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해사건 직후
최씨 극비리에 일본 출국
美ㆍ日 협조 묵인하에 진행
지난 1979년 박정희 전대통령 시해사건직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손윗동서인 최세현 당시 주일공사가 일본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것은 미국과 일본의 협조내지 묵인에 따른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정부는 최씨가 사라진 뒤 한달보름간 소재파악을 하지 못했고, 이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최씨의 소재를 모른다고 한국측에 답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미국과 일본이 박정희 전 대통령시해사건의 범인인 김재규측에 심정적으로나마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나 최소한 동정적인 시각을 가졌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 공교롭게도 한국정부는 1973년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중정요원 윤영로를 박대통령시해사건직후 주일한국대사관에 참사관으로 파견, 물의를 일으킴으로서 일본측에 최공사의 소재파악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못하고 오히려 윤씨에 대한 일본측의 항의를 막는데 급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중정이 윤씨의 일본파견을 결정한 것은 시해사건 10일전인 김재규 재임당시로 밝혀져, 김재규가 어떤 의도를 물의를 빚을 것이 뻔한 윤씨를 파견했는지, 혹시 김재규가 이때 이미 박정희제거를 결심하고 의도적으로 박정권을 궁지로 몰려했는지, 그 의도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안치용(시크릿 오브 코리아 편집인)
지난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30분경, 서울 궁정동의 구중심처에서 총소리가 울렸고, 이 총소리는 박정희 18년 철권통치의 종식을 알리는 외침이었다. 박정희 전대통령을 사살한 범인은 권력의 핵심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전두환이 이끄는 이른바 합수부는 12,12를 통해 대통령의 재가없이 정승화 계엄사령관까지 연행, 수사하는 등 김재규의 주위를 샅샅이 뒤져 수사했지만 단 한사람은 수사하지 못했다. 바로 그 사람은 김재규의 손윗동서인 최세현이다. 미국 프린스턴대 심리학박사 출신으로 알려진 최씨는 미국에서 귀국,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다 1979년 2월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인 김정렴이 주일대사로 임명된 직후, 주일대사관 2인자인 주일공사에 발령받았다. 최씨는 공사직함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일본내 정보업무를 총괄하는 중앙정보부 총책임자였다. 김재규의 복심으로 불리던 최씨는 시국수습방안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 김재규에게 은밀히 전달할 정도로 측근중의 측근이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최씨를 조사해야 했지만 합수부는 최씨를 조사하지 못했다.
10.26 사건 50일만에 증발
당시 한국에 있어 미국 못지않은 중요성을 지낸 국가가 일본이며 정보활동이 활발한 곳이 일본이었다. 특히 1977년부터 1978년 코리아게이트 청문회를 거치면서 미국측이 미국내 중정요원의 대폭 축소를 요구하면서 중정의 미국내 활동은 사실상 올 스톱됐기 때문에 중정의 최대 해외거점은 바로 일본이었다.
이 일본에서 중점 거점장으로 활동하던 최씨는 박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한지 약 50일만인 1979년 12월 8일 일본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최씨가 최후로 목격된 장소는 일본 동경 이케부꾸로의 다이이찌호텔이다. 이 다이이찌호텔에서 홀연 최씨가 사라지자 주일한국대사관은 물론 한국이 발칵 뒤집혔다.
외무부는 주일한국 대사관은 물론 주미대사관등 외교채널을 총동원, 연기처럼 사라진 최씨의 소재확인에 나섰지만 약 한달보름동안 최씨의 출국경위를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보요원으로서는 초자에 가까웠던 최씨는 귀신처럼 나타나고 귀신처럼 사라진다는 신출귀몰의 주인공이 된 것이며 한국정부는 닭 쫓던 개신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최씨는 귀신처럼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바로 미국과 일본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한국의 추적을 따돌리고 유유히 일본을 떠났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미국과 일본은 최씨가 일본을 떠난 뒤에도 최씨의 소재와 출국경위를 묻는 한국정부에 사실을 알리지 않고 최씨를 보호했으며 특히 일본정부는 최씨와의 사전 묵계에 따라 행동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미일 양국이 박정희 시해사건이후 김재규측에 우호적 시각내지 최소한 동정적이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한국정부가 공개한 비밀외교전문에 따르면 한일간에 최씨문제가 처음 대두된 것은 1979년 12월 18일로 밝혀졌다. 바로 이날 일본 법무성이 주일한국대사관측에 ‘최공사가 12월 8일 다이이찌호텔에서 행방불명됐다.
