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서울은행
신군부 메모 한 장으로
3천만 달러 뒤통수 맞고도 ‘쉿’
20년 전 제일은행과 서울은행 등에 무려 3960만달러 패소판결을 받은 박만규 전 휘만산업 회장(지난 주 본지 보도)이 이미 1982년부터 뉴욕-뉴저지일대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거대한 성을 방불케 하는 뉴저지의 대규모저택을 포함한 이들 주택은 제일은행 등 한국은행이 아닌 외국은행에 압류돼 넘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또 한국은행이 아닌 외국계은행 2곳도 380만달러 승소판결을 받아 뉴저지법원에 이를 등록한 것으로 드러나 뉴저지법원관할 박만규의 채무확정액은 약4300만달러를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박만규는 이처럼 5백억원이 넘는 채무를 갚지 않은 채, 부도직후인 2000년 뉴저지 잉글우드클리프에 아들 명의로 호화주택을 매입한 뒤 현재도 이집에서 살고 있으며, 벤츠차량 3대를 굴리는 등 호화생활을 하고 있어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케 하고 있다. 박만규 회장의 신출귀몰할 ‘먹튀행각’을 추적 취재해 보았다.
안치용(시크릿 오브 코리아 편집인)
박만규 전 휘만산업 회장과 부인 박휘자씨등과 관련, 뉴저지 버겐카운티 등기소에 등기된 서류는 모두 32건, 뉴욕시 등기소에 등기된 서류는 모두 6건으로 확인됐고, 박씨가 운영하던 톱프라이어리티커넥션[TPC]와 마이클캐리는 뉴욕시 등기소에 UCC 관련 서류가 각각 19건 등기된 것으로 밝혀졌다.
본지는 이를 근거로 박씨의 부동산을 추적한 결과 박씨는 뉴저지에 3채, 뉴욕에 1채등 사실상 최소 4채의 주택을 소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박씨부부는 이미 35년 전인 1982년부터 미국에 주택을 보유했고 이중 1채는 박씨가 직접 지은 주택으로 거대한 성을 연상케 한다.
박씨 부부가 소유한 주택은 326 JEFFERSON ST, RIDGEWOOD NJ 주택[이하 릿지우드주택]과6 STONEWALL RD, SADDLE RIVER NJ주택[이하 새들리버주택], 413 WILLIAM ST, RIDGEWOOD[이하 릿지우드 윌리암], 그리고 뉴욕 맨해튼의1991 BROADWAY에 소재한 벨칸토콘도의 24B[이하 벨칸토콘도]등이며 부도직후인 지난 2000년부터 거주중인 62 CENTER ST, ENGLWEOOD CLIFFS NJ[이하 잉글우드클립스 주택]도 박씨아들명의지만 사실상 박씨의 차명소유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박씨가 부도당시 4채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주택 중 2채는 3960만달러를 대출해준 제일은행과 서울은행 아니라 미국은행들에 압류돼 경매처분된 것으로 밝혀졌다.
제일-서울은행 후순위채권 순위 한 푼도 못 건져
뉴저지 버겐카운티 등기소 확인결과 릿지우드주택은 박씨가 지난 1982년 7월 9일 매입했으며 박씨와 박씨의 부인, 그리고 박씨의 사촌동생인 박충규씨 사이에 무상양도를 계속하다 1992년3월 18일 다시 박만규 명의로 소유권이 이전됐다.
그러나 1995년 12월 3일 휘만산업이 당좌거래가 정지되면서 부도가 난 뒤, 제일은행이 압류했고 1998년 6월 9일 제일은행이 최모씨에게 노트를 매도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주택은 방이 5개, 욕실이 3개로 건평이 83평 규모였다. 당시 제일은행이 최씨에게 얼마에 매도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가장 최근 거래인 2012년9월7일 매매가가 67만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당시 매도가는 30만 달러정도로 추정된다.
