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임춘훈(언론인) |
|
|
고등학교 졸업 55주년 Reunion에 참석하러 20여 일 간 한국엘 다녀왔습니다. 200여명의 국내외 동창과 부인 등 300여 명이 함께 기념식과 단체여행 등으로 즐거운 재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70년대에 미국이민을 온 탓에 3~40년 만에 만나는 친구가 제법 많았고, 개중에는 졸업 후 처음 보는 동창도 여럿 있었습니다. 저마다 세월의 덮개 같은 잿빛 안개꽃 한 웅큼 씩을 머리에 인 채, 우리는 TV 속 ‘꽃 보다 할배’처럼, 열아홉 소년처럼, 그렇게 반갑게 만났습니다. “반갑다, 친구야!“–. 50여년 만에 만난 친구와 부둥켜안고 방방 대다, 저도 모르게 움찟 했습니다. “이게 아니지…이렇게 즐거워서는 안 되지…이렇게 기뻐서도 안되지….” 세월호 침몰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진도 앞 바다 차디 찬 해저 뻘에선 아직까지 부모 품에 돌아오지 못한 스물 남짓의 어린 고혼(孤魂)들이 애처로이 울부짖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리는 듯 했습니다. 온 나라가 초상집, 5000만이 상주(喪主)가 돼 저마다 꺼이꺼이 호곡(號哭) 하는, 짐짓 국상(國喪)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판국에 방방 뛰며 “반갑다, 친구야!” 깔깔대는 우리들의 철없음이 가당찮았습니다. “아무리 즐거워도 즐거운 티 안 내기, 아무리 기뻐도 기쁜 티 안 내기–”. 우리의 Reunion 행사는 그렇게 ‘절제 모드’ 속에 진행됐습니다.
세월호가 집어 삼킨 서민경제
동대문시장 의류상가에서 만난 7순의 새우젓 장사 할머니는 “천원 어치도 못 팔았다”고 도리질을 합니다. 머리에 새우젓과 조개젓 통을 이고 하루 종일 시장 통을 누벼봐야 벌이가 고작 1~2만원인 이 할머니의 고단한 삶은 세월호 이후 더욱 핍박해졌습니다. 국내 여행객이 많이 찾는 남-서해안의 아름다운 관광지들은 개점휴업입니다. 대한민국 자연경관 제1경(景)이라는 전남 홍도의 여객선 터미널에 유람선이 닫자, 숙박업소와 식당, 횟집 등에서 나온 호객꾼들이 몰려들어 난장판이 됐습니다. 이곳의 명물인 노상 해녀횟집들에선 해녀들이 아침에 잡아 온 전복 해삼 소라 멍게 등 횟감들이 손님이 없어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5월이면 대목 중의 대목입니다. 이맘 때 국내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 바로 통영에서 여수에 이르는 한려수도와, 홍도 일대의 경관 좋은 관광지들입니다. 이들이 ‘홍도야 우지마라’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세월호가 몰고 온 초상집 분위기는 회복기미를 보이던 한국경제에 치명타를 안겼습니다. 고위 경제부서 책임자인 친구는 “이런 분위기가 한 두 달 더 지속되면 올 GDP가 최소 0.5%는 떨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범 좌파 공세 이제부터 시작?
