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 카스트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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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만이 나를 무죄 선고하리라”

피델-카스트로

▲ 피델 카스트로

“세계가 무엇이라고 하던, 역사는 나를 무죄 선고하리라” (La historia me absolverá)
이 말은 쿠바의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피델 카스트로가 한때 대학생 운동 시절 반정부 활동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으면서 최후진술로 남긴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은 1960년대 당시 박정희 군사 독재 시절 서울대 운동권 학생들이 애송하던 문구였다. 이 피델 카스트로가 추수감사절 다음날인 25일 ‘블랙 프라이데이’에 90세로 사망했다. 그에게는 선견지명도 있었다. 1973년에 그는 “미국에 흑인 대통령이 생기고, 바티칸에 남미 출신 교황이 생기면 미국이 우리와 대화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처럼 버락 오바마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최초의 남미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카스트로가 말한 그대로 지난 2014년 쿠바와 미국이 관계를 개선했다. 앞으로 한국-쿠바도 조만간 국교가 트일 것으로 보인다.
성 진 (취재부 기자)

카스트로의 죽음이 알려지자 LA와 마이애미의 쿠바계 미국인들은 거리로 나와서 환호하며 축제를 벌였다. 인터넷상에서 피델 카스트로는 “미국이 무너질 때까지 난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연설하기도 했는데, 그도 사람이 가는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6일 백악관 성명을 통해 “역사가 그를 판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역사는 한 인물이 그의 주변 사람들과 전 세계에 미친 엄청난 영향을 기록하고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늘 우리는 피델 카스트로의 가족들에게 애도를 보내고 쿠바인들을 위해 기도한다”며 “앞으로 우리는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미래를 바라볼 것이다. 쿠바인들은 미국에 그들의 친구와 파트너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성명에서 “전 세계는 자국민을 거의 60년간 억압했던 야만적인 독재자의 타계를 목격했다”며 “피델 카스트로의 유산은 총살형과 절도, 상상할 수 없는 고통, 가난, 그리고 기본적인 인권의 부정이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쿠바가 여전히 전체주의 체제의 지배를 받지만, 카스트로의 타계는 (쿠바인들이) 너무 오랫동안 참아야 했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되며, 훌륭한 쿠바인들이 마침내 마땅히 가져야 했던 자유 아래에서 살 수 있는 미래로 이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애도를 표명했다. 교황은 이날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에게 보낸 조전에서 카스트로의 사망을 “슬픈 소식”이라고 표현하며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내 슬픔을 전한다”고 밝혔다. 유럽 각 국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애도의 뜻을 나타내며 카스트로를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했다.

한편 한국 외교부는 카스트로의 사망에 대해 파격적으로 ‘서거’라는 표현을 사용해 쿠바에 긍정적 신호를 보냈다. 수교를 모색 중인 한•쿠바 관계에 청신호를 보낸 것으로 보여 귀추가 주목된다.

북한의 김정은도 조전을 보냈다. 생전의 카스트로는 김일성을 ‘의형제’로 불렀고, 양국은 “맹방”으로 부르고 있다. 그래서 쿠바와 오랜동안 우방관계였던 북한은 28 ~ 29일 조기 게양을 하며, 3일 동안 애도기간을 가졌다.
한편 최근 쿠바는 한국과의 수교를 신중히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쿠바 수교 임박

20세기 중반 쿠바에서는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다. 군인 출신의 바티스타는 1940년 대선에 나와 한 차례 집권한 뒤 물러났으나, 1952년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바티스타는 독재자의 전횡인 언론과 의회를 통제하고 대학생들의 반대운동을 억압해나갔다.

피델-카스트로_혁명성공-행진

▲ 혁명 성공 이듬해 시가 행진을 하는 쿠바 혁명 주역들(왼쪽 카스트로, 중앙 체게바라).

카스트로는 1945년 아바나대학 법학과에 다니다가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뒤에는 철거민들의 생존권 투쟁을 돕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카스트로는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게릴라전을 시작했고, 1953년 정부군의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으나 실패로 돌아가 체포됐다.

그 해 9월 시작된 재판에서 카스트로는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는 최후진술을 낭독했다. 이 증언은 폭정에 맞선 민중의 권리를 역사 속에서 찾아 진술한 것으로 나중 유명해졌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폭정에 항거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주 오랜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신조와 사상과 교의를 막론하여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는 권리입니다”면서 고대 사상가, 철학가로부터 밀턴, 로크, 루소 등의 근대 사상가들의 인권 사상도 언급했다.

그는 쿠바라는 나라의 역사가 저항의 역사로 점철돼 있다면서 스페인 식민통치에 맞서 싸운 호세 마르티, 막시모 고메스 등 독립 영웅들을 이야기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배웠고,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의 조국은 살인으로 넘쳐나고 요람에서 배운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감옥에 갇히는 것이 현실일지언정. 우리는 우리의 부모가 물려준 자유로운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섬(쿠바)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지 않고서야, 우리는 누군가의 노예로 사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스트로는 “야비한 독재자의 분노를 저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감옥 역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라는 말로 진술을 끝맺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2년간 복역한 뒤 사면으로 풀려났다. 석방된 뒤에는 멕시코로 가서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군사작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1956년 체 게바라 등과 함께 쿠바로 돌아와 혁명을 일으켰다. 1959년에는 마침내 수도 아바나에 입성해 혁명을 성공시켰다.

카스트로는 평소 성격이 불같고 즉흥적인 경향이 있어서 각가지 기행을 저지르곤 했다.
혁명을 성공시키고 미국을 욕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소련과 함께 1960년 UN 총회에 참석했는데 양복이 아니라 냄새나는 군 작업복을 입고 미국으로 찾아들었다.

