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김 대표는 추석 전 있었던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차기 대권후보 지지도 공동 1위에 오르며 분위기를 타고 있다. 여기에 고무된 김 대표는 여세를 몰아 점차 자신의 존재감을 확대시키는데 전력을 쏟아 붓고 있다. 특히 ‘기춘대원군’으로 불리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현재 여권 내부에서 묘한 권력 투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특히 친박으로 불리는 전ㆍ현직 의원들이 상당수 김 대표 진영으로 넘어가면서 세를 규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당 대표 출마 때부터 김기춘 실장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해왔다. 급기야는 최근 본국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논란과 관련, “그런 유언비어가 퍼진 건 국회에서 답변을 잘 못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책임이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야당이 박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을 계속 겨냥하고 있다”는 질문에 이 같이 밝히며“ ‘박 대통령이 사고 당일 분 단위로 이렇게 움직였다’고 밝혔으면 됐을 텐데 그러지 않았으니 문제가 커진 것 아니냐”며 “비서실장이 열 번이라도 국회에 나와 국민들의 궁금증을 풀어줘야 했다”고 말했다. 김기춘 공격은 계산된 시나리오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김 실장은 ‘답답한 사람들’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등의 표현을 써가며 청와대, 특히 김 실장을 공격했다. 김 대표가 김 실장을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대통령의 사생활과 관련하여 비서실장을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따라서 그 파장도 만만치 않다. 당장 청와대에서 불쾌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는 본지 기자와의 통화에서 “여당 대표가 청와대 비서실장을 언론을 통해 공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본인의 정치적 입장도 있지만 결국 정권의 성공이 본인의 성공을 이끈다”고 말했다. 차기 대권 후보 1위 김 대표가 대통령의 사생활에 대해 비서실장을 공격하고 나선 것은 최근 그가 차기 대권 여론 조사에서 선두권에 오른 것과 무관치 않다는 반응이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의 여야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2014년 9월 1주차 주간집계 결과 박원순 서울 시장이 1.9%p 상승한 18.6%로 1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0.1%p 상승한 17.7%로 2위에 올랐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1.0%p 하락한 14.3%로 3위를 기록했다. 또 다른 여론 조사에서 김 대표는 공동선두까지 올랐다. 이런 분위기가 그로 하여금 대권에 대해 욕심을 갖게 만들게 되는 분위기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현직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인 셈이다. 사실 이런 당청 관계는 김 대표가 당권에 도전했을 때부터 예견됐다. 김 대표가 당권에 도전했을 때부터 여권 주변에서는 “박근혜 대통령과 김 의원과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껄끄럽다”며 “그런 김 의원이 당권을 잡는 상황이 청와대에서는 반가울 리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하지만 정치 스타일은 달랐다. 김 대표는 2006년부터 박 대통령의 대선 준비팀을 가동했지만 박 대통령은 이를 꺼리면서 둘 관계는 하강국면으로 흘렀다. 그럼에도 김 대표는 2007년 박 대통령의 대선 캠프 조직 총괄본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신뢰를 회복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에 당선되면서 친박계였던 김 대표는 이듬해인 2008년 18대 총선에서 소위 ‘보복공천’의 희생양이 됐다. 위기는 기회로 반전됐다. 김 대표는 친박 무소속으로 부산에서 당선돼 국회에 복귀하면서 친박 좌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고난 끝에 입성한 국회에서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관계는 매끄럽지 못했다. 차기 대권 후보 1위 무대의 반란 2009년 친이계가 김 대표를 원내대표로 추대했으나 박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면서 김 대표와의 골은 깊어졌다. 같은 해 가을부터 이명박 대통령과 친이계가 제시한 세종시 수정안은 친박계 분열의 씨앗이 됐다. 당시 김 대표는 세종시 수정안에 7개 독립기관 이전을 담은 수정안을 제시하며 중재에 나섰다. 박 대통령은 원안을 고수하며 김 대표와 사이가 멀어졌다. 같은 해 김 대표는 원내대표에 도전했다. 박 대통령은 “친박계 좌장은 없다”고 선을 그으며 경고했으나 김 대표는 아랑곳 않고 친이계 지지를 받아 원내대표에 당선됐다. 이 때부터 김 대표는 친박계 좌장 꼬리표를 잃고 ‘탈박’(탈박근혜계)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2012년 3월 박 대통령이 주도한 19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한 후 이를 수용, 백의종군하는 모습을 보였다. 18대 총선처럼 김 대표가 탈당, 무소속 출마를 감행했다면 당이 쪼개질 위기에 내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평이 나온다. 김 대표와 박 대통령이 다시 손을 잡은 것은 2012년 대선국면이었다. 박 대통령은 김 대표에게 대선 캠프 선대본부장, 총괄선대본부장을 맡겼다. 넘어야할 산 많은 대권가도 본지에서 보도했던 것처럼 한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기에는 국민들의 반감을 살 만한 약점이 많다. 우선적으로 부친의 친일행적 논란이 있고, 형제들간 재산 분쟁, 딸의 특혜 채용 등이 꼽힌다. 본지가 이미 보도한대로 그는 자수성가형이라기보다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김 대표의 부친인 김용주 선생은 전남방직그룹 창업자이자 회장으로 해방 직후 신한제분을 운영하고 대한해운공사 사장과 주 일본공사관 공사를 지냈다. 그는 대표적인 친일파로 꼽히기도 한다. 김 전 회장은 원래 전라도 토박이 사업가였으나 해방 직후 도망치듯이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부산에서 카페(음식점)을 하던 김무성 대표의 어머니를 만나 김 대표를 출산했다. 김무성의 의원은 배다른 형제들과도 현재 재산문제로 지금까지 대립관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김무성 도발의 노림수…그가 김기춘을 물고 늘어지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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