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 영화’- ‘택시 운전사’ 1980년 5월 광주사태 재현 실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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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린내 진동하는  아비규환의 현장

그날 ‘광주’는 지옥…
전두환을 ‘참수’시켜야하는 이유

택시지금 국내외로 상영되어 올해 첫번째 100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 ‘택시 운전사’ (A Taxi Driver, 감독 장훈)가 미국에서도 화제를 몰고 있다. ‘5.18광주민주화항쟁’을 그린 이 영화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 속에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한국 현대사의 사건인만큼 당연히 관심의 대상이다. 영화가 상영되자 당시 군부독재의 주인공인 전두환 전대통령의 대변인격이 ‘이 영화에서 군인들이 정조준해서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한 것은 있지도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으나 이는 오히려 반감을 살 발언 이었다. 당시 취재를 한 동아일보 김영택 취재부 기자는 “태극기를 흔들며 ‘전두환 물러나라’고 한 시위대에 공수단 병력이 정조준해서 발사했다. 한번도 아니고 수차례나 그랬다”고 증언하고 있다.
5.18을 무대로 한 영화는 ‘화려한 휴가’로 소개된 적이 있으나, 이번 ‘택시 운전사’는 한 소시민 택시 운전사의 눈으로 목격한 ‘5.18’ 현장을 보았다는 점에서 색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종종 영화는 드라마라는 명분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도 있고, 실제 상황을 다르게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번 ‘택시 운전사’에도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다. 영화를 본 사람이나 앞으로 볼 사람을 위해 참고 사항을 정리해본다.
(성진 취재부 기자)

본 기자는 미국에서 5.18 당시 ‘광주’를 취재하고 있던 UPI 도교와 홍콩 특파원들과 교신을 통해 간접적으로 취재한 경험이 있다. 당시 LA에서 일부 동포들이 미적십자 사무실(현재 올림픽 경찰서 자리)에서 민주화시위를 벌였고 나중에는 광주에서의 부상자를 위한 헌혈운동도 벌였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전두환 계엄군은 광주 시민군들이 7일 동안 차지했던 전남도청에 대한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M-16 소총으로 무장한 2만5000여명의 계엄군과 헬기, 장갑차까지 동원됐다. 광주시민들이 5월 18일부터 봉기한 민주화운동이 27일 마지막 항전이 진압되면서 5·18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 故  위르겐 힌츠페터(Jurgen Hiszpeter)

▲ 故 위르겐 힌츠페터(Jurgen Hiszpeter)

많은 사람들은 한국과 미국이 전통적으로 우호관계인데 어떻게 ‘반미감정’이 일어났는가에 의문을 품기도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반미감정’이 처음으로 폭발된 것은 바로 ‘5.18 광주민주화항쟁’이 기폭제가 된 것이다. 당시 한국군의 작전권이 미군에 의해 통제됐던 시절인데, 전두환 군부가 광주 진압군을 출동시키는 것을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John Adams Wickham Jr.)이 허가를 했기 때문이다. 이를 한국인들은 미국이 전두환 군부독재를 지원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5.18 당시 주한미국대사인 윌리엄 글라이스틴(작고) 대사(William H. Gleysteen)가 본국 정부에 발송한 외교문서 중 기밀해제된 문서들은 보면 미국의 전두환 군부 지원과 ‘광주 학살극’에 미온적인 입장이 나타난다.
기밀해제된 백악관 문서는 글라이스틴 대사가 광주 진압작전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는 내용으로 시작됐다. 그는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을 통해 광주에서 전개되는 어떠한 군사작전도 인명 피해를 최소화 할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군부 지도부에 보냈다”고 설명했다.

특히 글라이스틴 대사는 “(군부에) 군사작전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모든 현실적인 비군사적 옵션을 모두 다 써봐야 하며 어떠한 군사작전도 최대한 신중하게 수행돼야 한다고 촉구했다”고 덧붙였다.
미국이 군부에 요구한 인명 피해 최소화, 신중한 군사작전 수행 등은 진압작전을 전제로 한 소극적인 대응이었다. 미국은 평화적 해결을 끝까지 고수하며 유혈 작전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노력을 펼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당시 미국의 대응에 대해 오늘날 역사적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 다. 특히 글라이스틴 대사는 한국군 공수부대의 만행을 알고 있었으면서 이들의 진압작전 투입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당했다.

