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의 연일 본국의 신문 방송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 뿌리를 둔 롯데는 그동안 기업 경영부터 오너 일가의 사생활까지 모두 베일에 싸여 있다는 평가를 받아온 기업이다. 롯데그룹이 한국과 일본에 400개가 넘는 회사를 두고 지배구조를 복잡하게 꼬아놓은 후 적은 지분으로 회사를 쥐락펴락한다는 사실도 이번 경영권 분쟁이 터진 후에야 알려진 사실들이다. 그런데 이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총괄회장의 사생활과 롯데그룹의 성장사를 비교적 정확하게 적어놓은 책이 과거 출간됐다가 롯데그룹에서 이를 모두 사들이면서 화제가 됐던 책이 있다. 바로 경향신문과 중앙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던 정순태 씨가 쓴 ‘신격호의 비밀’이란 책이다. 신 총괄회장은 이 책이 나오자 롯데그룹 홍보담당 임원들을 크게 질책한 바 있으며, 롯데 측에서는 이후 책을 전량 수거했다. 하지만 책 출간 후 얼마 뒤 신 총괄회장의 부친묘소가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바 있었다. 그들은 경찰에 검거된 후 ‘신격호의 비밀’이란 책을 보고 범행을 계획했다고 밝혀 책이 다시 한 번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이 책은 현재 본국에서도 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데 당시 <선데이저널>이 책을 입수해 보관하고 있다가 이번 사태가 터지면서 다시 꺼내 들어봤다. 책에는 현재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부터 역대 정권과의 정경유착, 제2롯데월드 추진까지 현재 롯데그룹과 관련한 모든 얘기들이 담겨 있다. 본지는 당시 정 씨가 책에서 언급했던 내용 중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중심으로 해서 발췌해봤다. 1. 롯데그룹의 정경유착 최근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자 본국 언론에서는 롯데그룹이 성장하게 된 배경과 관련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박정희 정권 및 김영삼 정권과의 유착설이다. 실제로 롯데는 박정희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67년 한국 시장에 처음 진출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 걸쳐 엄청난 특혜를 받았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지금 롯데의 본부라고 할 수 있는 소공동 롯데쇼핑과 롯데호텔의 인허가를 받았다. 특히 롯데쇼핑은 4대문 안에 새로운 백화점을 인허가할 수 없다는 방침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10․26전 마지막으로 재가를 한 건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건립된 롯데월드는 우리나라 건축 역사에서 구청, 소방서, 시 본청, 건설부, 상공부, 재무부, 관세청 등 관계기관 공무원들이 모두 나서 적극적으로 지원한 전무후무한 예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과연 신격호 총괄회장은 어떻게 이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했고, 한국 진출 당시 특혜를 입었을까. 정 씨는 책에서 신 총괄회장이 박정희 정권에 특혜를 입게 된 배경으로 박태준 및 김종필 전 총리와의 인연을 꼽고 있다. 박태준 전 총리는 박정희 정권 시절 포항제철 회장을 맡을 정도로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였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책의 내용이다.
