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베트남 전에 파병됐다가 자진월북 후 40년만에 탈북
‘북한은 국가가 아니라 거대한 감옥이다’
북한 방문은 미친 짓
“(북한여행)은 미친 짓”,“북한은 외국인을 이용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북한은 국가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커다란 감옥”,“그곳은 지옥이었다”-이말은 주한미군으로 비무장 지대에서 근무할 당시인 1965년 베트남 전정에 파병돼 죽음을 맞는 것이 두려워 자진 월북, 북한에서 40년 넘게 살다가 지난 2004년 극적으로 석방되어 일본에 안주한 미군 병사 찰스 로버트 젠킨스(77, Charles Robert Jenkins)가 최근 LA타임스 기자와 만나서 한말이다. 최근 한반도 위기 상태에서 주인공을 만난 LA타임스는‘북한은 사람이 살 곳이 못되는 나라’로 그의 입을 통해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는 현재 일본의 조그마한 섬에서 유명인사 대접 을 받으면서 생활하고 있다고 LA타임스가 지난13일 보도하면서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다. LA 타임스는 최근 탈북 이후 일본인 아내의 고향인‘사도 섬’(Sado Island)에서 쿠키 샵을 운영하며 생활하고 있는 젠킨스의 스토리를 비중있게 소개했다. 타임스 기자 조나탄 카이만은 젠킨스가 직접 운전하는 차에 동승해 차중 인터뷰도 촬영해 LA타임스 동영상 뉴스에 띄우기도 했다. 그의 자서전‘어쩔 수 없었던 공산주의자’(The Reluctant Communist)는 일본에서만 3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는 미군 역사상 최장 기간 탈영병이었다. 파란만장한 그의 스토리를 LA타임스와 외신을 종합해 정리한다. <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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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로버트 젠킨스는 지난 13일 LA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자신의 여권은 작년에 만료 되었으며 매일 CNN과 한국어 방송을 하루 종일 보며 보낸다고 했다. 그는 현재 일본에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최근 한반도 위기와 관련한 질문에도 “김정일의 아들인 김정은이 북한의 통치자로 계승 한데 대해 놀랄 일이 아니었으며 똑같이 잔인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에 놀랐지 않으며 핵무기 개발 에 더욱 열심 인 것으로 보였다.”고 생각을 밝혔다. 이어 젠킨스는 미국인들이 북한을 관광객으로 방문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것(북한여행)은 미쳤다”. “북한은 외국인을 이용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은 국가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커다란 감옥”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사망 한 미국 대학생 웜비어(Warmbier)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다. 북한의 낙후된 의료 시스템이 웜비어의 죽음에 기여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40년만에 일본인 부인따라 2004년 일본 정착
북한으로 월북한 또 다른 미군동료인 제임스 드레스녹 팔에 “U.S. Army”라는 문신을 제거하기 위해 마취 없이 칼로 뜯어냈을 때는 정말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했다. 그는 당시 북한은 마취약이 적어서 총상자 치료에만 썼다고 한다.
소박하고 평범한 삶이지만 젠킨스는 북한에 없던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되어 지금은 몹시 행복 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현재 일본 도쿄에서 약 300km북쪽에 있는 사도섬 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으며 금광의 설비 관리자와 기념품 가게에서 쿠키 판매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관광객들도 그를 알아보고 함께 사진을 촬영하는 등 유명세도 누리고 있다.