5.18은 “반미감정 기폭제”

영화는 한 택시 운전사(송강호)와 독일(당시는 서독)에서 특파된 ARD 방송사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눈으로 본 광주항쟁을 그리고 있다.
영화상에서는 광주에 있는 외신기자가 독일(당시는 서독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Jurgen Hiszpeter) 뿐인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다른 외신기자들도 있었다. 영화에서는 서독 ARD방송사의 기자 힌즈페터만 나오고, 당시 녹음 담당 기자인 헤닝 루모어(Henning Rumohr)가 안 나온다. 원래는 힌즈페터는 촬영, 루모어가 녹음을 담당해서 2명이 광주로 갔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촬영 담당인 위르겐 힌츠페터만 등장하고 무비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만 나온다.

▲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취재에 나선 위르겐 힌츠페터(왼쪽)가 광주 인근에서 계엄군과 찍은 사진.

▲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취재에 나선 위르겐 힌츠페터(왼쪽)가 광주 인근에서 계엄군과 찍은 사진.

당시 광주에는 AP통신, UPI통신, 뉴욕 타임스, 르몽드 등 다양한 매체에 소속된 외신기자 여럿이 광주에서 취재하고 있었다. 또한 한국 기자도 현지 기자들과 동아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를 포함신문 방송 기자들도 다수 취재 했으나 보도에서 군부 검열에 제재를 당했다.

나중에 알려진 5.18 특파원 리포트에서 내외신 기자들의 증언을 보면, 군인들이 기자들의 취재 자체를 막지는 않았다고 했다. 다만 광주로 들어가는 택시, 버스 등의 교통과 통신이 통제되어, 대부분의 국내외 기자들이 걷거나 주변인의 도움을 받아 광주에 들어가고 나올 수 있었기에, 취재 내용을 제때에 송출할 수 없었다.

당시 5월 21일 뉴욕타임즈의 한국 주재원이었던 심재훈 기자가 광주시에서 순천시의 관광 호텔까지 가서 전화로 기사를 송고하였고, 이것이 미국 뉴욕타임즈와 르몽드의 1면 특종 기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후 해외 특파원들이 광주로 몰려들었고 취재하였다.

당시 힌츠페터는 이 내용이 담긴 영문신문을 5월 23일 2차 취재시, 광주시민지휘부에 전달 하였다. 영화에서는 힌츠페터 기자가 광주를 한 번 간 것으로 나오지만 그의 회고록을보면 두 번 간 것으로 나와있다. 영화와 달리 힌츠페터의 수기에 의하면, 택시 기사 김사복은 위르겐 힌츠페터의 5월 23~27일 광주 2차 취재 때도 동행하였다. 2000년 출판된 영문판 The Kwangju Uprising: Eyewitness Press Accounts of Korea’s Tiananmen (Pacific Basin Institute Book, 2000)에 내용이 나온다. 그는 일본에서 돌아온 후, 서울에서 5월 23일 오전 10시 30분경 김사복과 함께 다시 광주로 향한다.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가 카메라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담은 내용은 힌츠페터가 김포 공항을 빠져 나간 당시 5월21일 저녁 나리타 공항에서 독일로 보내졌고, 22일 저녁 ARD 가 서독 전역에 동시 송출하던 북부독일방송의 저녁 뉴스 프로그램인 타게스샤우를 통해 즉시 보도 되었다. 그리고, 23일 다시 잠입해서 찍은 필름까지 보태서 그 해 9월에는 《기로에 선 한국》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방송되었다.

이 《기로에 선 한국》 다큐멘터리는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가톨릭 신부들이 번역해서 국내로 들여온 이후, 언론통제하의 제5공화국 시절에 비디오로 복제되어서 은밀하게 재야에 유입되었고 성당과 대학가 등에서 상영되었다. 그리고 1987년 5월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최초로 상영되었는데, 이 상영을 주도한 인물 중에 부산의 인권 변호사들이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노무현 전대통령과 문재인 현 대통령이었다.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지금의 정의구현사제단과는 많이 틀리다)의 소속 신부들이 이 테이프를 몰래 녹화하여 각 소속 성당에서 몰래 상영했다. 주로 외부 침입이 어려운 성당 지하나 구석진 곳에 모든 조명을 소등하고 커텐까지 닫아 몇 명을 조를 짜서 침입에 대비하여 보초를 서기도 했다. 그래서, 특히 가톨릭 신자들의 상당수가 지금까지도 이 비디오를 많이 기억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광주로 들어가는 걸 군인에게 제지당하자 샛길을 찾아 잠입한 것으로 나오며, 실제로도 그랬다. 다만 이때 검문 중인 군인을 속이기 위해서 한 말의 내용이 약간 다른데, 영화 상에서는 “사업상 ‘중요한 서류’를 가지고 나오기 위해 광주로 들어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피터 본인 신분을 ‘외국회사 주재원’이라 속이고 “광주에 남아 있는 주재원을 빼내 오겠다”고 하여 광주로 들어갔다.