한국측이 소재를 파악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뜻을 밝혔다. 특히 법무성은 ‘행방불명이유를 첫째, 망명, 둘째, 반체제인사들에 의한 납치, 세째 자결 등으로 추정한다며, 김재규와 동서지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더욱 관심이 크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사실 합수부가 최씨를 한국으로 송환해 조사하지 못한 것도 최씨를 자극할 경우 일본등에 망명해 한국정부를 공격할 경우 큰 문제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혹시라도 망명할까 노심초사하는 가운데 일본정부 망명가능성 운운하니 한국은 크게 당황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최씨 소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한국정부, 최씨 증발에 우왕좌왕
이에 따라 이틀 뒤인 12월 20일 주일한국대사관은 일본 외무성에 최세현 공사가 12월 12일자로 면직됐으며 출국했다고 문서로 공식통보했다. 그리고 주일대사관은 외무부에 미국정부에 알릴 필요가 있는지를 물었고, 알리라는 지시에 따라 12월 26일 주일미국대사관에 최씨가 외교관 신분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구두통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당시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 최씨가 출국했다고 통보하고도, 실제로는 출국경위는 물론 출국여부도 확인하지 못하고 허둥됐던 것이다.
한국정부가 최씨 면직과 출국사실을 통보한지 일주일만인 1979년 12월 27일 일본 외무성관계자는 주일대사관측을 면담한 자리에서 ‘최근 최공사가 소재불명이라는 기자들의 질문이 있다’며 최씨의 소재에 대해 문의했다. 이때 한국측은 최공사가 사의를 표명해 12월 12일자로 면직발령돼 일본을 떠났으며 이를 12월 20일 외무성에 문서로 통보했다고 답변했다.
이 비밀전문에 따르면 당시 한국측은 해임과 출국사실만 언급했을 뿐 출국일자는 명시하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외무성측은 최공사가 언제 일본을 떠났는지, 가족도 같이 출발했는지, 가족은 언제 출발했는지 등을 물었고, 한국측은 최씨의 일본 출국일자를 모르겠으나 한국귀국에 앞서 미국으로 간 것으로 알며, 가족도 약 1주일전에 미국으로 떠났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은 최공사가 일본의 적극적 협조하에 출국했지만 일본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한국측이 얼마나 알고 있는 지를 탐지하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정부는 일본이 계속 최공사의 소재를 문의함에 따라 자칫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다고 판단, 1980년 1월 9일 주일미국대사관 관계자를 만나 최씨의 비자발급여부 등을 문의했다. 주일미국대사관은 ‘1979년 4월이후 최공사에게 미국비자를 발급한 사실이 없으며 최공사 사직을 전후해 최공사가 미국대사관에 온 사실도 없다. 다만 최공사 가족인 부인과 딸에게는 비자를 발급했다’고 답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은 사실관계를 답변했을 수도 있지만 정확히 답변한다면 4월이전에 미국비자를 발급했다면 언제까지 유효한지 등을 답변했어야 한다. 얼렁뚱땅 핵심을 피해서 답변했고, 자칫 미국으로 가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오리무중이었던 것이다.
일본정부 출국사실 비밀에 붙여
바로 그 다음날인 1월 10일 일본 법무성은 또 다시 연막을 피운다.
