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김 ‘연방하원 도전’…에드 로이스 공식 지지받아
당선되면 이민 역사상 최초 한인 여성 연방하원
김창준 전 의원 뒤를 이어 20년만에 ‘쾌거’
미주한인사회는 2018년 새해들어 이민 역사상 최초의 한인 여성 연방하원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다. 또한 한인으로는 두번째 연방의회 입성하는 쾌거를 이룩할지 주목된다.
최근 대표적인 친한파의원 에드 로이스 연방 하원 외교위원장이 전격적으로 11월 중간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가운데 로이스 의원이 관할해온 연방하원 캘리포니아 39지구에 한인 영 김(Young Kim) 전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이 출마한다.
에드 로이스 의원은 은퇴 선언 다음날인 9일 자신의 후임으로 영 김 전 의원을 공식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13선의 거물급 정치인 지지에 날개를 단 영 김 전 의원의 연방의회 입성 성공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영 김 전 의원은 캘리포니아 주의회에 진출하기 전 로이스 의원 사무실에서 20여년 간 일해오면서 인맥을 다져온 정책 보좌관 출신이다.
최근까지 OC수퍼바이저 4지구 선거를 준비해온 영 김 전 의원은 로이스 의원의 공식지지가 발표된 직후 소셜미디어를 통해 연방하원의원 선거출마를 공식화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LA, 오렌지, 샌버나디노 등 3개 카운티에 걸쳐 있는 연방하원 캘리포니아 39지구는 한인 밀집지인 풀러튼, 라하브라, 브레아, 요바린다, 로렌하이츠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아시아계 유권자들이 많은 지역이다.
39지구 공화당 출마 후보에는 영 김 전 의원 외에도 미셸 박 스틸 OC 수퍼바이저 위원장, 링링 챙 전 주 하원의원, 밥 허프 주 상원의원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LA 타임즈는 에드 로이스 의원이 영 김 전 의원을 공식 지지함에 따라 김 전 의원을 중심으로 선거 후보 단일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주류정치에 풍부한 경력 소유자
영 김은 1975년 한국에서 초등학교 졸업 후, 가족과 함께 괌으로 이주했다. 미지의 섬나라에서 적응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차분한 근면성으로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여, 학교 대표로 학력 경시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중학교를 괌에서, 고등학교는 하와이에서 마친 후, 캘리포니아 USC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학창시절, USC 한인학생회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학생으로 영 김 후보가 선정되기도 하는 등 주변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 하는 활동적인 학생이었지만, 괌을 거쳐 하와이로 또 다시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게 되면서, 섬이 아닌 큰 대륙에서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도전의식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절실히 찾아가던 시기에, 같은 대학 선배로, 한인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찰스 김(전 한미 총 연합회장)과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며 시각이 넓어지게 되었고, 그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주 상원의원이었던 에드 로이스 연방 하원의원의 보좌관으로, 23년 동안 지역구담당 및 아시아 정책보좌관을 역임했다.
정책보좌관을 역임했던 그녀는 한미 자유무역 협정 통과, 한국의 군사 최혜국 대우, 정신대 규탄 결의안 통과, 탈북자 인권문제 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고, ‘영 김이 맡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소문이 났다. 한국 연예인 방문 문제, 비자문제, 사관학교 입학 등, 주민들의 고충과 문제점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며 지역사회를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해오고 있다.
한편, ‘LA서울’이라는 30분짜리 토크쇼를 7년 반 동안 매주 진행했고, 한국 아리랑TV의 리얼토크 (Real Talk) 진행자로 종횡무진하는 유능한 방송인이기도 했다.
활기 넘치고, 평화롭던 영 김 가정에 큰 시련도 있었다. 뉴욕 9.11 테러 사건이 전파를 타던 바로 그 시각 갑자기 둘째 딸이 발작증세를 보이며 쓰러져 응급실로 급송되었고, 병명은 뇌종양이었다. 바로 수술을 받았으나, 그 후 6년 동안, 시도 때도없이 경기를 일으키고, 수차례 응급실에 실려가는 아이를 보며 큰 가슴앓이를 하였다. 큰 수술 후에 완치된 둘째딸은, 암환우들을 위해 대학에서 모금활동을 했다. 둘째딸의 고통을 통해 오히려 온 가정이 하나로 뭉치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 이를 통해 어려움에 처한 많은 가정을 보살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영 김에게 남편은 어떤 존재인지 묻자, 남편은 그녀를 정신적으로 이끌고 지켜준 멘토라고 대답 한다. 그는 항상 어떻게 하면 남들을 도와줄까를 고민하는 사람이고 그런 그의 모습이 존경스러웠으며, 비영리단체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남편은 14년된 차를 모는 소박한 생활을 하며 자녀들을 꾸짖기 보다는 대화를 많이 한다. 사람이 먼저 명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상한 아버지며 언제나 고마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정치계에 출마를 결심하게 된 것 또한 정치 전문가인 남편의 강력한 추천이었다고 말한다. 바쁜 아내를 대신해 집안일을 맡아주고, 선거 시에 전략 수립, 정치 자문, 모금운동을 활발히 진행 해주고 있다. 각종 행사 참여시 곁에서 손을 꼭 잡아주고 힘을 실어준다고 한다.
항상 바쁜 와중에 자녀들과의 관계, 교육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자녀들이 모두 교회에서 찬양팀 사역이나 선교에 앞장서며, 항상 밝게 잘 자라주고 있다고 감사하다고 전하며 가능한 매일 온 가족이 30분동안 성경을 읽고 함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고 서로 존중해 주는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자녀의 교육은 서로 배려와 존중으로 대하고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서로 보며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인사회와 미국사회에 다 필요한 정치인 영 김의 새로운 도전에 한인사회가 다시 뭉쳐 그녀를 워싱턴DC 의사당으로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