 성노리개로 삼았는데, 이를 자기들 용어로는 ‘위안부’라고 불렀다. 위안부란 말도 실제로는 완곡어법에 불과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성노예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일본군 위안부 중 대다수, 적어도 상당수가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서 강제 로 납치당했거나 혹은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다.’,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고 속아서 지원한 뒤 태평양 섬 등지의 외딴 곳에 성노예로 끌려갔다는 것이다.
강제 연행된 ‘위안부’
강제연행 및 사기를 통한 인신매매 사실은 모두 확인되며, 비율상으로는 일단 사기가 더 많다. 여기에 처음부터 위안부로 갈 것임을 명시하고 모집한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대부분 일본 본토에서 모집한 일본인 윤락녀였다. 그 외의 식민지 및 점령지에서의 모집은 양상이 매우 복잡 한데, 처음부터 직업 윤락녀를 대상으로 모집하는 경우에도 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밝히지 않은 사례도 제법 있고, 윤락녀를 모집한다는 것 자체를 숨긴 사례도 많다. 또한 당시 사창이 합법이었던 일본의 체제상 윤락녀 모집에는 민간인 매춘업자가 개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정부 책임을 부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본 정권의 주류이긴 하다. 그러나 증거를 살펴보면 모집 과정에서 정부기관 및 군 당국의 직접적인 협력이 노출된 사례가 상당히 많고, 군이나 정부기관이 직접 민간인을 납치 또는 강제 징용한 경우도 적지 않다. 당시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구타, 가해는 일상다반사로, 군도나 칼 등으로 몸을 긋거나 담뱃불로 지지는 등 가히 고문, 학대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일 수십 명의 남자들을 상대하기에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 후 강제로 중절수술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죽는 경우도 많았으며, 배식량은 막장 일본군의 수준에 맞게 극도로 떨어져서 영양실조도 많았던 듯하다. 게다가 그런 납치나 성적 학대로 끝난 것도 아니어서, 심지어는 해당 지역의 일본군이 항복을 거부 하고 자폭할 때 ‘일본군의 비밀 누설 방지’ 혹은 ‘황군의 망신거리를 살려두면 안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같이 죽도록 강요되기도 했다. 이를 옥쇄 정책이라고 한다. 다른 나라 군대는 유사 상황이 적발될 경우 전시 성범죄로 강력 처벌했다. 심지어 나치가 소련 여성 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해도 종종 처벌되었다. 이처럼 전선에 ‘위안부’를 보낸 것은 사실상 일본군이 유일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간신히 전쟁이 끝나도록 살아남았으나, 일제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오히려 일본군과 놀다온 더러운 여자들이란 오해와 편견의 대상이 되며 억울한 질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다 1990년대에 위안부 문제가 대두되자 그동안의 고통을 받아온 위안부 생존자들은 직접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거나 일본의 만행에 대한 증언을 하였으며 우리나라 정부는 1991년 9월 ‘정신대 실태조사대책위원회’를 구성, 일본에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