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9일은 경술국치일(1910)이다. 최근 이순신장군의 영화 ‘명량’이 1000만 관객을 넘었다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한국에서 이순신을 추앙하는데 일본에서는 이와 비슷한 해군 지휘자로 도고 헤이하지로를 기념하고 있다. 도고 헤이하지로는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진해 앞바다 취도(일명 독수리섬)에서 러시아의 최강 발틱함대를 전멸시킨 용장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일본은 그때 도고의 승전을 기념해 ‘독수리상’ 등을 기념물을 만들었다. 한국전쟁과 인연이 깊은 미40사단에는 재미있는 전리품이 하나있다. 바로 110여년전 경남 진해에 주둔 했던 당시 일본 동양함대 기지에 있던 러일전쟁 승전기념물인 ‘도고 독수리(Togo Eagle)’가 미40사단 사령부에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 최근 알려져 일제만행을 알리는 기념물로 진해로 이전 시키자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40사단은 1945년 8월 일제가 2차대전에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한반도에서 일본군 의 무장해제를 위해 진해에 들어가 남아있던 ‘도고 독수리상’을 노획했다. 그리고 이를 미국으로 가져와 태평양전쟁에서 숨진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유물로 보존해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독수리 상의 역사를 모르고 지내왔다. 그러다가 최근에 캘리포니아전쟁박물관에서 이 독수리상의 내역을 연구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본보 취재진은 지난 10일 한국전참전용사 기념행사를 위해 오렌지카운티에 소재한 미40사단을 방문한 기회에 문제의 ‘도고 독수리상’을 취재했다. <성진 취재부 기자>
현재 미40사단과 한인커뮤니티와의 친선관계를 담당하는 조봉엽 전재향군인회장은 이날 사령부 구관 로툰다에 있는 독수리상을 안내하면서 “이 ‘독수리상’ 기념물을 원래 있던 한국의 진해 해군 기지로 보내어 일제 만행을 알리는 유물로 보존하면 좋을 것”이라면서 “미40사단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이에 동의하는 분위기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한인사회에서 캠페인을 벌이면 좋을 것”이라면서 “미40사단은 한국과도 인연이 매우 깊은 부대이기에 이같은 기념물 이전 운동에도 관심을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미친선연합회미주연합회의 최창준 회장은 “한국본부와도 연결해 문제의 ‘독수리상’을 한국으로 이전하는 문제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도고 독수리상’을 노획한 미40사단은 제1차세계대전부터 해외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해왔다. 2차대전 당시 필리핀 전투에도 참전했으며, 전쟁이 끝나자 한반도 일본군 무장해제와 주둔군으로 한국에 왔으며, 나중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전선에 참전하면서 나중 가평에 주둔하게 됐다. 당시 미 40사단장 조셉 클리랜드는 전쟁통에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는 한국학생들에게 큰 감동을 받아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1만 5천여 명의 사단 장병들이 2달러씩 모금활동에 참여해 ‘2달러의 기적’이라고도 불리면서 학교를 세웠다. 오늘의 가평고등학교이다. 미 40사단에서는 6.25 전쟁 첫 전사자였던 케네스 카이저 하사의 이름을 딴 ‘가이사 중학원’이 가평고등학교의 첫 이름이다. 이후 매년 미 40사단 참전용사들은 한국을 방문하고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는데 6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원래 ‘도고 독수리상’은 일제가 1904년 진해 앞바다 ‘취도’ 근처에서 벌어진 러시아의 발틱함대와의 해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러일전쟁’의 최대격전인 ‘쓰시마해전’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일제는 다음해 1905년 을사능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그뒤 5년후인 1910년 한국을 강제로 병합시켰다. 일제는 이 기념물 이외에 거제시에 있는 “취도기념탑”(도고 제독 승전비)와 진해시의 도고 제독 친필 비문 등 2점이 있는데 한때 거제시민들이 일제잔재라며 기념탑 철거운동을 벌였는데 최근에는 이순신장군 기념사업의 하나로 일제만행을 기념하기 위한 보존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순신장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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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40사단에서 보존하고 있는 ‘도고 독수리’ 상 설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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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남지역의 도고 헤이하치로 또다른 유물은 거제시에 있는 도고 제독 승전비와 진해시의 도고 제독 친필 비문 등 2점이다. 제독 승전비는 높이 160㎝, 폭 60㎝의 화강암으로 당시 러시아 발틱함대 37척을 가덕도 앞바다에서 격침시킨 것을 기념해 일본인에 의해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 일원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 비석은 당시 우리나라 해군사령부에 의해 파손된 뒤 거제시청 창고에 보관 중에 있으며 거제시에도 한때 이를 복원해 관광상품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었다. 진해 비석은 당시 일본함대 주둔지 일원이었던 진해시 제황산공원의 한 종교단체 경내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지난 3월 그 단체가 진해시에 기증했다. 가로 33cm, 세로 33cm, 높이 194cm의 이 비석 앞면에 진해산덕환사, 뒷면에는 도고 헤이하치로 서라고 씌어있다. 최근 진해시가 전문가 감정을 거친 결과 도고의 친필인 것으로 확인돼 일본에서 이를 팔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경남도가 일본군과 싸우다 숨진 이순신 장군 프로젝트에 러일전쟁 승리를 통해 조선 침략의 발판을 놓은 도고 제독 복원사업을 포함시킨다는 것은 이순신 프로젝트의 의의를 퇴색시킬 수 있는 이해하기 힘든 행태라는 지적이 많았다. 창원대 도진순(사학과) 교수는 “복원할 경우라도 일본인들이 사죄하고 반성할 수 있는 시설물이어야지 단순한 관광상품으로 내놓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또 한 사학자는 “충분한 여론수렴을 거쳐 복원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며 신중한 접근을 당부했다고 언론들은 보도했다.