침몰한 세월호 안엔 아직도 15구 이상의 실종자 시신이 갇혀 있어 이들 시신이 다 수습될 때까지 아마도 지금 같은 초상집 분위기는 지속될 겁니다. 점점 더 팍팍해 질 서민들 살림살이가 걱정입니다. 미국의 9.11이나 일본의 후꾸시마와는 달리 한국의 세월호 사건은 이미 정치문제, 즉 좌우 파와 여야 간의 진영싸움으로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두 달이 아니라 1년 내내 세월호로 날이 지고 샐 판입니다. 엄주웅은 유신 때 감옥을 세 번이나 다녀 온 이른바 「긴조(긴급조치) 세대」의 핵심인물로, 이명박 정부 때 야당추천 몫의 방송심의위원을 지낸 진보 쪽 인사입니다. 그가 최근 이런 말을 했습니다. “4.16 전에는 사람들이 진보와 보수로 나뉘었다. 그러나 4.16 후는 사람과 짐승으로 나뉘었다….” 학생들을 배 안에 가둔 채 저희만 탈출한 이준석 선장이나 세월호 침몰의 직접 원인 제공자인 세모와 구원파의 두목 유병언, 그의 불법 비리와 결탁한 해수부와 해경 등의 비위공직자들을 ‘짐승’이라 부른다 해서 이의를 달 국민은 많지 않을 겁니다. 허지만 엄주웅의 ‘짐승론’은 “사고의 최종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통렬히 커밍아웃을 한 박근혜 대통령과 그의 무능 부패한 보수정권을 향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집회에선 ‘박근혜 아웃’ 피켓과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단체, 대학교수, 종교단체, 그리고 우리가 사는 재미교포사회에서도 나오기 시작한 시국선언 의 구호도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고 있습니다. 대선후보였던 문재인 의원은 “세월호는 제2의 광주사태”라 했고, 유시민 전 의원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내 말이 맞아 떨어졌다”고, 느닷없이 ‘쪽집게 도사’를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4.16 이후’를 겨냥한 범 좌파 세력의 총공세가 개시된 느낌입니다. ‘얼음공주’의 ‘지각 눈물’
박근혜 대통령이 20일 ‘달기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대통령의 눈물에 대해 제1야당 대표인 김한길은 “진정성이 느껴진다”고 ‘간만에’ 인심을 썼고, 국민여론도 대체로 수긍해 주는 분위기입니다. 한겨레신문은 유가족의 말이라면서 “박근혜의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라 썼습니다. 대통령의 ‘지각 사과’와 ‘지각 눈물’을 시비 거는 언론도 있습니다. 사건 초 진도 현지를 찾아 피해가족들을 만났을 때 대통령은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물바다를 이룬 현장 분위기와 너무 대조돼 “역시 얼음공주”라며, 혀를 찬 국민이 적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는 19일 ‘아쉽다! 타이밍 놓친 박 대통령의 눈물’이라는 칼럼에서 ‘얼음공주의 지각 눈물’을 “바람이 지나간 후 띄워보는 돛단배”에 비유했습니다.
미국인들, “대통령이 왜 우나?”
세월호 침몰은 미국인들도 공감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헌데 이들은 의아해 합니다. 전 국민이 한 달이 지나도록, 일상생활을 거의 접은 채, 피해 가족들과 함께 울부짖는 모습이 낯설기만 한 모양입니다. 9.11후 며칠 만에 부시 대통령은 “이제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했고, 이후 그의 지지도는 90%까지 치솟았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왜 이런 ‘guts의 리더십’을 보이지 못하고 피해가족들과 함께 눈물이나 쥐어짜고 있느냐고 딱해 하는 미국인들이 많습니다. 한국을 모르는 소리입니다. 지금 박근혜가 나서 “이제 그만 울고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하는 순간, “피도 눈물도 없는 유신독재자의 딸”이라는 식의 돌팔매질이 사방에서 날아들 겁니다. 대통령 뿐 아니라 누구도 이런 말을 꺼냈다가는 몰매를 맞을 분위기입니다. 경제가 파탄 나고 국정이 속절없이 표류하고 있는데도, 어느 누구도, 세월호 피해가족들 눈치 보느라, 입도 뻥끗 못하고 있습니다. 피해가족들의 이같은 배타적 세력화 역시 정상이랄 수는 없습니다. 애이불비(哀而不悲)라 했습니다. 슬프지만 슬픈 얼굴은 거둘 때가 됐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제 평상을 되찾고 나랏일을 정상화 하자”고 호소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은 유가족들 뿐입니다. “그동안 함께 울고 아파해 준 국민들께 감사한다. 떠나 간 자식들은 이제 가슴 에 묻겠으니 국민들은 일상생활로 돌아가 달라”–. 유가족들이 이런 대국민 호소문을 내면 어떨까요? 지금은 고인이 된 가수 이남이는 80년에 <울고 싶어라>라는 소울 풍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절규 하는듯한 느린 템포의 이 노래는 당시 시대상황과 국민정서와 맞아 떨어지면서, 20년 이상이나 국민 애창곡으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한도 많고 눈물도 많은 우리 민족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