박씨의 주택 중 가장 큰 주택은 새들리버주택이다. 마치 유럽의 거대한 성을 연상케 해 호화저택이라는 말이 안성맞춤이다. 박씨는 이 부동산을 지난 1987년 7월 21일 매입한 뒤 직접 집을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방이 6개, 욕실이 7개로 건평이 무려 6774 스퀘어피트, 190평에 달한다. 그러나 박씨의 부도 뒤 이 호화저택은 제일은행이나 서울은행이 아닌 시티뱅크에 넘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뉴저지 버겐카운티 등기소확인결과 이 호화저택은 1997년 9월 2일 시티뱅크에 넘어갔으며, 시티뱅크는 같은 해 10월 30일 이를 경매를 통해 147만7500달러에 매도했다. 박씨의 부동산중 가장 큰 규모였지만,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은 거액을 대출해주고도 후순위채권자여서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릿지우드윌리암주택은 1990년 10월 30일 박만규씨가 소유권을 자신과 박휘자씨 공동명의로 바꾼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1990년 이전 매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 주택은 현시가 40만달러, 당시시가 20만달러정도로 드러났다. 이 주택은 지난 1998년 7월 22일 제일은행이 김모씨에게 매도한 것으로 밝혀져, 제일은행이 차압한 것으로 보인다.
대저택 부도직전 추가 대출받아 부인에 무상양도
박씨부부는 일찌감치 뉴욕 맨해튼 콘도도 사들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박씨는 지난 1986년 12월 10일 당시 신축된 벨칸토의 24B호를 매입했으며, 계약서에 매입가는 기록돼 있지 않지만 양도세가 1천 달러인 사실이 확인됐다. 이에 따라 박씨의 매입가는 25만 달러인 셈이다.
이 계약서에 기록된 박씨의 주소는 326 JEFFERSON ST, RIDGEWOOD NJ, 즉 릿지우드주택이었다. 이 콘도도 1992년 3월 5일 박씨가 부인 박휘자씨에게 무상양도하는등 명의를 부인 앞으로 대출을 받았고 부도직전인 1995년 8월 29일 부인 박휘자씨는 제일은행으로 부터 다시 25만 달러의 추가 모기지 대출을 얻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이 콘도의 시가는 30만 달러 정도로 제일은행이 이 콘도의 에퀴티를 초과해 억지로 대출을 해 준 것이다.
제일은행이 추가로 돈을 빌려준 지 약 3개월 만에 부도가 났지만 이 콘도는 결국 그린포인트은행으로 넘어간 것으로 밝혀졌다. 그린포인트은행은 1999년 12월 21일 뉴욕카운티지방법원으로 부터 승소판결을 받아 이 콘도소유권을 확보한뒤, 2000년 5월 19일 30만6천달라에 매도했다.
이처럼 제일은행 등은 3960만 달러를 빌려준 상황이었지만 약 230만 달러에 달하는 부동산 담보 중 20%정도에 해당하는 릿지우드주택 두 채만 넘겨받았고, 나머지 180만 달러 상당은 모두 미국은행 차지가 됐다. 이는 시티뱅크와 그린포인트뱅크 등이 제일은행과 서울은행보다 채권순위가 빨랐음을 의미하며, 결국 제일은행 등은 담보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채 부실대출을 해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일은행 박씨 회사에 2750만달러의 신용한도
