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청와대-유승민, 물러설 수 없는 서바이블 게임에 또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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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배신’과 ‘소신’ 정치 힘겨루기가 계속되고 있다. 박 대통령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힌 유 원내대표가 조만간 명예롭게 물러나는 선에서 사태는 일단락되겠지만,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을 전망이다.
특히 양측 간 갈등은 내년 총선 공천권을 두고 반드시 한 번은 폭발할 가능성이 높다. 본국 정치권에서는 대통령이 나서서 여당 원내대표를 배신자로 낙인찍은 것은 이례적 사건의 배후로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부속실 비서관, 안봉근 홍보비서관 등 문고리 3인방을 꼽고 있다.
정윤회 십상시 사건 이후 오히려 위세가 등등해진 3인방과 유 원내대표는 2005년 초 박근혜 당시 대표의 비서실장으로 처음 발탁됐을 때부터 ‘문고리 권력’과 갈등을 빚은 것으로 전해졌다. 비서실장으로서 박 대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유 원내대표는 보좌관들이 자신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박 대표를 보좌하는 것을 수상하게 여겼다.  이러한 의심은 박 대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 계속됐고, 박근혜 정부 출범 후에도 박 대통령 주변에 자신을 음해하는 세력이 있다고 생각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박의 3인방과 등져서 지금까지 생존한 사람은 한명도 없다는 점에서 유승민의 향후 행보가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유승민 사태 파동의 내막을 <선데이저널>이 짚어 보았다.
리차드 윤(취재부기자)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이런 불신은 유 원내대표가 2014년 7월 박근혜정부의 ‘중국 경도론’ 논란과 관련해 외교부에 질의하면서 “이거 누가 합니까. 청와대 ‘얼라(어린이)’들이 하는 겁니까”라고 강하게 질책하는 것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박 대통령과 멀어지게 된 것도 문고리 권력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결국 이번 사태는 박 대통령과 유승민 원내대표 간의 갈등이 아닌 문고리 3인방이 여전히 국정 중심에서 박 대통령을 흔들고 있다는 방증이다. 배신의 아이콘과 허무주의에 빠진 박대통령의 패배적 소아병적인 우울증 증상이 이번 사태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유승민 원내대표가 ‘여왕’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정치’를 하는 배신의 아이콘이 돼버린 것에 대한 극단적 분노의 표출이다.

유승민과 문고리 3인방의 숙명적 관계

유승민 의원과 문고리 권력과의 악연은 지난 2005년 시작됐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비서실장이 되면서다. ‘3인방’은 그때도 ‘언터쳐블’이었다. 이들 3인방 국정 비선 논란을 빚은 정윤회 씨의 추천으로 박 대표의 보좌관이 됐다. 당 대표실 대신 의원회관 의원실에서 이뤄지는 ‘그들만의 보좌’에 대해 그 누구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유승민 비서실장은 당장 그들을 당 대표실로 불러들였다. 기존 당직자 세 명과 나란히 해 당 대표실 직원 6명 중 한 명으로 일하도록 했다. 보고 체계도 엄격하게 단속했다. ‘3인방’이 그를 거치지 않고 대표에게 직보를 할라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들이 박 대표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왔다하더라도 박 대표가 당직을 맡았으면 그에 맞는 시스템으로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유 실장의 판단이었다. ‘문고리 3인방’이 유 의원을 껄끄러워했음직하다. 이러한 분위기는 정윤회 씨에게도 그대로 보고됐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심지가 굳은 사람이어도 주위에서 같은 얘기를 반복하면 결국 넘어가기 마련이다. 문고리 권력의 조언 때문이었을까. 결국 유 원내대표는 친박에서 멀어졌다.

비슷한 경우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경우다. 한 때 친박좌장으로 불릴 정도로 친박을 대표했던 김무성 대표의 존재가 ‘문고리 권력’은 달가웠을 리가 없다. 기세가 등등했던 이들도 주군에게 거침없이 할 말 하는 김무성은 어려웠던 것이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김무성이 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였다. 3인방 가운데 한 명이 난데없이 ‘출석체크’를 하고 나섰다. 아무리 실세의 측근이라고 해도 주제넘은 행위였다. 김무성은 이 장면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호통을 치며 나무랐다. 이런 김무성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독점한 이들에게 곱게 보일 리 없었을 거다.

김 대표와 유 원내대표는 일개 의원 보좌관에 불과한 문고리 권력 3인방이 하찮게 보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호통을 쳤고, 반면 문고리 3인방은 그런 그들이 달가울 것이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하나 둘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멀어져갔다. 하지만 나름대로 정치적 자산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결국 현 정부에서 여당 대표와 원내대표 자리를 나눠가지며 청와대와 맞설만한 위치까지 성장했다. 하지만 두 사람과 문고리 3인방과의 갈등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황교안 총리와 불편한 동거 표출

청와대가 비선 국정개입 의혹 문건 유출로 공황에 빠진 상황에서 청와대 선임행정관이 문건 유출 배후로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를 거론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부터다. 지난 1월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은 “한 술자리에서 음 행정관으로부터 ‘정윤회 동향’ 문건 파동의 배후는 김 대표와 유 의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 전 비대위원은 음 행정관의 말이 믿기지 않아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과 박관천 경정이 사고 친 것 아니냐’고 했는데 음 행정관이 ‘그들만으로 한정된 것은 아니다’라며 김 대표와 유 의원을 배후로 언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음 행정관의 말을 믿을 수 없어 몇 차례나 설명을 더 해달라고 되물었는데 질문할수록 ‘대표, 유 의원이 배후’라는 주장의 강도가 세졌다’고 말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부속실 비서관, 안봉근 홍보비서관

음 행정관은 현 정부 십상시 중 한 명으로 거론됐던 인사로, 권영세 현 주중대사,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 등 친박 의원 보좌관을 지낸 데 이어 2012년 대선 때 캠프 공보단장이던 이 의원 밑에서 공보기획팀장으로 일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에 들어가 정무·홍보수석을 지낸 이 의원을 보좌했으며, 이 의원이 청와대를 떠난 후에는 홍보기획비서관실 선임행정관으로 활동했다.