그의 부인인 소가 히토미<고백>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출판한 바 있다. 1965년 주한 미군 복무 중 탈영해 월북했던 젠킨스씨가 다시 언론 인터뷰를 갖고 “북한에서 개 처럼 살았다”고 밝혔다. 젠킨스씨는 1965년 월북 이후 40년 가까이 북한에 거주하다가 2004년 일본인 피랍자였던 아내를 따라 일본에 정착했다.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젠킨스씨는 “북한에는 먹을 것도 없고, 식수도 부족하다. 전기도 없다. 겨울에는 추위와 싸워야 한다”며 “북한에서 나는 개같이 살았다”고 말했다. 올해 77세이지만 나이보도 더 늙게 보이는 젠킨스씨는 “아직도 북한에 관광하러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게 경악 스럽다”며 “북한은 외국인을 붙잡아두기 위해 무엇이든 할 나라다. 북한에 여행 가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LA타임스는 젠킨스씨가 지난 3월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살해당한 김정남 소식을 들은 이후 불안에 떨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내 딸들의 안위가 무엇보다 걱정된다. 딸들에게 외딴곳에서 운전할 때 는 경찰이 불러 세워도 절대로 차를 멈추지 말라고 했다. 북한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젠킨스씨는 또 “북한의 상황이 바뀌려면 북한 정권 전체가 무너져야 한다”며 “김정은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이라고 말했다.
젠킨스와 두 딸은 한국말은 잘하지만 현재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중이다. 신문은 “일본에서 아내 및 두 딸과 함께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젠킨스는 쿠키 가게를 운영하면서 연간 5만달러 정도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면서 “그러나 젠킨스는 아직까지도 외로움을 느끼고 월북한 것에 대한 죄책 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에서 나는 개같이 살았다”
젠킨스는 24세 때인 1965년 주한미군 상사로 근무하다 맥주 10병을 마신 뒤 비틀거리면서 비무장 지대(DMZ)를 넘어갔고 이후 40년 동안 북한체제를 선전하는 각종 영화에 출연하고 김일성의 영어교사를 했으며 북한에 납치됐던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두 딸을 낳고 살았다.그러다 2002년 고이즈미 일본총리의 평양방문으로 그의 아내가 일본으로 돌아왔고 자신과 두 딸은 2004년 북한에서 전격 석방됐다.
최초의 `월북미군 겸 미군 최초 역사상 최장기간 탈영병’ 이란 오명을 지니고 있는 젠킨스는 2004년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가 조지 W. 부시에게 관대한 처벌을 요구했었다.
젠킨스는 노스 캐롤라이나 에서 출생, 월북미군 겸 북한이탈 외국인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미 1기병사단 8연대 1대대 소속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주한 미군 중사로 복무하던 그는 1965년 1월 5일 새벽 비무장지대 수색 정찰 임무 도중 월북했다.
그는 당시 한창이던 베트남 전쟁에 파견되어 전사할까 두려워 북한으로 갈 경우 소련으로 인도될 것이라 생각하고 월북했다. 그러나 북한은 젠킨스를 비롯한 월북 미군들의 이용가치를 알고 있었고 끝내 젠킨스는 원하던 것과는 달리 소련군에 넘겨지지 않아서 평생토록 월북한 것을 후회 했다고 한다.
월북 이후 그는 선전 영화 출연과 영어 교사 일을 하며 지냈는데 1968년 납북된 미 해군 함정인 푸에블로 호에 대한 사건을 다룬 선전 영화에 선장으로 출연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군 장교들한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북한 영화 ‘대결 `’에서 USS 엔터프라이즈호의 선장 역활을 맡았다.
북한은 8년 동안 젠킨스와 또 다른 월북 미군인 제리 웨인 패리시(10,Jerry Wayne Parrish), 래리 앱시어(19, Larry Abshier), 제임스 드레스녹(21, James Dresnok)을 한방에 가두어 두고서 김일성 주체사상 등 세뇌교육을 시켰고, 한글을 깨우치도혹 떼리면서 가르쳤다. 1966년 어느날 4명의 월북 미군들은 평양에 있는 러시아 대사관에 들어가정치적 망명을 신청 했다. 러시아 대사관은 이를 거부하고 이들을 북한당국에 인계했다. 당시를 회상한 젠킨스는 “아…이제는내가 죽기전에는 북한을 빠져 나올 수 없음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1972년에 그들에게 공민증을 부여하고 각각 따로 살도록 하면서 일자리를 부여했다. 이후 1970년대 중반에 납북된 일본인 여성 소가히토미를 만나 1980년 결혼하였고, 두 딸을 둔 부부는 20여 년 넘게 북한에서 결혼 생활을 이어왔다. 당시 21세의 일본 여성 소사 히토미와 결혼 젠킨스씨와 일본에서 납치되어 북한으로 온 소사 히토미씨는 북한 당국에 의한 강제 결혼 이었지만 서로 처지를 생각해 사랑하게 되었다. 젠킨스는 일본어로 “잘자라” (오야수미)라는 말을 배워 잠자리에 들면서 ‘오야수미’라고 했으며, 그때마다 소가는 ‘굿나잇’이라고 영어로 말했다고 그의 회고록에서 적었다. 당시 북한의 보복을 우려해 회고록 발간을 극구 반대하는 아내에게 젠킨스 씨는 자신의 경험을 세상에 말할 때가 됐다며 출간을 강행했다.
