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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산 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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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절 미주 내 독립운동의 1번지였던 LA카운티 정부가 우리민족의 영웅 도산 안창호 77주년 순국 기념일인 3월10일을 기념하면서 도산의 맏딸 안수산 여사의 평생업적으로 기려 이날을 ‘안수산의 날’ (Susan Ahn Cuddy Day)로 선포했다. 안 여사는 이날 LA카운티 정부청사에서 거행된 기념식에서 “너무나 영광스럽다”면서 “내게는 동양인이건 아니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세계2차대전 중 자유를 위해서 싸웠다는 것이 중요 했다”고 말했다. 또 안수산 여사는 “군인 중 한 명으로서 조국인 대한민국과 거주하고 있는 미국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감사할 따름”이라며 “전쟁이 발발해 참전한 것은 내 인생의 새로운 기회였다”며 소감을 밝혔다.
자랑스런 미국 속 한국인상
이날 LA카운티 정부의 ‘안수산의 날’ 조례를 발의하여 만장일치의 결의를 받은 마크 리들리-토마스 수퍼바이저는 2015년에 100세를 맞이한 안수산 여사는 동양계 여성으로 최초의 미군에 입대하여 미해군 최초의 여성 포격술 장교로서, 또한 냉전 시절에는 소련을 상대로 300여명의 정보 분석가를 지휘한 공직자로 미국을 위해 봉사한 인물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안 여사는 한국인의 독립 영웅인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맏딸로서 부친의 유산을 이어받은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커뮤니티 발전에 봉사한 인물 이라고 선언했다. 이날 ‘안수산의 날’을 제안한 LA카운티 마크 리들리-토마스 수퍼바이저는 “지난날 남자들 세계에서 장벽을 허물은 최초의 동양인 여성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정책인 미국사회에서 이에 도전한 개척자”라고 추앙했다. 마크 리들리 토마스 수퍼바이저는 평소 자신을 ‘안수산의 남자친구‘로 소개할 정도로 안 여사와 한인사회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정치인이다. 이날 안 여사의 딸인 크리스틴 커디 변호사는 기념식장에서 가족을 대표해 “어머니 안 여사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절에 백인 남자 장교와 결혼 할 정도로 용기 있는 여성 이었다”고 말해 장내에 웃음을 선사했다. 이날 LA다운타운에 자리 잡은 LA카운티 청사의 수퍼바이저 회의장에서 개최된 선포식에는 안수산 여사와 아들 필립과 딸 크리스틴 그리고 외손자 마이클을 포함해 한인사회에서 3.1여성 동지회(회장 홍순옥), 한국문화회관(창리자 이광덕 목사),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미주본부(회장 권욱종) 등을 포함한 단체 인사들이 참석했다. 4.29폭동 당시 한인들을 대변했던 안젤라 오 변호사와 봉사자 마샤 주씨(웰스파고 은행 커뮤니티 담당관) 등도 축하객으로 참석했다. 미국에서 우리나라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에 한국독립운동의 선각자의 순국일을 기념하기는 처음이다.
선친 유언으로 미 해군에 입대 활약
안창호 선생과 헬렌 안 여사의 맏딸인 안수산 여사는 1915년 LA에서 출생했으며, 신한민보와 흥사단, 3,1 여성 동지회 등에서 활동했으며1940년 칼스테이트 샌디에고를 졸업한 뒤 1942년 미 해군에 입대해 4년간 근무했다. 안 여사는 “입대할 당시 한국이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라며 “일본군과 맞서 싸워 한국의 독립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원입대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안 여사는 2차 대전 당시 미 해군에 입대해 장교학교에 지원했지만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했다가 다시 지원해 비행사들에게 공중전 전략을 가르치는 해군 최초의 여성 포격술 장교가 됐다. 1946년 제대한 후 국가안전보장국(NSA)에서 암호를 분석하는 비밀정보 분석가로 활동했다. 안 여사는 1959년 NSA에서 은퇴할 때까지 워싱턴 D.C.에서 300명의 냉전관련 학자들을 지도하는 부서장을 역임했는데 별명이 ‘작은 히틀러’일 정도로 철저한 업무 처리로 유명했다. 도산에게 독립운동가의 선구자적 고뇌가 살아있다면 안 여사에는 개척자로 당당하게 삶을 이끌어 간 긍정의 힘이 살아있다. 도산의 ‘무실역행’정신은 딸 안 여사의 삶에서도 뜨겁게 이어지고 있다. 작고한 아일랜드계 남편 프랜시스 커디 씨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둔 그녀는 2003년 자서전 ‘버드나무 그늘 아래’를 펴내기도 했다. 안 여사는 지금까지 LA에서 살아오면서 자신의 유명세보다는 아버지 도산과 어머니 이혜련 여사의 삶을 전하는데 힘썼다. 무엇보다도 어머니 이혜련 여사가 일평생 도산의 유지를 위해 삶을 살아온 것을 본받아 자신도 어머니의 삶을 사는데 정성을 쏟고 있다. 도산 안창호의 자녀는 5명 중 3명이 미군에 입대했다. 이들은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이어가겠다며 일본을 상대로 싸우는 미군에 들어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되던 날, 안 여사는 도산의 얼굴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말을 되새겼다. “한국의 뿌리를 잊지 마라, 그리고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라” <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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