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호 발행특집>뉴욕부동산 성공신화 우영식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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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영식

한인부동산업계의 신화로 일컬어지는 우영식 영우앤어소시에이츠 사장은 1953년4월생으로 한국나이로 올해 63세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모님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온뒤 서울에서 우사장을 낳았고 12살때인 1965년 파라과이로 이민을 갔다. 지금으로 부터 50년전이니 남미이민 초창기에 태평양너머 타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것이다. 그뒤 아르헨티나로 옮겼고 1972년 19살때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붕정만리, 먼 길을 떠나게 된다.
아메리칸드림을 향한 머나먼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입국비자를 얻기 위해 아르헨티나 주재 미국영사관에 갔지만 미국에 눌러앉을 가능성이 크다며 비자를 거절당했다. 친지들에게 걸어서 맥시코국경을 넘겟다는 비장한 각오를 유언처럼 전하는 순간 그의 손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매형의 아르헨티나인 친구였다.
현지인친구는 ‘절대로 밀입국해서는 안된다’고 충고하고는 그의 손을 이끌고 미국영사관에 가서 자신이 보증을 서며 미국비자를 받아줬다. 구세주였다. 또 ‘미국에 가거든 마이애미에 있는 내 친구 식료품점 가게로 찾아가서 일자리를 달라고 하라’고 당부했다. 우사장은 마이애미에서 수소문해 매형친구의 친구를 찾아갔지만 ‘이 동네에 동양인은 너 혼자뿐이니 일을 시키고 싶어도 불법체류자임이 들켜서 잡혀갈 수 있으니 안된다. 차라리 뉴욕으로 가라’며 버스표를 사줘서 뉴욕으로 왔다는 것이다.
우사장은 뉴저지 어빙턴에 도착해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그의 첫 직장은 유태인 운영하는 푸줏간이었다. 매일 죽도록 소고기, 돼지고기를 칼로 내리쳐가며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돼야 겨우 몇푼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모았다. 몇달간 모은 얼마간의 돈을 들고 뉴욕으로 갔다. 자신의 목표는 공부였기 때문이다.  NYU랭귀지스쿨에 등록했다. 밤에는 학교에 다니고 낮에는 택시운전을 했다. 택시, 트럭 닥치는 대로 몰았다. 그리고는 세계적인 디자인학교인 플랫인스티튜드 건축과에 진학했다. 그렇지만 학비를 벌기 위해 택시운전을 계속했고, 친구와 그래머시팍의 스트릿마켓에서 야채를 팔기도 했다. 남는 시간에는 당시 맨해튼에서 몇안되는 한국식품점에서 배달일을 했다. 이른바 야채가게 종업원, ‘야돌이’다. 쌀이 너무 무거워 쌀배달이 가장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때 식품배달을 하러 갔다가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고 하니 가슴찡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대학 3학년때는 은퇴한 건축사의 라이센스만 빌려서 조그만 건축사무소를 연뒤 한국식당, 식품점, 치과등을 찾아다니며 자그만 인테리어설계등을 따냈다. 하지만 야속한 것이 세상이었다. 당시 한인사회는 너무 좁아서 한사람 건너면 모두 알 정도 였고 정식건축사가 아닌 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마음에 들때만 돈을 주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 45 WEST 33RD ST, NEW YORK. NY

그러다가 그는 대학졸업반이던 1979년 결정적으로 진로를 바꾸게 된다. 건축설계사가 되기 보다는 부동산을 사서 돈을 벌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그 길로 지금은 세게적인 코리아타운으로 자리잡은 맨해튼32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일대의 적당한 건물을 찾으러 다녔다. 20여개의 건물을 본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바로 뒷편의 건물을 골랐다. 45 웨스트 33스트릿. 6층건물이었다.
불과 3개월전 유태인이 40만달러에 산 건물이었지만 우사장은 80만달러를 주겠다며 내게 팔라고 했다. 주인이 50만달러 오너모기지를 제안했기 때문에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30만달러만 있으면 된다. 그러니 비싸건 싸건 내가 지금 줄 돈은 적으니 덜컹 산다고 한 것이다. 마침 다른 투자자 2명과 자신의 가족이 각각 10만달러씩을 내고 모기지 50만달러를 합쳐 1980년 1월 그 건물을 사버렸다.
뉴욕등기소확인결과 이 빌딩을 매입한 사람은 우영식사장, 우충선 전 충주비료 사장, 야곱 펄씨등 3명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5만달러를 들여서 건물을 보수한뒤 불과 1년이 채 안돼 이 건물을 180만달러에 되팔아 백만달러 수익을 올렸다. 종잣돈을 마련한 것이다.우사장이 건물을 살때가 27세, 1980년1월이었으니 맨해튼 코리아타운일대에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은 장용호 전 YH무역사장이 사실상 유일했다. 장사장이 1972년 맨해튼 32가에 부동산을 매입했고 우사장이 2번째 정도일 것으로 그는 매우 젊은 나이에, 또 한인으로서는 아주 일찍 부동산을 소유한 셈이다.

 ▲ 655 6TH AVE, NEW YORK. NY

등기소 확인결과 우사장은 1981년 5월 576 6 애비뉴의 건물도 매입한  것으로 확인되는등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매년 약 2채의 건물을 사고 팔고 하면서 부동산에 눈을 떴다, 특히 부동산 1채를 사기 위해 평균 80채의 매물을 볼 정도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매입했다고 한다. 그가 처음으로 큰 건물을 산 것은 1985년으로 맨해튼 655 6애비뉴로, 23스트릿인근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23가가 그와는 인연이 깊다, 스카이가리지가 24가, 첼시아트센트도 25가, 자신의 관리하는 데이터센트도 25가에 있다. 이 건물을 사고보니 13명의 예술가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당시 ‘예술가주거법’으로 보호받고 있어서 쫓아낼 방법이 없었다. 가까스로 이들을 설득하고 돈을 조금 주면서 내보낸뒤 보수공사를 했고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렌트비를 받는 건물로 변모시켰다. 건물을 사서 보수하면 큰 돈을 벌 수 있음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 이 건물은 후일 일본인 투자가에게 약 750만달러정도에 팔리면서 한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이처럼 부동산을 사고 팔면서 적당한 장소와 적당한 물건을 고르는 안목을 키웠고 독특한 디자인과 증개축을 거쳐서 렌트비를 올리거나 되파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현재도 부동산관리와 증개축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사장이 1979년 부동산업체를 설립했으니 이제 36년, 자리도 잡고 인정도 받았지만 그의 시작은 역시 미미했다. 택시운전으로 고학을 하면서도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오늘의 그가 있는 것이다. 그의 인생도 특별한 성공비결은 없었다. 그저 큰 뜻을 품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이민자들의 성공비결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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