부시 정권, 젠킨스에 금고 30일과 불명예 제대 판결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방북해 북일 정상회담을 가진 후 그의 삶에 큰 반전이 생겼다.
북한은 북일 정상회담에서 납북 일본인 13명의 존재를 인정하였고, 생존한 5명의 일본 송환에 합의하였다. 그 중 하나였던 젠킨슨의 아내 소가히토미는 일본으로 송환되었고 젠킨스은 두 딸과 함께 북한에 남겨졌다. 이후 2004년 5월 고이즈미 총리의 2차 방북 당시 일본 송환을 제의받았으나 미국 정부의 자신 에 대한 처분이 두려워 일본 송환을 보류하였으나 7월 인도네시아에서 일본 정부 주선으로 아내 와 재회하였고 이를 통해 북한을 떠날 용기를 얻게 된 젠킨스는 월북 39년 만에 북한으로부터 벗어났다.
아내가 일본인이란 점이 일본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가 조지 W. 부시에게 관대한 처벌을 요구할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동정을 샀다. 젠킨스는 일본 도착 직후인 2004년 10월, 주일 미군 사령부에 자진 출두하였고 ‘미군 역사상 최장 기간 탈영병’ 이라는 오명 아래 군사 재판을 받았다.
부시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많은 장병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탈영병을 관대하게 처벌 하는 것에 난색을 표했으나 부시 정권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젠킨스는 금고 30일과 불명예 제대 판결을 받았다.
젠킨스씨에게 현재 두 딸 미카(34)와 브린다(32)가 있다. 지금그들의 삶은 북한보다 훨씬 좋다. 1990년대 북한이 궁핍했을때도 젠킨스씨에게는 매달 쌀과 비누, 의류, 담배 등을 배급해주었는데 대부분 북한 주민에게는 해당이 안되었다.
당시북한 에서는전국적으로 수백만명이 굶어 죽었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곳은 지옥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일본 과자 센베를 팔고 있는데, 젠킨스 씨를 알아보는 관광객들이 꽤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젠킨스 씨와 부인 소가 히토미 씨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아름다운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여기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젠킨스 씨 부부가 북한에서 겪은 일들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제 사도섬에서 가족과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지 13년이 다 돼 가지만 북한에서의 생활은 잊혀지지 않는다.
북한 납치된 일본인 부인과 보복 두려움
지금도 주체사상이란 말이 나오면 북한에서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강제로 암기해야 했던 김일성 교시가 기계적으로 입에서 줄줄 나온다. 한 마디라도 틀리면 사상이 해이하다는 이유로 두들겨 맞고 자아비판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부인 히토미 씨가 40여 년 전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됐던 곳 근방이라는 사실도 젠킨스 씨 가족에게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젠킨스 씨는 자신이 아직도 북한에 남아 있다면, 두 딸은 아마도 한국에서 간첩으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에 납치된 외국인들 중에 가족이 평양에 볼모로 붙잡힌 채 해외에서 간첩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거라는 것이다. 젠킨스 씨는 북한 당국이 그를 반역자로 간주하고 보복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냐는 질문에 ‘밤에는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는 “북한 당국은 내가 빨리 죽기를 바랄지 모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