‘쓰시마 해전’은 1905년 러일 전쟁 중 쓰시마 섬 부근 바다에서 일본 연합함대와 러시아 발트해 함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노급전함을 주력으로 한 함대가 정면으로 격돌한 최대의 해전이었다. 결과적으로 예상을 뒤엎고 일본 해군이 승리했고, 러시아 발트해 함대는 전멸했다. 일본에서는 일본해 해전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동해 해전이라 부른다. 이후 일본은 미국이 주선한 포츠머스 조약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러일전쟁은 일본군이 요동반도 남단의 여순을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무모한 육탄공격전을 벌인 일본군은 7,8개월간 총병력 13만 4천여명중 과반에 달하는 6만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악전고투끝에 서기 1905년 1월 1일에 마침내 여순을 함락했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일본군의 군수보급이 제대로 안되고 있음을 파악하고 장기전 태세를 갖추었다. 러시아의 작전은 보급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일본군을 하얼빈까지 유인하여 북만주의 엄동설한하에서 본격적인 반격작전을 개시함으로써 몰살시키려는 러시아특유의 ‘동장군’ 작전이었다. 초기 전투에서 국력이 이미 고갈된 일제로서는 속전속결을 치루어야만 했으나, 러시아군은 바로 그러한 일제의 약점을 간파하고 겨울을 이용한 장기전략을 구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만주에서의 패배소식에 격노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일본군을 즉시 격퇴할 것을 명령함으로써 러시아군은 계획을 변경할 수 밖에 없었으며, 전쟁의 양상은 끝날 기약없는 소모전으로 접어들었다. 북만주지방 공략에 사활을 건 일본군의 저돌적인 공격에 직면한 러시아군은 원래의 복안대로 북만주로의 유인작전을 다시 진행하고자 작전상 총퇴각을 실시하였다. 전황이 장기화됨에 따라서 러시아는 세계 제2위의 막강한 해군력을 투입하기로 하고, 우선 극동의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함대로 일본군의 해상보급선을 끊으려 하였으나, 일본해군에 의하여 주력함이 파괴당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라서 러시아는 1904년 4월 30일에 러시아의 최우수 정예함대인 발틱함대를 극동에 파견하기로 하여 10월 15일에는 북해를 떠나 지구를 반바퀴도는 긴 여로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과 동맹을 맺은 바있는 영국은 그 긴 항로에 널려진 영국관할의 항구들에 정박하지 못하도록 함은 물론 다른 나라(프랑스, 청국)들에게도 압력을 넣어서, 발틱함대에 대한 보급이나 정비 등에 지대한 장애를 일으키게 하는 등 철저히 방해함으로써 러시아사병들이 피로에 시달리는 등 발틱함대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우여곡절끝에 서기 1905년 5월 26일에야 간신히 극동에 도달한 발틱함대는 수개월간 현지에서 맹렬한 해상연습을 실시하여 온 도오고 헤이하찌로의 기민한 전술에 걸려들어서 대패 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고 말았던 것이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일본측은 일단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더이상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에 한계를 느꼈고, 러시아측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노동자들의 봉기로 내정에 혼란이 오는 등 후방이 불안해져서 전쟁에 전력투구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으므로 둘 다 전쟁의 종료를 바라게 되었다. 명치일본은 서기1904년 5월에 이미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강화교섭을 알선해주기를 간청했다. 이에 사태를 관망하던 루즈벨트가 양국간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루즈벨트는 두 나라에 대한 화의권고를 공표하였고, 서기1905년 8월 9일부터 미국의 군항 포츠머스에서 강화회의가 열려서 일단 양국간 전쟁은 종결을 보게 되었다. 이후 일제는 한국을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란 명분으로 외교권을 강탈했고, 5년 후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강제로 병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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