출국기록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정규절차를 밟지 않고 출국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날 법무성은 주일한국대사관 관계자에게 최씨가 미군기지에서 군용기편으로 출국했거나, 대사관이 일본 모르게, 어떤 방법으로 미국으로 가게 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법무성은 다만 최공사부인등은 12월 20일 정규절차를 밟아서 출국했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한국측은 최공사가 미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듣고 있다며, 출국기록이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으며 대사관측이 주재국, 즉 일본이 모르게 미국으로 가게 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답변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1월 16일 일본측은 자신들의 조사결과 일부를 한국에 통보했다. 일본측은 출입국당국이 1979년 12월 12일부터 20일까지 일본의 모든 국제공항의 출국기록을 조사했으나, 출국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1979년 12월 22일 주일한국대사관 주변에서 최공사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정보에 따라 12월 21일부터 22일까지 모든 국제공항 출국기록을 확인했으나 역시 기록은 없었고, 12월 23일부터 27일까지는 나리타와 오사카, 후쿠오카등 3개공항을 조사했으나 출국기록이 없다고 밝혔다. 일본측은 이처럼 출국기록이 없기 때문에 최공사가 현재 일본에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고 통보하며 출국했다면 출국일자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외교관의 출국일자, 출국방법은 당연히 주재국에 알려야 한다는 이유였다. 연막을 피우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한국측을 추궁하고 나선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주일대사관은 한국 외무부에 그동안 다방면으로 출국일자와 출국편 확인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며 본부에서도 출국일자를 빨리 확인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외무부는 중앙정보부에 ‘최세현공사 면직관련사항 조회’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1980년 1월 22일자 외무무장관이 주일대사에게 보낸 공문이 발견됐다. 이 공문은 특이하게도 손 글씨로 보류라고 적혀 있고, 공문전체에 사선이 그어져 있었다. 바로 이 공문이 한국정부가 최공사 출국사실을 어렴풋이나마 확인한 내용을 담고 있고, 미국과 일본의 협조가능성을 의심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아마도 미일양국의 협조가능성을 언급했기에 비밀전문을 보내려다 혹시라도 유출됐을 경우의 문제를 고려, 보류한지 모른다.
이 공문은 ‘주미한국대사관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최공사는 1979년 12월 8일부터 12월 17일 사이 일본을 떠난 것으로 판명됐고, 한미 이중국적 소지자이며, 동경에서 일본과 미국의 협조를 얻어 출국에 필요한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임’이라고 적고 있다.
미 시민권 회복신청으로 알려져
또 같은 날 외무부장관은 주미대사에게 최세현 일본출국관련 보고를 하라고 요청했고 다음날인 1월 23일 주미대사가 상세한 상황을 외무부장관에게 보고했다. 주미대사는 ‘박건우 참사관이 1월 17일 블랙모어 한국과장대리에게 최씨의 일본출국일자 등을 문의했고, 1월 23일 리치 한국과장이 출국과 입국사실을 통보했다는 것이다. 미 국무부는 ‘최씨가 과거에 미국시민권을 취득한 적이 있으며, 지난주 뉴욕지역 미 이민국에 다시 미국시민권 회복신청서를 제출함에 따라 현재 미국에 체류하고 있음을 알게 됐고, 시민권회복신청서에 주일한국대사관 공사직에 취임함에 따라 미국시민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영어로 이 부분을 FORCED TO GIVE UP’ 이라고 표기했다. ‘강제적으로 포기토록 했다’는 뜻이 된다. 미국측은 이 신청에 따라 수개월내에 미국시민권을 회복할 것으로 전망된다는 견해도 밝혔다. 최씨의 미국입국이 확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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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미국 도착 8개월 후 아사히신문 단독 인터뷰로 포문
‘신군부는 나를 납치하려 윤영로를 급파했다’
이때 한국측은 무릎을 탁 치게 된다. ‘미일 양국이 짜고서 한국을 속였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날인 24일 외무부장관은 주일대사에게 최씨의 미국체류사실을 일본측에 알리되, 일본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며, 일본이 모르게 출국할 수 없으므로 일본측이 조사를 해서 출국일시, 출국지점, 소지여권을 알려달라고 요청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의 분석은 적중했고 적중할 수 밖에 없었다, 1월 25일밤 주일대사가 외무성 아주국장에게 미국에 있지만 출국일자를 알지 못한다고 하자 일본측은 12월 12일 이전에 출국한 기록을 확인했다고 답한다. 그리고 이제는 확인됐으니 더 알아볼 필요가 없다는 친절한 조언도 했다는 것이다.
