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한테 고해한 내용이
세상 밖으로 새나갔다는데…
가톨릭의 위대한 대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노는 고백(Confession)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의 죄를 질책하시는데, 그대도 자신의 죄를 질책한다면 그대는 하느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과 죄인은 별개의 존재입니다. 그대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대가 “죄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죄인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을 구원하시도록 그대가 만든 것을 부수십시오… 그대가 만든 것을 미워하기 시작할 때, 그대는 자신의 악행을 고발하는 것이기에, 그대의선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악행의 고백은 선행의 시작입니다. 그대는 진리를 행하고 빛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고해성사는 천주교에서 가장 익숙한 예식 중의 하나이다. 이 고해성사를 두고 요즈음 리버사이드에 있는 한인 성당인 성 김대건성당에서 ‘신부가 누설했다’는 소문으로 시끌벅적이다. 해당 사제는 펄쩍 뛰며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강하게 부인하고 나섰다.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았다.
<성진 취재부 기자>
리버사이드 소재 성 김대건 한인 성당의 일부 신자들을 대표한다는 김 모 씨는 지난 6월 19일 자로 로마 교황청의 프란체스코 교황에게 서신을 보냈다.
레터 사이즈로 10장 분의 서신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적혀 있는데 그중 ‘지난 2014년 9월경 신부가 한 신도로부터 받은 고해성사 내용을 다른 신자에게 누설해 문제가 됐다’면서 ‘해당 사제는 올해 지난 2월 12일 미사 시간에 고해 누설을 인정하고 시인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서신에서 ‘우리는 교황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듣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서신에서 ‘일부 신자들은 지역 주교도 면담했는데 지역 주교는 이 문제를 일반적으로 거부하고 해당 사제를 계속 사목토록 조치했다’고 적었다.
사제 ‘고해 누설한적 없다’ 부인
본보는 지난 25일 오후 1시 20분에 성 김대건 성당에 전화를 연결해 해당 사제김종기 신부와 인터뷰를 가졌다.
교회 김신부는 “내 일생에서 고해성사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말한 사실이 전혀 없다”면서 “서신에 적혀 있는 ‘해당 사제는 올해 지난 2월 12일 미사 시간에 고해 누설을 인정하고 시인했다’고 했는데 본인은 인정한 적도 없고 시인한 적도 없다”라고 강조했다. 또 사제는 “서신에서 ‘2014년 9월경에 고해성사를 다른 신자에게 누설했다’고 적었는데, 솔직히 많은 신도들의 고해성사를 받으면 서 일일이 기억하지도 않으며 성사 예절로 끝내면 그것으로 잊어버린다.”라고 설명했다.
해당 사제는 특히 “지난 2월 미사 시간에서 공지사항을 알리는 시간에 최근 성당에 나도는 ‘고해 성사 누설’ 소문에 대해 사제로서 신자들에게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몇 가지 사항을 알렸다고 했다.
그 사제는 “나도는 ‘고해 누설’에 만약 그 당사자가 있다면 직접 나에게 와서 사실 여부를 밝혀야지 소문으로 나도는 것을 온당치가 못하다고 했으며 “내 사제 사목 중 강론 시간에 전체 신도를 대상으로 고해성사를 잘 보는 방법을 설명한 적은 있어도, 개별 신도에게 고해 내용을 따로 누설한 적은 내 사제 생활에서는 전혀 없다”라고 밝혔다.
현재 성 김대건 성당을 관할하는 지역 주교도 지난 5월 30일에 문제점을 제기한 김 모 씨와 일부 신자들을 면담한 자리에서 ‘만약 누설을 들은 신도가 있다면 직접 주교에게 오라’고 했으며, 거론 되고 있는 사제를 계속 신임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고해성사는 천주교의 7성사가운데 하나로서 일반인에게도 가장 익숙한 예식이다. 고백성사라고 하기도 하지만,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성찰, 통회가 있어야 하기에 고해성사가 맞으며, 전통적인 표현으로는 세례성사 다음에 오는 구원을 위한 뗏목이라고 한다.
‘죄와 벌’ 사이… 단순한 고백 아닌 성찰
죄의 사함은 예수가 그의 사도들에게 내린 사죄의 권한에 의한 것으로서 마태오복음서 16절, 19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릴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서 20장 22절~23절에서도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천주교에서 세례 받은 신자가 대죄를 지었다면 신자는 반드시 빠른 시일 내에 고해성사를 진정 참회하는 마음으로 봐야 한다. 이로써 신자는 죄를 용서받는다.