<신격호가 한일 양국의 재계뿐만 아니라 정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이 사진에는 신격호·하츠코 부부를 중심으로 좌우에 김대중, 나카소네, 김종필, 박태준 씨 등 거물 정치인들이 나란히 서 있다. 8년 후인 오늘날 그들의 위상은 한국의 대통령, 국무총리, 자민련 총재, 그리고 일본의 전 수상으로서 대(對)한국 막후 외교의 실력자다. 이것은 1990년 3월,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 ‘매직 아일랜드’ 개장식에서 테이프 커팅하는 모습을 담은 언론 보도 사진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예의 사진에 대한 캡션(설명)이었다. 즉, 사진 설명의 말미에 굳이 “김영삼 민자당 최고위원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소련을 방문 중이었다”고 부연해 놓은 것이다. 당연히 참석해야 할 사람이 못 왔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신격호는 일개 사기업의 행사에 한국의 미래 집권 수뇌부를 참석시킨 호스트인 것이다.”> <신격호는 YS와 매우 친밀했다. 전두환 정권의 5공 시절에도, ‘탄압받는 야당 총재’ YS는 호텔롯데에만 가면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당시 YS는 ‘돈 잘 쓰는 손님’이 아니었는데도, 그의 승용차는 으레 최고 VIP자리에 주차할 수 있었다. 이런 환대는 사소한 것 같지만, 한국적 풍토에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접대다. 1991년의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과정에서도 신격호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YS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전후해 박정희 정권은 일본에서 성공한 신격호의 모국 투자 유치에 적극적이었다. 당초 신격호는 정유 산업에 관심이 깊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신격호에게 제철·제강 산업에 투자할 것을 희망했다. 신격호는 제철소 건설을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철강 제련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이며 도쿄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재일동포 김철우 박사에게 3천만 엔의 용역을 주어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정부는 국가 기간 사업인 제철·제강 사업을 국영으로 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신격호는 제철소 건설의 주역 자리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과 최고위원을 지낸 TJ(박태준)에게 넘겨주었다.> <소공동 일대를 장악한 롯데에의 ‘특혜’ 사례는 호텔롯데가 처음 들어서던 70년대 말에도 드러난다. 1979년 3월 개관한 롯데호텔에 이어 그 해 11월에 롯데쇼핑(백화점)이 오픈했는데, 업계에서 나도는 얘기로는 롯데쇼핑 개점의 건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재가 사항 중 하나였다고 한다. 롯데가 반도호텔 자리를 인수한 것은 한국 진출 5년 만인 1972년. 신 회장은 이어 소공동 국립도서관과 중국음식점 아서원 자리를 매입, 호텔 롯데를 세웠다. 호텔롯데의 건립에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돈이라 할 수 있는 850억(1억 달러)이 투입되었다. 문제는 호텔롯데의 부대사업으로 추진된 롯데백화점에서 발생했다. 완공을 앞두고 허가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4대문 안에 백화점 신설 불허가 정부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직전 허가 사인을 했고, 명칭만은 백화점 대신 ‘쇼핑센터’로 붙이기로 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롯데쇼핑은 1979년 12월 17일 개점을 했다.> <신격호가 막대한 외자를 국내로 갖고 들어온 방식은 특이하다. 예컨대 호텔롯데를 지분을 일본 롯데가 100% 투자했지만, 당시의 관련 국내법상 외국인은 49% 이상의 지분 보유가 불가능, 경영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럴 경우 일본 대장성도 신격호의 한국 투자를 승인해 줄 수 없게 된다. 이 문제는 우여곡절을 거쳐 실로 기발한 아이디어에 의해 해결되었다. 즉 ‘재일교포 신격호’가 ‘대한민국 국민 신격호’에게 경영권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100%의 투자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당시 신격호가 한국 경제기획원과 일본 대장성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은 문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투자자 재일교포 신격호는 대한민국 국민 신격호와 합작하되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의 승인을 받은 원금 또는 과실 일체를 양국 정부의 승인을 받은 상환 계획표에 의거하지 않고 시설 투자와 사업 확장에 재투자할 수도 있다.” 