외무부가 작성한 ‘전 주일 최세현공사 일본출국일자 확인’이라는 문서에 따르면, 주일대사관은 1월 26일에 외무성으로 부터 최씨는 1979년 12월 8일 브리티시에워에이편으로 일본에서 출국했다는 통보를 받은 것으로 돼 있다. 동경 나리타공항에서 12월 8일 오후 9시 30분, 브리티시에어웨이 006편에 탑승, 앵커리지를 경유해 런던으로 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최씨는 12월 8일 다이이찌호텔에서 행방불명된 뒤 바로 그날 밤 미국과 일본의 협조로 일본에서 유유히 출국한 것이다. 일본은 12월 8일 최씨가 행방불명됐다는 사실을 한국측에 통보하고서도 12월 8일이 아닌 12월 12일부터의 출국기록만 뒤지면서 출국기록이 없다고 연막을 피운 것이다. 이제 한국측이 항의할 차례다. 하지만 이 또한 일본의 계산속에 있었다. 한국이 뒤늦게 항의하면 어떻게 대처할까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 대처방법은 다름아닌 언론에 이같은 사실을 흘리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측에 최공사 출국일자를 통보한지 닷새만인 1980년 1월 31일 아사히신문이 14면 박스인 ‘뉴스삼면경’에 최공사 출국사실을 실었다. 아사히 신문은 ‘일본을 조용히 떠난 또 한명의 한국외교관이 있다, 정보담당 최세현공사다. 최공사는 박대통령을 사살한 김재규의 동서로 지난해 2월 11일부로 일본에 부임했다.
영문도 모르는 한국정부 뒷북
김재규사건이후 최공사는 대사관에 얼굴을 내지 않고 자택에 틀어박혀 있었고 소재불명이라는 소문조차 번졌으나 지난해 12월 12일자로 해임명령을 받았다. 최세현은 해임을 기다린 것처럼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을 향해 은밀히 일본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아사히 신문이 보도하자 2월 2일에는 마이니찌가 이어받았다. 1보를 놓친 마이니찌는 아사히보다 한발 더 나갔다. ‘주일한국대사관 공사 미국에 망명했나’라는 보도를 내보낸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한국측은 일본측에 왜 속였느냐는 항의도 하기 전에 언론보도를 해명하는 데 혼이 바지게 된다.
그다음은 일본 의회였다. 중의원에서 질의가 터져나왔다. 1980년 2월 5일 한의원이 중의원질의를 통해 이후락 망명설과 함께 ‘최세현공사가 부하로 보이는 안창식, 박경진등 2명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며 사실여부를 외무성에 질문했고 한국측은 외무성에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실제로도 두 사람은 최씨와 동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또 언론이 이를 보도하는 식이었다. 2월 6일 아시히신문은 다시 뉴스삼면경에 이를 보도한 것이다. 이후락이 신군부 출연 뒤 홀연히 한국을 떠났는데 망명이냐며 질의한 것을 대서특필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은 일본 외무성에 농락당한 뒤, 일본언론과 일본의회의 추격을 받았던 것이다.
최씨가 미국과 일본의 협조를 받았다는 것은 공교롭게도 또 다른 한국외교관과 관련된 문제를 통해 더욱 명확해 진다. 1973년 8월 일본 동경에서 대낮에 발생했던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일본경시청은 이 사건에 한국인 6명이 관련됐으며 이중 지문이 발견된 주일한국대사관 김동운 1등 서기관외에 김서기관의 상관인 주일한국대사관 중정요원 윤영로 참사관도 관련자로 지목했었다.