즉 문고리 3인방과 함께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던 음 전 행정관이 여당 대표와 실세 의원을 문건 배후의 파동으로 거론하면서 파장은 확산됐고, 두 사람과 문고리 권력 간의 갈등이 다시 불거지는 계기가 됐다.
이후 양측의 소소한 갈등이 계속됐다. 유 원내대표는 5월21일 황교안 법무부장관의 신임 국무총리 지명 직후 “(앞서) 청와대의 전화를 받았는데 제가 잘못 들었는지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다.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다”라고 말해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일종의 해프닝일 수 있는 사안이지만, ‘청와대의 국무총리 인선 과정에서 혼선이 빚어진 것 아니냐’는 의혹을 부추길 만한 발언이었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로서는 당혹스러울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정윤회 파동 후 문고리 위세 높아져

이번 당청 갈등에서도 보았듯이 현 여권 내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 나침반은 대부분 문고리 권력을 가리킨다. 이는 그들이 청와대에 계속 머무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박 대통령은 신년기자회견에서 특보직을 신설해 각계의 목소리를 다양하게 듣고 소통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박 대통령은 이병기 국정원장을 청와대로 불러들이면서 민심 회복 노력을 누누이 당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시에 이를 위한 전폭적 지원을 다짐했다고 한다. 마침 박 대통령이 비서실장 임명 직후 중동 해외순방에 나서자, 전체 수석회의를 주재한 이 실장은 회의 장면을 언론에 공개했다. 별것 아니지만 지금의 청와대에서는 큰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실장은 회의에서 각 수석실별 정례 오찬 회동 계획을 밝히는 등 많은 변화를 예고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소통’ 창구로 기대를 모았던 이병기 비서실장도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한다. 오히려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면서 정치자금 스캔들로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지난달 공무원연금법 개정안 처리 과정에서 이 실장이 제 역할을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꼬일대로 꼬인 당청 갈등 해소를 주도해야 할 이 실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이 실장의 역할이 위축되는 사이  ‘문고리 3인’ 의존도가 더 높아졌다 것이 청와대 내부 분위기다.

문고리 3인방은 청와대 내부의 권력을 나눠 갖지 않으려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병우 민정수석이 한 때 핵심권력으로 떠오르자, 공교롭게도 우 수석의 재산과 관련한 내용이 여의도 정가에 파다하게 돌았다. 사람들은 그 배경을 입에 떠올리지는 않지만, 마음 속으로는 한 곳을 떠올린다.
정권 출범 후 승승장구하던 3인방은 정윤회 문건으로 잠시 위기를 맞았지만 박 대통령은 3인방을 다시 품었다. 이재만 비서관이 인사위원회에서 빠졌다지만 여전히 청와대 살림을 맡는 총무비서관으로 재직 중이다. 정호성 비서관은 1·2부속실을 모두 맡으며 오히려 힘이 세졌다. 안 비서관은 부속실에서 나와 홍보수석실로 옮겼다. 보직 변경과 역할 조정이 있었지만 여전히 문고리 권력 핵심인 것만은 틀림없다.

두 사람의 갈등은 선친 때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 원내대표의 부친인 유수호 전 국회의원(13·14대)은 대구 중구에서 재선 의원을 지냈다. 유 전 의원은 정계에 입문하기 전인 1970년대 초반까지 판사로 재직했다. 하지만 그는 1973년 지방법원 부장판사직을 끝으로 법복을 벗었다.
일명 ‘사법파동’으로 인해 판사 재임명이 좌절된 것이다. 당시 사법파동은 박정희 정권이 군사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판결을 하는 법관들을 무더기로 면직시킨 사건이다. 당시 사법파동으로 부장판사 이하 법관 44명이 강제로 면직 처리됐다. 유수호 전 의원은 사법파동으로 면직 처리되기 전인 1971년 8월, 대통령선거법 위반죄 혐의로 기소된 전 울산시장의 병보석을 취소하고 징역 3년 실형을 선고하는 등 관련 공무원을 엄벌했다.
당시 공무원들은 그해 4월27일 치러진 7대 대선에서 신민당 김대중 후보의 유효 득표를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표에 가산해 박 후보의 득표율을 76%에서 81.2%로 조작한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는 전국적으로 53.2%를 득표해, 김대중 후보(45.2%)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유 전 의원은 같은 해 10월27일 군사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전국에서 처음 구속된 부산대 총학생회장의 구속적부심(영장실질심사)에서 ‘증거 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며 석방 결정을 내렸다. 유 원내대표가 지금 박근혜 대통령과 갈등을 빚고 있다는 점에서 부친들의 악연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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