‘성당에서 비밀리에 광주참상 시청’

주인공 김만섭의 모델이 된 택시기사 ‘김사복’은 실존 인물이지만, 이후 위르겐 힌츠페터가 그의 행방을 수소문했을 때도 찾을 수 없었고, 이번 영화 제작진 측에서도 그를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최근에 택사운전사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SNS에 글을 올렸으나 그도 나타 나지 않았다고 한다.

▲ 2000년 출판된 영문판 The Kwangju Uprising: Eyewitness Press Accounts of Korea's Tiananmen (Pacific Basin Institute Book, 2000)에 내용이 나온다.

▲ 2000년 출판된 영문판 The Kwangju Uprising: Eyewitness Press Accounts of Korea’s Tiananmen (Pacific Basin Institute Book, 2000)에 내용이 나온다.

그러므로 그의 자세한 신상이나 행적은 현재까지도 불명이며, ‘김사복’이란 이름도 가명일 가능성 이 있다. 당시 힌츠페터의 취재를 도왔다는게 알려지면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어떤 끔찍한 봉변을 당하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가명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편 영화에서 아쉬었던 고증 오류 장면은 택시기사 만섭 일행이 황태술의 집에서 저녁밥을 얻어먹고 나서 TV 수상기에 나오는 뉴스 화면은 실제 당시 KBS 뉴스 9 보도를 재현한 것이다. 다만 작중 시점인 5월 20일 밤은 아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된 날인 5월 27일자 뉴스 화면이다. 뉴스를 읽는 재연배우(성우 손종환[36])의 어나운싱이 80년대 당시와 다르고, 결정적으로 뉴스 화면에 나오는 슬라이드에 ‘광주 장악 계엄군’이라고 나온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고증 오류인 셈이다라는 지적을 받았다.

영화 후반, 광주를 빠져 나올때 군사 검문대에서 검문소 중사가 서울 택시 번호판을 발견했음에도 눈 감아주고 보내준 것은 위르겐 힌츠페터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실화라고 한다.
영화에서 광주 지역 언론사 기자인 최 기자가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는 신문을 발간하려다, 발간 직전에 신문사 간부들이 들이닥쳐 윤전기의 판을 엎어버리고 최 기자를 끌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실제 광주 항쟁 당시 전남매일신문사 기자들이 계엄군의 학살을 알리려는 신문을 발간하려 했으나, 조판을 다 끝내고 윤전기를 돌리기 직전에 신문사 간부들이 들이닥쳐 조판을 엎어 버린 사건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 다음날 기자 일동이 사측에게 합동으로 제출한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라는 사직서 문구가 유명하다.

영화 결말 부분 힌츠페터가 탄 택시가 광주를 빠져나올 때 군사복 요원들이 쫓아 올 때 다른 택시들이 등장하여 도와주었다는 부분은 당연히 각색된 부분이다. 애당초 당시 검문이 워낙 심했고 힌츠페터가 탄 택시도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다른 택시들조차 그렇게 쉽게 빠져 나왔다는 것은 당시 현실성이 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많은 평론가들이나 이 영화를 본 일부 관객들은 “구태여 이같은 자동차 추격전을 넣을 필요가 있었느냐”는 지적도 많았다.