바로 이 윤영로 참사관이 박대통령 시해사건 직후인 11월 8일 주일한국대사관에 부임한 것이다. 윤씨는 일본에서 발생한 납치사건에 관련됐으므로 일본이 알면 외교분쟁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인물이다. 이같은 위험을 감수하고 한국정부가 윤씨를 일본에 보낸 것은 그만큼 시급하게 일본내 중정 정보활동을 다잡아야 할 이유가 생겼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중정책임자는 박대통령시해사건범인인 김재규의 손윗동서 최세현, 그러므로 사건직후 최씨는 무력화됐을 뿐 아니라 합수부의 수사대상에 올랐기 때문에 중정활동은 사실상 마비됐고 최씨를 더 이상 그 자리에 둘 수도 없었다. 그래서 윤씨를 파견했던 것일까.
DJ납치사건 관련자 윤영로 일본에 급파
‘아니나 다를까’ 윤씨가 부임한지 1개월이 지난 12월 10일 일본 외무성은 김대중납치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지목된 3명중 한명을 일본에 다시 파견했다며 항의했다. 1973년 당시 일본정부가 가지고 있던 기록과 11월 나리타 입국시의 인적사항, 주일한국대사관이 외무성에 부임 통보한 인적사항 등이 정확히 일치하는 동일인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다음날에도 항의는 이어졌고 이 같은 사실은 외무부본부에 보고됐다. 12월 13일 외무부는 윤씨에게 일시 귀국지시를 내렸고, 윤씨는 14일 오전 8시 55분 노스웨스트편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만다. 윤씨는 1972년 3월 20일부터 1976년 1월 15일까지 3년10개월을 근무한 베테랑이며, 중정에서 일본담당 부국장으로 근무하던 인물이다. 최공사를 출국경위를 일본측에 추궁하려던 한국정부로서는 복병을 자초한 셈이다. 공세는 고사하고 수세로 몰린 것이다.
일본정부는 첫째, 1975년 7월 31일 일본사회당 도이 다까꼬의원이 중의원 외무위에서 윤씨의 가담사실을 거론했고, 둘째 1977년 2월 12일 문명자가 김형욱을 인용, 윤씨의 가담을 폭로했고, 셋째 1977년 6월 22일 김형욱이 프레이저청문회에 출석, 납치관련자 리스트를 제시했고, 넷째 김형욱이 NHK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납치 때 ‘하다나까 긴지로’라는 이름으로 동경 그랜드 팔레스호텔에 투숙한 인물이 윤참사관이라고 밝힌 점 등으로 미뤄, 일본에 입국한 이상 임의청취형식으로 조사가 불가피하다고 몰아세웠다.
그리고 12월 24일 일본경시청이 외무성을 경유, 윤씨에 대한 임의청취 필요성을 공식통보했고 한국측은 1980년 1월 5일 불가입장을 정식 통보했다. 그러다가 윤씨는 3월 1일자로 일본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이임했다고 3월 8일 외무성에 문서로 통보하게 된다. 즉 윤씨는 11월 8일 일본에 왔다가, 12월 10일 항의를 받고 14일 한국에 귀국했으며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3월 1일자로 이임발령을 받은 것이다. 일본에 한달 남짓 근무하고 문제가 발생해 떠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윤씨는 누가 일본으로 보냈을까, 11월 8일 부임했다는 사실만 살펴보면 김재규실각이후 합수부등에서 일본내 중정조직은 물론 최공사를 장악하기 위해 외교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급거 파견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외무부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윤씨는 1931년 1월 5일생으로 외무부는 1979년 10월 16일 중정으로 부터 윤씨를 주일대사관에 외교관으로 임용하라는 공문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
그 뒤 10월 18일 외무부는 총무처에 임용을 제청했고 11월 1일 주일한국대사관 참사관으로 발령을 냈고, 11월 5일 이를 중정 및 주일대사관에 통보했고 11월 6일 부임일자가 11월 8일로 정해졌고, 11월 8일 부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통 윤영로의 일본발령은 늦어도 박대통령 시해사건 10일전에 결정됐기 때문에 김재규의 결심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외무부 문서가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김재규가 보낸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같은 문서는 정부내의 내부문서로 쉽게 조작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일 협조로 유유히 일본 빠져나가
만일 김재규가 윤씨를 다시 일본으로 보냈다면 자신의 동서를 보좌하기 위해 일본통을 보낸 것으로 불 수 있다. 그렇더라도 외교적 분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다분한 인사인 점을 감안하면 김재규가 한‧일간 외교분쟁으로 박정희 정권을 곤란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분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김은 적어도 시해사건 10일 이전부터는 박대통령에 대한 어떤 조치를 염두에 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이 문서가 조작됐고 윤씨가 박대통령 시해사건이후 신군부에 의해 임용제청등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11월 1일 발령을 내고 8일 부임했다면 신군부가 최씨와 중정활동 장악을 위해 문제가 있는 일본베테랑을 파견하는 무리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윤씨사건이 최씨가 미일양국의 협조를 받아 일본을 떠났다는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는 최씨 자신의 기자회견을 통해 밝혀지며, 그 기자회견내용은 사실관계에 정확히 부합한다, 즉 결과적으로 미국과 일본이 한국 몰래 최씨의 출국에 협조했음이 입증된다. 최씨는 미국 뉴욕인근에 정착한지 약 8개월만인 1980년 8월 17일 포문을 열었다.