이 때의 문건이 전례가 되어 신격호는 모국 투자에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게 된 데다 일본에 한푼의 과실송금을 하지 않고 한국 롯데를 계속 확장해 갈 수 있었다. 2. 롯데는 한국 기업인가? 일본 기업인가? 최근 경영권 분쟁일 벌어지면서 주목받는 사안이 롯데그룹의 국적 정체성이다. 롯데그룹이 성장을 하게 된 발판은 일본이었던 것이 맞지만, 현재 매출 규모로만 보면 한국 롯데가 일본 롯데의 14배 수준이다. 또한 한국에서 벌어들이는 돈에 대한 배당을 대부분 일본 롯데 쪽으로 가져가고 있다. 신격호 총괄회장을 비롯해 경영권 분쟁의 당사자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나 신동빈 한국 롯데 회장 역시 한국 보다는 일본인에 가깝다. 평소에는 일본말을 쓰며, 한글보다는 일본어를 더 정확하게 쓴다. 실제로 롯데는 그 성장 배경을 보면 한국보다는 일본 기업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흔적이 적지 않다. 책에서도 신격호 총괄회장이 일본 문화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음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신격호처럼 한·일 정치 실력자들과 두루두루 유대를 갖고 있는 재계 인사는 없다. 특히 그는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 역대 수상들과 깊은 교분을 유지해왔다. 그의 일본 파이프 라인은 아직도 막강하다. 일본은 누가 뭐래도 한국에 대한 최대의 채권국이다. 박정희 시대가 막을 내린 후 한·일 관계는 내리막길을 걸어 YS 시대 들어서는 최악의 상황으로 떨어졌다. 이런 때일수록 그의 존재 가치는 빛난다. 그는 일본 정계의 보수 본류(本流)와 기맥을 통하고 있다.(중략) 신격호라는 존재는 일본 정계·재계를 향한 ‘한국의 창구’라고 할 만한다.> <일본에서 신격호라 하면, 기시 노부스케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기시라면 1957년~60년, 일본 수상으로 재임했던 일본 정계 우파 본류의 거물이었다. (중략) 기시가 내각 총리 대신에 취임한 것은 1957년 2월 25일. 그보다 앞서 기시는 이시바시 단잔 내각의 외상으로 입각했다. 그 때부터 한일 국교 정상화의 깃발을 앞장서 들었던 만큼, 신격호가 기시에게 신뢰감을 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중략) 신격호는 기시와의 인간 관계에 의해 인재 등용 면에서도 수확을 거두었다. 일본 롯데에서 신격호 이외에 대표권을 가진 오직 한 사람이었던 마쓰이 지로를 영입했던 것이다. 세무 관료 출신인 마쓰이는 기시 파의 후계자였던 후쿠다 다케오 당시 대장성 대신의 추천으로 일본 롯데에 입문하여 전무·부사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그룹 고문으로서 신격호 사장을 돕고 있다. 후쿠다는 1929년 동경제대 졸업 후 대장성에 들어가 경제 관료로 엘리트의 길을 걸었고, 정계에 입문한 이후 중의원 의원 16선을 기록하면서 대장성 대신 등을 역임했는데, 신격호는 선거 때마다 상당한 정치자금을 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격호는 일본에서 ‘박정희 개발 독재’의 유력한 지지자로 활약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신격호는 일본에서 ‘한국 로비스트’라는 눈총을 받았다. (중략) 박 정권 하에서 한·일 경제 협력이 긴밀했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신격호는 한국인면서도 일본적 정서에 더욱 익숙한 인물이다. 그는 ‘오야붕·꼬붕’의 위계의식에도 철저하다. 예컨대 그는 고향의 별장에서 동생들과 식사할 때도 독상을 받는다고 한다. 일본의 정서는 오야붕에게 대든 꼬붕은 결코 믿지 않고 용서하지도 않는다. 흔히 오야붕의 비리를 아는 꼬붕이 종범으로 먼저 법망에 걸려들면 자살하는 경우도 드문 일이 아니다. 오야붕의 비밀을 무덤 속까지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법정 다툼까지 벌인 신격호-준호 형제의 진정한 화해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더욱이 비즈니스를 처리하는 신격호의 모습에는 일본적 정서를 물씬 느낄 수 있다. 그는 맺고 끊는 데가 분명하다. 만약 그가 그런 정서를 외면했다면 일본에서의 성공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했을 터이다.>