영화 후반부 도청 집단발포 장면에서 택시가 5~6대와 트력 1대가 총격을 막고 거리에 쓰러진 사람들을 호송하는 것으로 나왔는데, 실제로는 당시 덤프트럭이 선두에 선 뒤 택시가 500대가 와서 사상자를 호송했다.
이는 영화상에서도 묘사한 5월 20일에 실제로 있던 일이며, 이때 부상자들을 구출하러 택시를 몰고 들어온 기사들까지 계엄군에게 사살당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오후 6시에 광주 시내의 버스와 택시 기사들이 버스와 택시를 합쳐 200여대 가량을 모아 금남로 차량 시위를 전개했다. 방송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이 장면을 정확하게 고증하여 방영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김만섭의 택시 모델은 기아 브리사로, 당시 택시 중에서 현대 포니만큼 많이 보이던 택시 였다. 위르겐 힌츠페터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탔던 택시는 오펠 차였다고 한다. 이 점을 볼 때, 위르겐이 탔던 택시는 한국에서 조립한 오펠의 세단이었던 새한 레코드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도 2003년 방영된 ‘5.18’을 소재로 한 KBS 다큐멘터리 <푸른 눈의 목격자>의 영상 속에 등장한 사진을 보면 실제 GM코리아의 생산 차량인 검정색 새한 레코드(D형)의 후측면 검문 장면이 등장한다.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전 세계에 알린 영화속의 실제 인물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지난해 2월25일 독일에서 별세했다. 향년 79세였다.
고인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는 “(2003년) 남편이 죽으면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으나 다만, 상징적으로 손톱과 머리카락, 유품 일부를 한국에 봉투에 담아 보내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했다.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는 생전에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방송 기자의 사명에 대해 말했다.
“언론인이 수집된 자료를 방송으로 내보내지 않고 머릿속에 넣고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나?”


<선데이저널> 85년, 이미 광주학살 만행을 세계에 알렸었다.

‘아…무등산이여! 피바다의 광주여’

광주1

1985년 5월18일자 <선데이저널>에서는 광주의거 5주년을 맞이하여 5페이지에 걸친 특집을 통해 전두환 정권의 광주학살 만행과 참상을 사진과 함께 언론사상 최초로 공개했다.
이 기사는 광주사태가 발생한지 나흘째 되던 5월22일. 동아일보 특별취재반이 현지에서 취재한 광주학살 체험기로 계엄당국이 검열과정에서 삭제되었던 기사를 <선데이저널>이 5년만에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했다.
당시 사진을 보면 귀축과도 같은 공수부대 만행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광주2

광주3


<택시운전사> 주인공 김사복 큰아들 장문의 호소문

“내가 김사복 큰아들,
영화묘사 실제와 많이 다르다”

최근 트위터에서 자신이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주인공인 김사복 씨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 트위터 이용자는 20일 “영화에서 묘사한 내용이 실제와 많이 다르다”며 아버지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 5일 김승필이라는 이용자(트위터 계정 @franio1013)는 ‘저는 김사복 씨 큰아들입니다’라는 글을 게재한 바 있다.

그는 “지난 4일 이 영화를 보고 늘 제 안에 계셨던 영웅이 밖으로 나오는 느낌이었다”며 “아버님을 잊지 않으시고 찾아주신 위르겐 힌츠페터 씨에게 깊이 감사함을 드립니다”고 적었다.
그리고 김사복씨는 지난 1984년 12월 19일 투병 후 하늘나라로 떠났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간 많은 언론에서 김사복 씨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그를 수소문했으나 그와 접촉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20일 오후 4시경, 그가 <택시운전사> 1천만 관중돌파를 축하하며 장문의 호소문을 함께 올렸다.

그는 4장의 호소문을 통해 “아들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여러 정황으로 아버님 김사복씨가 <택시운전사>의 장본인임을 알리며 공식적인 확인을 요청했으나 내한한 피터씨 부인과의 만남 등 그 어느 것도 이뤄지지 않았다”며 영화 제작사와 배급사에 대한 서운함부터 토로했다.

그는 이어 “영화의 내용이 아버님의 이미지와 사생활 부분에서 많이 다르다”며 특히 “(영화에) 첫 자막에 ‘실화를 배경으로 재구성했다’는 자막이 있으나, 실제 가족들도 모르는 딸이 있다는 부분은 사실이 다른 부분으로 아버님을 잘못 알리게 된 아쉬움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피터씨가 저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광주와 아버님 김사복씨를 통해 그간 잊고 있었던 슬픔과 고통을 기억하고 더 이상 역사적 오류를 범하지 말라는 교훈이자 숭고한 소명”이라고 적어 내려갔다.
이어 “아버님 김사복씨는 그 당시 외국 언론사와 문화공보부, 외무부, 국제문화교류협회 등에서 (실제로는 이미) 매우 잘 알려진 분”이라며 조만간 언론을 통해 김사복 씨의 사진은 물론 그간의 사정을 모두 공개할 것을 약속했다.
그동안 영화 제작진과 배급사는 최근 김사복씨와 가족들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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