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임춘훈(언론인) |
|
|
지난 12일 밤 아내와 함께 소치 올림픽 남자 하프 파이프 결승전 실황을 시청했습니다. 한국은 예선 탈락했고, 메달후보로는 겨울 스포츠 강국인 미국과 유럽 선수들이 올라 있었습니다. 헌데 이게 웬일이죠? 결승전 중반을 지나면서 일본의 히라노와 히라오키 선수가 1-2위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승후보인 미국의 스노보드 황제 숀 화이트가 넘어져 탈락하고, 그 덕에 두 일본선수가 금메달과 은메달을 따게 된 ‘끔찍한’ 상황에서, 아내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 갓!” 하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서로를 쳐다보며 “예수 믿는 사람이 일본선수 망하라고 하나님을 찾다니…”하고, 허허(虛虛)히 웃었습니다. 마치 기도의 응답(?)처럼 바로 그때, 스위스의 포들라치코프 선수가 1위에 오르며 히라노 선수의 금메달을 낚아채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하며 환호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마도 “이 독사(毒蛇)의 자식들아!” 하고 우리를 나무랐을 테지만, 독사의 자식이 될망정, 일본이 다 따 놓은 금메달을 놓친 그 순간만은 어쨌든 ‘째지게’ 기뻤습니다.
한 중 일 3국은 전쟁 중!
지난해 서울에서는 “일제시대가 좋았다”고 말하는 한 노인을 술에 취한 30대 청년이 때려죽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이 단지 그 노인의 친일 발언 때문 만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본의 사이버 공간에선 “일년 내내 일본 욕만 하고 사는 한국인들의 ‘반일 비즈니스’가 이젠 살인까지 한다”며 “우리도 하자”는 따위의 막말이 홍수를 이뤘습니다. 혐한(嫌韓)전문 사이트인 야후 재팬에는 요즘 “이웃에 한국이라는 ‘최하국가’가 있는 것은 일본의 불행이다. 더러운 한국, 일본에 빌붙지 마라. 한국은 매춘대국이자 강간천국. 화장실에서 손도 안 씻는 한국남자들…” 같은 ‘반한 욕설’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사이버 공간 뿐 아니라 지하철에서 팔리는 석간신문이나 주간지 월간지 등에도 한국을 때리는 기사가 홍수를 이루고, 서점가에서는 혐한 서적이 논픽션 톱 10 중 3권이나 올라 있습니다. 흡사 ‘전쟁 상황’입니다. 한일전, 혹은 중국까지 참가한 ‘한 중 일 3국 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형국입니다.
日 우익들 “한국 타도” 총궐기
기자생활 50년 중 30년을 한국에서 살았다는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 특파원 구로다 기자는 ‘반한파’ 극우언론인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이번 주 <주간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반일감정, 그리고 언론들의 일상화 된 ‘반일 비즈니스’가 일본의 여론을 자극해 결과적으로 일본 내 ‘반한 붐’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이 왜 생겨났는지 그 근원을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습니다. “반일감정의 근원은 1945년 8월 15일의 한국 광복에 관한 역사에 대한 한(恨)이다. 한국이 일제지배에서 벗어날 때 일본과 싸워 이겨 자기 손으로 일제를 쫓아냈다면 반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독립전쟁을 벌여 일제를 타도했더라면, 민족적 울분도 남지 않고 반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인도 같은 나라들은 점령국인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과 싸워서 자기 힘으로 독립을 해냈기 때문에 사과-반성-보상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며 “한국의 반일감정 해소는 결국 일본과 한번 전쟁이라도 해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해괴한 주장을 폈습니다. 지금 양국 간에 벌어지고 있는 총성 없는 ‘전쟁’은 한국에 근원적 책임이 있다는 얘기로, 일본 우익들의 주장과 같은 맥락입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식민지배에선 볼 수 없었던 일제의 극악무도한 한국지배에 대한 자기 성찰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수 십 만 명의 위안부를 전장으로 끌고 가 병사들의 성적 노리개로 만든 죄,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젊은이들을 징용해 그들이 일으킨 불의한 전쟁의 총알받이로 만든 죄, 피지배국의 국모인 왕비를 참살한 죄, 관동대지진 때 6000명이 넘는 조선인을 학살한 죄, 그 밖의 엄청난 수탈 만행 등등…. 이런 몹쓸 짓을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에서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과 나치독일만 저지른 극악한 국가범죄입니다. 패전 후 독일은 사죄와 배상을 기꺼이 했고, 지금까지도 나치범죄에 대한 역사적 청산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수백만을 희생시킨 1급 전범들의 혼이 모여 있는 국립묘지에 현직 총리가 참배를 하며 그들의 과거 전쟁범죄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 글자 그대로 ‘최하국가’가 일본입니다. 이런 망난이 짓을 전범의 직계자손인 ‘왜놈 총리’ 아베 신조가 하고 있습니다.
장기불황 원전참사 등 아베 우경화 도와
일본의 최근 우경화 바람은 20년에 걸친 장기불황,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자리를 중국에 내준 상실감,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참사, 한국의 삼성에 소니 등 일본의 간판 전자업체들이 무너진 충격…. 이런 일련의 사태로 패배감이 확산되고, 국민들이 마음의 여유를 잃으면서, 예전 같으면 적당히 넘어갈 일도 사사건건 받아치게 되고, 그 대상이 ‘만만한’ 한국이 됐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아베의 통치는 정치적으로는 극우경화, 경제는 아베노믹스, 외교군사적으로는 적극적 평화주의를 빙자한 군사대국화로 내닫고 있습니다. 그가 믿는 구석은 바로 미국입니다. 미국 동아시아 정책의 프라이어리티 넘버 1은 바로 미국을 대신해 일본이 중국의 굴기(崛起)에 최대한 방패막이가 돼 주는 것입니다. 독도나 동해 병기, 위안부 문제 등 한국이 제기하고 있는 역사적 이슈들에 미국은 관심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이 화해해, 북한과 중국이라는 현실적 위협에 공동대응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미국 중재, 한일 정상화 효과 볼까
미국이 최근 바빠졌습니다. 지난 주 방한한 케리 국무장관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일 두 나라 관계의 정상화를 강력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초 한국방문 계획이 없던 오바마 대통령이 일정을 바꿔 오는 4월 아시아 순방 때 한국을 들르기로 한 것에서도 미국의 다급한 속내가 엿보입니다. 4월 이후 박근혜-아베 정상회담 등 한일관계 정상화 드라이브에 본격 시동이 걸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야스쿠니 같은 과거사 문제에 한국이 융통성을 보이고, 일본이 실효성 없는 독도 도발이나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전시 위안부는 다른 나라에도 있었다“ 같은 한국인의 민족정서를 자극하는 망언을 자제한다면, 합의점은 찾아질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반한열풍이 거세도 배용준의 열애소식은 여전히 욘사마 광팬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온-오프라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K팝 스타들의 공연과 한국드라마 등 한류열풍도 여전합니다.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사상 최악이라지만 한국에서도 하루키의 소설은 여전히 스테디셀러로 잘 팔리고 있고, 아사히 맥주 판매량은 수입맥주 중 변함없이 넘버원입니다. 소치 올림픽에서 일본선수의 금메달이 날아가기를 기도한 우리 부부의 ‘애국’이 오히려 ‘올드 패션’이 된 느낌입니다. 근거없는 우월감과 자신감으로 한국을 무시하고 자극하며, 이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에 이용하고 있는 일본의 ‘참 나쁜 총리’ 아베 신조–. 그에겐 여전히 화가 치밉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