부도직전 제일은행 뉴욕지점이 박씨에게 빌려준 돈이 최소 3025만 달러에 달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제일은행은 박씨가 3025만 달러를 빌려갔다는 사실을 부도직후인 1996년 2월 27일에야 30만 달러짜리 벨칸토콘도에 등기를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제일은행 뉴욕지점과 박만규, 박휘자, TPC, 마이클 캐리 등 박씨 측은 1995년 10월 20일 합의한 문서에 따르면 박씨의 회사 마이클캐리는 1995년 7월 25일 현재 리볼딩크레딧라인이 1750만 달러, TPC의 같은 날 현재 리볼빙크레딧라인이 1천만 달러였다. 즉 박씨의 회사에 2750만달러의 신용한도를 준 것이다. 그리고 약 80일 뒤인 10월 13일 박씨측이 마이클캐리의 신용한도를 1950만 달러로, TPC의 신용한도를 8백만 달러로 조정해 달라고 제일은행에 요청했고, 제일은행이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같은 해 10월 20일 홍성육변호사 입회하에 제일은행 뉴욕지점 부지점장 정연길, 마이클캐리와 TPC의 사장 박만규, 보증인인 박만규와 박휘자가 서명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TPC는 제일은행과 1990년 10월 23일 채무합의서를 작성한 이후 1991년 4월 18일, 1992년 8월 7일, 1994년 8월 18일, 1995년 7월 25일등에 채무합의서를 재작성한데 이어, 5차 수정합의서 작성이후 약 3개월만인 1995년 10월 20일 또 다시 6차 수정합의서를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신용한도제공 외에도 제일은행이 박씨의 벨칸토콘도에 25만 달러를 추가대출해 줬으며, 저지시티의 창고에 150만 달러, 새들리버의 호화저택에 1백만 달러의 모기지를 제공한 사실도 드러났다. 2750만 달러 신용대출에 2백75만달러 담보대출인 셈이다. 하지만 부도 뒤 제일은행이 모기지를 대출해준 새들리버 호화저택, 벨칸토콘도 등의 소유권은 엉뚱하게도 제일은행이 아닌 선순위 채권자인 미국은행에 모두 넘어가 버렸다.
적용한 금리 프라임레이트에 1% 특혜 대출
이당시 제일은행이 박씨에게 적용한 금리는 프라임레이트에 1%를 더한 것으로, 이 돈으로 사채를 굴려도 떼돈을 벌 수 있을 정도의 좋은 금리로 확인됐다. 합의서에는 이 같은 대출을 해준 이유는 신용장 개설 때문이라고 기재돼 있으며, 박씨는 1995년 10월 13일자로 제일은행에 2750만 달러상당의 노트, 즉 어음을 끊어준 것으로 확인됐지만, 이는 사실상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제일은행 뉴욕지점과 박씨측의 이 같은 합의가 있은 지 약 1개월 반 만인 1995년 12월 3일 휘만산업은 부도가 나버린 것이다.
서울은행 뉴욕지점이 지난 1996년 4월 2일 박씨등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장에 따르면 서울은행은 1987년 5월 12일 3백만 달러, 1988년 12월 14일 2백만 달러등 5백만 달러를 대출해 줬으며, 1995년 10월부터 이자를 받지 못했다며, 584만 달러 승소판결을 받았다. 즉 박씨가 제일은행에 2750만 달러짜리 어음을 끊어준 때는 이미 서울은행의 대출금 5백만 달러에 대한 이자조차 갚지 못하던 때였다.
서울은행과 제일은행 외에도 미국업체 2곳이 박씨를 상대로 승소판결을 받아 뉴저지주법원에 판결을 등록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메리칸캐주얼티컴퍼니는 지난 1996년 10월 11일 박씨회사인 TPC를 상대로 40만 달러 승소판결을 등록했고, 아메리칸모터리스트인슈어런스 컴퍼니는 1997년 2월 21일 역시 TPC를 상대로 340만 달러 승소판결을 등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2개회사의 승소판결액만 380만 달러, 즉 뉴저지법원에 등록된 박씨의 확정채무액은 4340만달러에 달하는 것이다.
한편 박씨의 친척으로 알려졌으며 박씨와의 부동산거래가 확인된 박종x씨는 카지노에 빚을 져 카지노가 소송을 제기, 승소판결을 받아 뉴저지주법원에 판결을 등록한 사실도 확인됐다. 트럼프플라지호텔앤카지노는 지난 1996년 10월 16일 2만2180달러 승소판결을, 트럼프타지마할카지노는 지난 1997년 9월 4일 3만945달러 승소판결을 각각 뉴저지법원에 등록, 카지노 빚이 약 5만3천 달러에 달했다.