<동빈 씨는 1985년 6월 도쿄에서 일본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일본 굴지의 다이세이 건설 오고 요시마사 부회장의 둘째 딸 마나미 씨와 결혼했다. (중략) 결혼식에서는 후쿠다 전 수상이 주례를 하고, 나카소네 현직 수상이 축사를 하며, 기시 전 수상을 비롯한 일본 정·재계의 거물들이 대거 참석했다. 특히 재계 총리라고 일컬어지는 경단련 회장 이나야마 씨는 축사를 통해 “일본이라는 나라가 생긴 이래 오늘 시게미쓰 가문의 결혼식처럼 화려하고 성대한 예식은 황실을 제외하고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격호가 차남의 결혼식에 쓴 돈은 무려 1백억 엔으로 추산되었다. 일본 전국 곳곳의 일류 요리라면 모두 결혼식장으로 날라다 하객들에게 여흥을 곁들여 대접한 초호화판 일본 전통적 혼례식은 장장 7시간에 걸쳐 거행되어 대단한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신격호는 일본의 귀족 계급과 혼맥을 맺어 일본의 상류사회로 진입하는 의식을 이벤트화 함으로써 그에 따른 홍보효과나 부가가치를 겨냥했던지로 모른다.> 3. 예고된 경영권 분쟁 형제들과의 분쟁을 겪은 신 총괄회장은 자식들 간의 경영권 분쟁을 사전에 막기 위해 형제간 역할 구분도 비교적 분명히 했고, 지분도 어느 한쪽에 쏠리는 것을 막았다. 또한 두 형제에게는 한국과 일본 롯데를 맡기는 대신, 신동주·동빈 형제와 배다른 남매인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이나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에게 미리 지분이나 사업을 떼어줘 재산 분쟁을 사전에 막고자 했다. 신 총괄회장이 이같은 조치를 한 것은 경영권 분쟁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사전에 예감했기 때문이다. ‘신격호의 비밀’에는 신 총괄회장의 이런 고민이 잘 드러나 있다. <두 사람은 한 살 터울의 형제지간이지만, 성향과 기질은 사뭇 다르다. 동주 씨는 온순하면서 다소 방어적이고, 동빈 씨는 냉철하면서 매우 공격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수년 전까지만해도 한국 롯데는 장남 동주 씨가, 일본 롯데는 차남 동빈 씨가 승계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유력했다. 그러나 차남 동빈 씨가 한국 롯데그룹의 부회장으로 승진한 1997년 이후에는 장남·차남 역할이 뒤바뀔 것이라는 관측이 나돌고 있다. 동빈 씨는 부회장 취임 이후 한 달에 2~3차례씩 서울을 방문하여 그룹 임직원들을 만나 관련 업무의 보고를 받는다. 호텔롯데에 차려 놓았던 간이숙소를 없애고, 서울 동부 이촌동에 아파트까지 마련했다. 줄곧 일본에 체류했던 그가 휴계 준비를 위한 한국 상륙을 본격화한 모습이다.> <롯데그룹 일부에서는 동빈 씨가 한국 롯데의 후계자로서 부적당한 인물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동빈 씨가 “일본 왕실과 관계된 일본 유력 기업가의 딸을 부인으로 맞는 등 일본화된 인물”이며 “한국 롯데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데도 한국말을 제대로 못하고, 한국인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신격호는 전통적 장자 상속의 관례에 따라 장남 동주 씨에게 한국 롯데를 승계시키고, 일본 여성과 결혼한 차남 동주 씨에게는 일본 국적을 가지게 함으로써 이론 롯데의 후계자로서 운신의 폭을 넓혀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신격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우 건강한 편이다. 그는 칼자루를 놓지 않은 채 앞으로 상당 기간 한일 롯데그룹에 대한 친정체제를 계속할 것 같다. 아직은 장남과 차남에게 일정한 재량권을 주어 능력과 적성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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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공개 와이드 특집2>1997년 발간 ‘신격호의 비밀’로 본 롯데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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