하지만 그 죄로 인하여 받을 벌이 없어지진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루 먹을 음식을 훔쳤다가 회개하여 고해성사를 받았다고 해 보자. 죄는 용서받았지만 음식을 도둑맞은 사람이 한 끼 굶어야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훔쳐 간 사람은 훔친 물건을 돌려주는 등 피해를 보상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러고도 못다한 부분은 죽어서 연옥에서 몸으로 때운다는 것이다.
고해성사는 문학적으로도 많은 소재가 되는 것으로 이를 소재로 한 문학, 영화가 많다. ‘죄와 벌’이라는 동생의 누명에 관해 고민하는 사제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있다. 각종 창작물에서 등장인물이 큰 죄를 저지른 뒤 고해성사를 하기도 한다. 카리스마 만빵인 캐릭터가(주로 악역) 살인 같은 죄를 저지른 뒤 고백 하는 장면도 클리세로 많이 쓰인다. ‘살인을 하기는 했지만 그만큼 속으로는 고뇌한다’는 표현으로도 나온다.
고해성사 내용 발설 전통적으로 금지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해성사가 합당하게 진행되려면, 먼저 참회자의 죄에 대한 자세한 성찰과, 통회(절실한 회개)가 있어야 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단호히 결심하고(정개) 마침내 사제에게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뒤이어 사제가 정해주는 보속을 받고 고해신부의 사죄경을 듣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천주교 사제는 고해성사의 내용은 절대 발설하면 안 되는 것으로 삼고 있다.
이는 과거부터 현대까지 무수한 사회적 이야기가 되어 왔다. 대표적인 사례로, 성인이 된 요한 네포무크 신부는 체코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끝까지 왕에게 말하지 않다가, 혀가 뽑혀 프라하 카를 다리에서 블타바 강으로 버려졌다.
왕 입장에서는 고해신부인 네포무크 신부가 미워 죽겠지만, 성직자로서는 고해비밀을 죽음으로도 지켜야 하는 과제였다. 나중 성인이 되어 마땅한 사제였다. 그래서 네포무크 성인은 강의 수호성인으로 동상이 다리에 세워지곤 한다.
고해성사의 비밀에 대해 더 재밌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프로테스탄트의 창시 자격 인물인 마르틴 루터가 500년 전 가톨릭을 박차고 나와 활동하던 중, 어느 주변 인물이 “거… 수녀들은 평소에 무슨 고해를 합디까?” 하고 묻자 벼락같은 불호령을 작렬했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루터는 종교개혁 시기 이후에도 다른 동료 신부에게 고해를 하거나 자신이 고해를 받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고해는 할 수 있으나 성사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을 뿐이다.
고해 내용 신고하지 않아도 법적 처벌 미 성립
한국에서는 고해성사 내용에 대한 성직자의 비밀 유지 의무를 존중하여, 이를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아니하여도 국가보안법상의 불고지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제5공화국 시절에는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의 범인을 적극적으로 도피, 은닉하게 도와준 사제가 처벌된 일이 있었는데, 판례도 신고하지 않은 걸 넘어서 적극적으로 숨을 곳을 제공해 주는 등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도피ㆍ은닉죄가 성립한 것이지, 소극적으로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은 것은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가톨릭 성직자가 이를 누설할 경우, 특히 고의적으로 누설한 경우 교회법에 따라 자동 파문이 될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명목상으로는 형법 제317조 제2항[29]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다. 그리고 고해의 내용이 되는 사실이 타인에게 알려질 경우, 고해자의 명예를 훼손하기에 충분한 사실일 경우, 성직자가 이를 발설하는 것은 명예훼손죄에 해당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실질적으로도 형사처벌이 가능해진다.
정확하게는 형법에서는 고해성사라는 특정 종교의 특정한 의식에 대해서 보호하는 것은 아니고, 종교를 막론하고 직무상 취득한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즉 교리와는 달리 고해성사가 아니더라도 사제로서 취득한 정보까지 포함되며, 개신교, 불교, 증산도, 통일교 등 어떤 종교에서라도 ‘종교의 직’에 있는 자는 이 형법 규정의 대상이 된다.