문명자의 주선으로 아사히신문과 단독인터뷰를 한 것이다. 이 인터뷰에서 최씨는 박대통령 암살사건직후 서울에 돌아가면 끝장이라고 판단, 곧바로 미국망명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서류의 처분 등 비밀리에 망명준비를 진행, 기회를 보아오던 중 11월에 김대중납치사건 당시의 중정요원이던 윤영로가 참사관으로 일본에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내각조사실로 부터 ‘농담이 아니다, 어째서 사건의 범인이 동경에 부임할 수 있는가’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망명결행준비로 골치가 아팠던 최씨는 ‘나도 곧 서울로 간다, 문제로 삼는 것은 내가 일본을 떠난 뒤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실제 일본 외무성이 윤씨 문제를 주일한국대사관에 항의한 것은 1979년 12월 10일이다. 최씨는 이틀 전인 12월 8일 일본을 떠났다. 일본정부가 정확히 최씨의 요청을 받아들여 최씨가 일본을 떠난 뒤 윤씨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한 것이다.
미국, 위험 무릅쓰고 최씨 도피 도와
그렇다면 이는 일본정부가 최씨의 요청을 모두 수용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처음부터 최씨와 공모, 최씨가 한국에 송환될 것을 우려해 일본을 출국, 미국으로 보내고는 한국측에는 한달반동안 이를 숨긴 것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주일미국대사관도 최씨의 출국을 묻는 한국측에 비자를 발급받은 사실이 없다는 식으로 연막을 쳤다. 그리고는 최씨가 미국에 안착한 뒤 시민권회복신청을 준비, 서류를 접수시킨 일주일 뒤에야 이를 한국측에 알림으로서 최씨에게 협조했음이 분명하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측의 항의가 있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수사선상에 올라 있는 박대통령 사살범인 김재규의 손윗동서를 미국으로 빼낸 것이다. 특히 단순항의가 아니라 김재규에 우호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도 많았음에도 이를 감행한 것은 미일 양국이 심정적으로 김재규에 동조했거나 적어도 동정적 입장을 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하나, 외무부가 공개한 윤영로 발령관련 제반일자는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김재규가 자신의 동서의 부하로 누구를 파견한다면 사전에 동서인 최씨에게 협의했을 가능성이 100%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씨는 8월 기자회견에도 윤씨가 일본으로 되돌아와서 당황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이는 사전에 김재규로 부터 윤의 파견에 대한 말을 듣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10월 16일, 즉 박정희 시해사건이전에 중정이 윤씨 임용공문을 보냈다는 외무부 문서는 사실이 아닐 개연성이 큰 것이다.
그렇다면 합수부등 신군부가 일본내 중정활동을 방치할 수 없기 때문에 김대중납치사건 관련인물을 파견하는 무리수를 범했고, 결국 이 같은 무리수가 최씨가 미국과 일본의 협조를 받아 일본을 유유히 떠나는 결과를 자초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