아들 명의 주택에 살면서 벤츠 굴리고 호화생활
그렇다면 현재 박씨 부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현재 박씨의 주거지는 62 CENTER ST, ENGLWEOOD CLIFFS NJ으로 확인됐다. 이 주택은 부촌으로 알려진 잉글우드클립스의 2층 주택으로 건평이 3876스퀘어피트, 109평에 달한다.
뉴저지 버겐카운티등기소 확인결과 이 주택은 2000년 7월 27일 박종걸씨가 70만달러에 매입했다. 박종걸씨는 박씨의 아들로 2000년 당시 23세에 불과했으므로 이 주택을 매입할 정도의 재산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했을 나이의 박씨가 재력이 있었다면 이는 아버지등 부모로 부터 무상증여를 받았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도가 난지 채 5년도 안돼 박씨가 이 주택을 차명매입했다는 의혹은 박씨가 부도가 났음에도 재산을 일부 빼돌렸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주택에 아들 박씨는 살지 않고 박만규씨 부부만이 17년째 살고 있다. 특히 박씨부부는 벤츠차량을 3대나 굴리고 있다. 2015년형 벤츠 S550, 2014년형 벤츠 S550등 최고급 사양의 최신형 벤츠 2대와 약 10년정도된 역시 C클래스의 벤츠를 타고 다닌다. 은행돈 4340만달러를 떼먹은 사람의 호화생활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박씨의 또 다른 자녀인 박혜정, 박종진씨도 지난 1993년 11월 24일 뉴저지주 포트리의 1512 PALISADES AVE 콘도의 10G호를 31만6300달러에 공동매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딸 혜정씨는 1966년생으로 당시 27세, 아들 종진씨는 1970년생으로 23세였다. 자녀들의 나이로 볼때 이 부동산역시 박씨부부가 무상증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씨는 지인들에게 ‘서울 삼성동 휘만산업 사옥이 천억원에 달하며 이 사옥을 은행에 뺐겼다. 빚을 다 갚고도 남은 셈’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본보확인결과 이 사옥은 대지면적 179평, 연건평 636평의 지하1층, 지상 6층의 건물로 1991년 5월 20일 준공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 사옥은 돌고 돌아 올해 1월에도 매각됐고 거래가는 136억5천만원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박씨가 주장하는 천억원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다.
신군부 등에 업고 전국구 후보 명단에 오르기도
그렇다면 박씨는 어떻게 은행권을 휘어잡을 수 있었을까. 휘만산업은 한국섬유업계에서 50위권정도의 업체로서 적지 않은 매출을 올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같은 실적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음을 언론보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박씨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후 집권한 신군부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박씨는 1980년 12월 8일 전두환이 창당한 민정당 창당준비위원에 선임됐고, 1981년 2월 18일 민정당 중앙위 운영위원에 뽑혔다.
또 1981년 3월 6일자 한국신문들에 따르면 박씨는 민정당 전국구후보 74명에 포함됐다고 보도될 정도로 신군부의 신임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박씨는 1940년생으로 당시 나이 41세에 불과했지만 그 영향력만큼은 대단했던 것이다.
박씨는 3월 7일 최종확정된 민정당 전국구 후보에는 포함되지 못했지만 1981년 4월 28일 민정당이 추천한 8명의 평통자문위원에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즉 전두환, 노태우등 신군부와의 친분으로 제일은행, 서울은행 등에서 막대한 신용대출을 받았고, 신군부가 퇴장한 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김현철 등과 선을 대면서 영향력을 과시했지만, 결국 1995년 부도가 났다. 하지만 그는 부도이후에도 은행이 갑자기 대출을 끊음으로서 부도가 났다고 주위에 말하고 있다. 내 잘못은 없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벤츠 S550을 3대씩이나 굴리며 신나게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부도난 기업가의 참모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