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 대기자의 비화 발굴 최초공개] 美 비밀문서 10.26 사건과 12,12사태 숨겨진 비화 김대중 구명 미국정부, 신군부 압박리스트 첫 공개

■ 美정부, 전두환 압박위해 정치-경제-군사적 제재방안 총망라

■ 금융지원 중단 - 국제기구차관 비토 ㆍ 섬유쿼터 축소 으름장

■ 헤롤드브라운 국방장관 레이건 서한공개 통해 구명압력 가해

이 뉴스를 공유하기

미 국무부 비밀해제 1980년 12월 6일자 비밀문서

DJ 구명 둘러싼
레이건 신정부와
전두환의 大충돌

▲ YS 빈소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

▲ YS 빈소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

지난 1980년 12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관련, 김대중 전 대통령 대법원 확정판결을 앞두고 미국 카터정부가 김대중 구명을 위해 가용한 모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압박을 동원했으나, 전두환은 끝까지 ‘법대로’를 외치며 미국의 요청을 거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전두환은 미국이 이미 레이건이 선거에서 카터대통령은 ‘갈참’이라고 판단, 카터의 요청은 강력하게 무시하고 김대중 감형을 레이건정권에 대한 레버리지로 사용한 것이다. 또 유병현 당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미국 측에 박정희시해사건 범인이 김재규 중정부장이 아니라 차지철 경호실장이라고 전했으며 김재규에 대해서 ‘대령급’정도의 재목에 불과하지만 박정희 전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승승장구했다고 설명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공개된 미국 비밀문서를 통해 10.26 사건과 12,12사태당시의 숨겨진 비화를 밝혀본다.
안치용(시크릿 오브 코리아 편집인)

미 국무부가 최근 비밀해제한 1980년 12월 6일자 비밀문서, 이 비밀문서는 ‘헤롤드 브라운 [당시 국방장관]과 전두환대통령과의 대담’이라는 제목으로 마이클 아마코스트 당시 국무부 동아태담당차관보가 작성한 것으로 2급 비밀로 민감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외국정부 등에는 배포하지 말라는 표시가 돼 있다. 이 문건은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과 관련, 김대중전 대통령에게 군법회의 1심과 2심에서 사형판결이 내려지고, 대법원 최종판결을 앞둔 상황에서 김대중 구명을 위해, 미국정부가 한국정부에 가할 수 있는 모든 압력수단을 정리한 것이다. 즉 해롤드 브라운 국방장관과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의 면담에 대비해, 가용한 모든 압력수단을 정리, 브라운장관에게 전달한 문건이다.

‘DJ 사형시키면 한국은 대가 치를 것’ 경고 메시지

10장 분량의 이 비밀문서는 ‘빌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와 전두환 대통령과의 최근 대화는 잘 진행됐으며, 우리는 전두환이 김대중의 형량을 조정하도록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믿는다’는 말로 시작된다. 아마코스트부차관보는 ‘다음 주로 예정된 헤롤드 브라운장관과 전두환 대통령의 면담은 김대중을 사형시키면 한국은 매우 중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신호를 보낼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나 우리는 첫째 김대중 사형 때 어떤 조치를 준비해야 하느냐, 둘째 전두환에게 어떤 방법으로 사전 경고해야 하느냐 하는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다’며 이 문서의 의미를 설명했다.

▲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80년 내란음모 등 혐의로 계엄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자료사진

▲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80년 내란음모 등 혐의로 계엄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또 미국이 여러 방면으로 압력을 행사하더라도 딜레마가 있다는 사실도 적고 있다. 미국은 첫째 주한미군철수 등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의 이익에도 해가 된다, 둘째 너무 관대한 제재를 가하면 김대중 사형결정을 저지시키기보다 화만 나게 할 수 있다. 즉 어중간하게 압력을 가하면 저지는 못시키고 화만 돋우게 된다는 것이다. 또 레임덕정부가 실행능력이 없는 제재를 과장되게 부풀리면 위험하다고 적고 있다. 즉 이미 1980년 11월 대선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돼, 한 달 뒤인 1981년 1월에는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므로 카터정부는 사실상 힘이 없는 정부임을 인정한 것이다.

아마코스트는 미국이 취할 수 있는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제재방안을 정리했다며 헤롤드 브라운 국방장관이 이런 시그널을 보내는 데 대해 승인해 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우선 언급된 큰 줄기의 제재방안은 ‘미국대통령의 날카롭고 공개적인 비판,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 소환, 국제금융기구에서의 한국차관에 대한 반대투표, 1981회계연도의 FMS[해외무기판매] 크레딧 중단, PL480 원조중단, F16 전투기를 비롯한 중요 신무기 판매금지’등 6가지정도였다. 하지만 아마코스트는 이뿐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세부제재방안도 상세하게 언급했다.