그 후의 행적이 더 가관인데, 미국에서 최고급 호텔과 경비원들을 제공하자 카펫과 이불을 담배로 태워버리고 닭을 잡은 뒤 치우지도 않고 방에서 나갔으며, 그 길로 곧장 UN사무총장에게 쳐들어가 ‘미국이 제공한 호텔의 불편함’을 주제로 1시간짜리 연설을 한 뒤 대답을 듣기도 전에 뛰쳐나가 뉴욕 할렘가의 낡아빠진 호텔로 거처를 옮겨버렸다.

UN 총회가 시작된 뒤에는 구소련의 흐루쇼프가 발언할 때 “쿠바”나 “카스트로”라는 단어만 나와도 벌떡 일어나 최대한 시끄럽게 박수를 쳐대기도 했으며, 1시간짜리 ‘간단한 연설’을 하겠다고 한 뒤 무려 4시간 29분짜리 연설을 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졸지 않고 버텨낸 사람이 흐루쇼프 뿐이었다고 한다.

바로 1960년 9월, 유엔 총회에서 행한 4시간 29분짜리 ‘간단한’ 연설은 지금도 (정상급 인사의 연설 중) 유엔 역사상 최장시간 연설로 기록되어 있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 시절 피그스만 침공 사건 이후에도 분노와 희열에 가득 차서 라디오로 몇 시간이고 연설했다. 연설의 주내용은 “다시는 쿠바를 무시하지 마라”였다.

피델-카스트로_타임지

▲ 타임지에 실린 카스트로의 모습

각가지 기행으로 언론 장식

그는 야구 선수 출신이었다. 대학생 시절에 대학팀 대표로 미국에 와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문을 두들겼다. 이때 뉴욕 양키스와 워싱턴 세너터스(현재 미네소타 트윈스)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으나 입단에는 실패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만약 그때 미국 메이저에서 받아주었다면, 쿠바 공산혁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원래 열혈 야구광이었던 그는 1994년에 불세출의 축구스타 디에고 마라도나와 처음 만난 이후로 친하게 지냈고 그 덕분인지 축구에 관심도 지녔다.

그는 쿠바인 답게 시가를 좋아했다. 한때는 미국이 시가에 폭탄을 넣어서 암살하려 했다는 이야기 가 있을 정도. 하지만 말년에는 금연에 성공하여 시가를 멀리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담배 한 상자로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일은 그것을 적에게 선물하는 것이라는 발언까지 남겼다.

구소련은 자발적 공산혁명이 일어난 얼마 안 된 나라였던 쿠바를 매우 좋아해서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를 해주었는데 그 일환으로 피델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수훈했으며 쿠바에 대해 대규모의 경제 원조를 실시했다.

미국의 골칫덩어리였기 때문에 수 없이 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는데, 그의 인생을 통틀어서 638건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 암살 방법도 시가에 독 바르기, 연설을 하는 연단 아래에 폭탄 설치 하기, 취미 중 하나였던 스쿠버 다이빙 수트에 세균 집어넣기, 미인계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봤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그래서 별명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 이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암살이 시도된 인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이중 미인계가 실패한 이유가 가관인데, CIA에서 암살자로 보낸 여자 가 피델한테 진짜로 반해서 실패했다.

여자는 피델 카스트로와 내연관계를 유지하다가 적당할 때 암살할 계획이었다는데, 해당 요원이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피델이 자기가 암살자인 것을 눈치채서 한 동안 대피했다가 다시 피델에게 돌아갔는데, 권총을 겨누자 그가 한다는 말이 “날 쏠 수 없을걸. 넌 나를 사랑하니까”라며 되레 자기 가슴을 권총 앞에 들이미는데 쏠 수 없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1963)의 배후로도 지목되기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리 하비 오즈월드가 친쿠바 성향의 인물이었다는 증거가 나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증거가 굉장히 희박하다. 애초에 오즈월드란 인물 자체가 지극히 모순적이었고, 쿠바 성향 유인물 배포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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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스트로가 열성적으로 연설을 하는 모습.

그에 대한 평가에서 긍정적인 면은 김일성 등 대부분의 막장 독재 국가들과는 달리 자신에 대한 우상화나 신격화 정책을 행하지 않았다. 예로 쿠바 전역을 뒤져봐도 체 게바라나 다른 혁명가들을 기념하는 동상이나 초상화 같은 기념물은 꽤 있지만, 피델 카스트로 본인이나 그의 동생인 라울의 것은 없다.

그리고 김일성과 달리 피델 카스트로는 자신에게도 자식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권력을 세습시키지 않았다. 동생인 라울에게 권력을 넘기긴 했지만, 라울도 형의 후광이 아니라 피델 다음가는 쿠바 혁명의 주요 인물인 소위 말하는 개국공신이었기에 권력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이러면으로 볼 때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3대 세습과는 전혀 다르고, 만약 체 게바라가 살아 있었으면 체에게 권력이 승계되었을 거라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현재 집권자인 라울의 나이가 80이 넘은 것을 생각하면 쿠바는 곧 혁명 이후의 세대에게 권력이 이양될 것으로 보는 전망이 우세하다.

카스트로는 동구권이 붕괴된 이후의 위기상황에서도 기본적인 사회복지시스템을 유지하는 한편, 농업 체계를 도시농업과 유기농 위주로 대거 개편하여 자급자족에 성공, 고난의 행군과 같은 헬게이트 개막을 막아낸 점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게다가 군비를 줄여가면서 적어도 민중들이 최소한 굶주리지 않고자 배급을 유지하게 한 것으로 군비확장에 미쳐있던 북한과 정반대 인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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