오히려 고해 누설하면 사회법도 저촉
사제가 실수로 고해 내용을 누설했다면 파문까지는 아니지만 제재는 따르며, 신자들에게는 “난 신부로서 기본적인 소양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수로라도 발설하면 절대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사제들은 어지간한 고해 내용을 뒤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유럽은 우리나라 천주교와 달리 신부가 한 곳에 꽤 오래 정착하는 스타일이고 신자 수(라기보다는 밀도)도 많지 않아 발설하면 심각한 위험이 따르는 경우가 많아 금지 조항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한국은 사제가 정기적으로 이동하며 신자 수도 많아 실질적으로 무슨 고해를 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게다가 사실 고해성사 보러 오는 사람 대다수가 큰 죄가 아닌 때 되어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심지어 “사는 게 죄”라고 하는 노인들도 있다고 한다.
가끔 고해소 밖에까지 목소리가 들리거나 해서 의도치 않게 고해 내용을 듣게 되는 일이 있는데, (고해를 통역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신자도 절대로 발설해선 아니 된다. 우연히 듣게 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혹여 남이 고해한 내용을 듣게 되면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상식 정도는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도 불구하고 이걸 깬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있다 남미 지역에서 몇몇 성직자가 반체제 운동가의 고해성사를 누설하였다는 의혹, 그리고 105인 사건 당시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의 행동이다. 다만, 의심되는 사안의 상당수가 독재자나 식민지 당국자에 대한 ‘미래에 저지를 일’을 고해한 것으로, 윤리적으로 비난의 여지는 있겠지만 고해 사제가 비밀 준수를 지켜야 할 의무가 없는 것들이었다.
만약 고해소에서 신지가 “내일 독재자 아무개를 제거하겠다.”고 밝힌 것은 미래에 일어난 것을 고해한 것이고, 자기의 범의를 밝힌 것이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악용한 것이므로 사죄경(죄를 사하여 주는 경문)을 줄 수 없고, 설사 사죄경을 주었더라도 고해성사의 성사성을 모독한 모 고해로 고해 사제가 비밀 준수 의무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범죄를 종교적 회피 수단으로 악용하는 꼼수도
고해 내용 누설 금지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있다.
첫째, 고해자 혹은 고해의 내용이 특정되지 않은 것이다. 성직자들은 예비자나 일반 교우들에게 올바르게 고해성사를 보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하며, 그릇되게 고해하는 몇 가지 예를 든다.
통회의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고해성사의 은총을 받을 수 없는 대표적인 예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못살게 군것을 고해하면서 핑계 삼아 며느리의 잘못에 대해 주저리 늘어놓는 것’을 설명하는 것 말이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교우 아무개가 이런 고해를 했다고 떠벌리는 것은 당연히 내용 누설 금지 원칙에 반하는 것이다.
둘째, 미래에 범죄를 저지를 예비음모를 하고 있다고 고해하는 것이다. 어떤 범죄자가 범행의 실행 준비를 완료하고 착수하기 전에 고해 사제에게 찾아갔다. 그가 범죄 음모를 꾸민 것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면 그것은 비밀 유지 의무의 대상이다. 그러나 범죄 음모를 뉘우친 것도 아니요, “앞으로 범죄를 저지를 테니 용서해주세요”라며 고해성사를 단순히 종교적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다면 이는 잘못된 고해의 태도이다.
고해성사가 유효하게 성립하려면 형식적으로 사제의 사죄경이 있어야 하지만, 실질적으로 고해자가 고해에 앞서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 드린 것을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어야 한다. 과연 “앞으로 범죄를 저지를 테니 용서해주세요” 한 사람이 다시는 범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범행 전에 미리 고해성사를 보아, 자기의 죗값을 줄이려고 하는 꼼수의 발로일 수 있다.
즉 이러한 경우의 고해는 무효이며 오히려 고해성사의 신성성을 모독한 죄가 된다. 사제도 비밀 준수 의무가 없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참회에 관한 설교」 중 이런 문구가 있다.
<그대는 거리에서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를 지을 때마다 지은 죄에 대해 참회하십시오. 또다시 죄를 지을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새롭게 뉘우치십시오. 약속된 상급[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교회는 법정이 아니라, 치유의 장소입니다. 여기 교회에서는 그대의 죄를 셈하지 않고, 그대에게 용서를 베풀 따름입니다. 오직 하느님께 그대의 죄를 드러내십시오. “오로지 당신께 죄를 지었나이다. 당신 눈에 악한 것을 제가 행하였나이다”(시편 51, 6). 그러면 그대의 죄는 용서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