한국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제재방안

우선 이용 가능한 경제제재방안으로, 개발원조 및 수출자금 지원, 원자재 협조차관 철회, 국제금융기구에서의 한국차관에 대한 비토, 미국 수출입은행 차관 동결, FEB의 한국여신규제와 미국시중은행의 한국대출동결등 금융제재방법을 구체적으로 조언했다. 또 무역제재부문은 수출과 수입부문으로 나눠서 세밀한 제재방안을 마련했다, 미국의 대한국 수입 분야에서는 섬유쿼터 재협상 및 규제, 일본쌀의 한국판매규제, 한국에 대한 무역혜택 철회 등이며 수출 분야에서는 미국수출상품의 한국판매 통제, 원자력 발전소건설과 관련한 기술 및 핵연료 라이센싱규제 등을 언급했다. 김대중을 사형시키면 자금지원을 동결하고 무역제재를 가하겠다는 것이다. 또 당시 한국의 중요한 달러벌이수단이던 원양어업에 대한 규제에도 나서 미국경제수역으로의 접근을 막을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각 제재방안의 장단점도 일부 언급돼 있는등 매우 진지하게 제재방안을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 1980년 12월 6일 아마코스트 국무부 동아태부차관보가 작성한 김대중구명을 위한 한국압박방안리스트 -미군철수등 많은 제재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도 피해를 준다는등 딜레마를 언급하고 있다.

▲ 1980년 12월 6일 아마코스트 국무부 동아태부차관보가 작성한 김대중구명을 위한 한국압박방안리스트 -미군철수등 많은 제재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도 피해를 준다는등 딜레마를 언급하고 있다.

또 정치적 제재방안으로 김대중 사형에 대한 날카로운 공개적 비판, 미국 대통령서한을 포함한 김대중 구명 공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소환, 북미관계조절 등을, 군사적 제재방안으로 FMS[해외무기판매]크레딧 및 훈련비용지원금 동결, 미군증원동결, 주요무기판매동결, 한국군과의 공동 군사훈련 불참 등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을까?. 한마디로 헤롤드 브라운 국방장관의 코를 납작하게 해줬다는 평가가 어울릴 정도로 ‘법대로’를 외친 것으로 드러났다. 헤롤드 브라운국방장관은 지난 1980년 12월 13일 백안관과 국무부, 국방부에 보낸 ‘한국방문 – 전두환과의 대화’라는 비밀전문을 통해 면담결과를 상세히 적고 있다. 이 전문에서 브라운 장관은 전두환 대통령과 12월13일 장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사형이 향후 양국 간의 안보와 경제협력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두환의 예상 밖 강경반응에 노란 美 정부

이에 대해 전두환의 반응은 놀랍다. 전두환은 ‘법원의 결정은 존중돼야 하며, 만약 법원이 사형을 확정하면 사형은 집행돼야 한다’고 말했고, 브라운장관은 전에 없던 강력한 발언이었다고 평가했다. 전두환은 ‘한국은 미국에 대해 역사적으로 큰 빚이 있으며 한국경제와 안보동맹의 중요성을 감안, 미국의 충고를 기꺼이 심사숙고하겠다’고 강조했지만, 본심은 미국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강경입장을 전달한 셈이다.

브라운장관은 ‘전두환이 그의 체면을 구기지 않고 형량을 조절하는데 심사숙고한다는 증거[주, 주한미국대사관의 긍정적 보고를 의미하는 듯]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김대중을 사형시킨다는 결심을 했고, 법원을 세팅했으며, [한국]군부를 향해 자신은 외국방문객에게 양보하지 않는 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려 했다’고 평가했다. 브라운장관은 ‘나는 김대중을 사형하면 미국은 반드시 행동에 돌입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뜻을 전했고, 우리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다. 이런 노력이 [김대중 구명에] 충분

하기를 바란다’고 전문을 끝맺었다. ‘할 만큼 다했지만 전두환은 김대중의 사형결심을 굳혔다’ 이런 보고였던 셈이다.
당시 신군부는 19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김대중을 기소했고 육군계엄보통군법 회의는 같은 해 9월 17일 사형선고,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도 같은해 11월 3일 항소를 기각하고 사형판결을 유지했으며, 1981년 1월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이 온 힘을 다해 김대중구명운동에 나선 것이다.

해롤드 브라운 국방장관의 방한이전인 1980년 11월 21일에도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가 전두환을 만나 ‘김대중이 사형된다면 미국신정부[레이건행정부]와 협력관계를 수립하는 기회가 사라질 것’이라고 압박도 가해졌다. 하지만 카터행정부의 이같은 노력은 먹혀들지 않았다. 전두환은 ‘갈참’인 카터대통령의 요구를 냉정하게 거부하는 대신 이를 레이건대통령과의 레버리지로 사용했다.

DJ감형으로 레이건 신정부 체면 세워준 전두환

레이건대통령은 1981년 1월 21일 대통령취임 다음날 전두환에 대한 방미초청사실을 발표했다. 신군부와 레이건 대통령의 첫 손님이 된 것은 미국간의 ‘불편한 동거’를 위한 모종의 계약이 성립된 것을 의미 한다.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은 전두환이 공언했던 대로 김대중당시 대통령에 대한 사형확정판결을 내렸고, 바로 그날 오후 국무회의를 소집,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킴으로써 레이건신정부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

선데이-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