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특집 ‘100년의 약속 어떻게 재현할까’ 2

이 뉴스를 공유하기

‘미주는 3·1운동의 원동력 전초지’

지난 2016년에 LA코리아타운에서 아주 웃기는 행사가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 생겨난 ‘3·1 운동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당시 상임대표 박남수)측은 LA에 와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민족대표 330명 중 미주지역 대표 20여명에 대한 위촉식을 가졌다. 당시 타운내 만세JJ 그랜드 호텔에서  열린 위촉식에서 한국에서 온 박남수 대표는 “국내외로 민족대표 330명을 선정했다” 면서 미주를 포함해 중국 러시아 지역의 민족대표를 위촉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설명했다. 그는 “지난 1919년 3·1운동의 표상인 33인의 존재가 오늘 대한민국의 존재를 가져오게 됐다”면서 “그 이후 100년이 지나면서 ‘제 2의 3·1 운동’으로 이어지는데 큰 역할을 할 민족대표가 필요하다” 면서 국내외 330명 중 미주지역 민족대표들 20여명에게 일일이 위촉장을 주고 격려했다. 하지만 미주 지역 민족대표에 대한 선정 기준이나 추천 등이 객관적으로 알려지지 않아 비난이 고조 됐었다. 일부 위촉대상자들은 자신이 왜 위촉됐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당시 위촉장을 받은 인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가? 이름을 대면 대부분 잘 알려진 사람들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정작 3·1운동 100주년이 됐다. 지금 LA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한다는 연합단체가 기념행사를 무려 19개나 선정했지만 ‘미주지역 3·1운동 정신’과는 동떨어진 행사라는 지적이 많다. <성진 취재부 기자>

LA 3·1운동 100주년 범동포위원회가 마련한 기념행사는 2월 2일부터 4월 11일까지 총 19개 종류다. 마치 100주년 기념행사를 스와밋 마켓처럼 잡다하게 늘어만 놓아, 한가지라도 알차게 행사를 하여 길이 후세에 남길 생각이 별로 없는 듯하다. 왜 우리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자는 것이다. 3·1운동과 미주한인사회 그리고 미국은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어떤면에서는 미국과 미주 동포사회가 역사적인 3·1운동

▲1920년 3월 1일 중가주 3·1운동 퍼레이드

▲1920년 3월 1일 중가주 3·1운동 퍼레이드을 열어주는 이정표 역할도 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 1월 8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오늘날의 연두교서인 연방의회 연설을 통해 ‘모든 민족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정부를 가질 수 있다’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의 원칙’(The Self-Determination of small nations)을 선포했다. 이는 당시 한국 등 약소민족들에게는 복음이나 같았다. 당연히 일제강압을 받던 한국인들도 이에 크게 자극을 받았다. 당시 도산 안창호가 주축이 된 대한인국민회가 윌슨 대통령 연설에 자극을 받아 독립청원운동을 벌여 당시 1919년 1월 파리평화회의에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 등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918년 11월 뉴욕에서 조직된 김헌식의 ‘신한회’도 정치력으로 미국 정계에 문을 두드렸다.
신한회는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국 회의에 참가해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다. 이같은 소식들이 일본에 보도되자 동경에 있던 한국 유학생들이 크게 자극 받아 YMCA에서 토론회가 열리고 끝내 3·1운동의 도화선인 ‘2·8 독립선언’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뉴욕한인교회의 신자인 김 마리아는 동경에서 유학생이었는데 이 ‘2·8선언문’을 몰래 한국으로 가지고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나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크게 옥고를 치루었다. 당시 그녀는 유관순과 함께 복역했다. 김 마리아는 나중 복역을 끝내고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돌아와 ‘근화회’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이끌었는데 동포사회에서는 그녀를 “살아있는 잔다크”로 불렀다. 드디어 조국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2012년 3·1운동 중가주 재현행사

▲2012년 3·1운동 중가주 재현행사

받아 서재필 박사와 이승만 박사등이 주축이 되어 그해 4월 14일-16일 필라델피아에서 제 1회 한인대표자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열었으며 빗속에서도 시가행진을 벌여 “대한독립만세!”를 미국 대도시에서 외쳤다. 바로 미국으로 확대된 3·1독립만세운동이었다.(별첨 서동성 원로변호사 기고문 참조) 조국에서의 3·1운동은 잠자던 한국인들이 깨어난 것이다. 1910년 일제에 강압적으로 식민지가 된 한반도는 독립운동이 무르익지가 못했다. 그런데 미국땅에서 독립운동의 횃불이 올랐다. 을사보호조약이 1905년에 체결되어 외교권이 무너지고 점점 나라가 망해가는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 장인환 두명 애국 청년이 당시 고종 황제의 미국인 고문 스티븐슨이 조선을 비하시키고 일제를 두둔하자 오클랜드 역에서 저격해 최초로 독립운동의 효시가 됐다. 이 전명운-장인환 의거는 나중 1910년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암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미주는 3·1운동의 전초지

1919년 3·1운동 이듬해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 1일은 조국은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독립운동 1주년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미국 캘리포니아주 중가주 지역 리들리(Reedly)와 다뉴바(Danuba)에서 3·1운동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들리 인근 다뉴바에서1920년 3월 1일 정오 이 지역 한인들이 세계 최초로 3·1운동 1주년 기념 퍼레이드

▲3·1운동 1주년 기념 퍼레이드

▲3·1운동 1주년 기념 퍼레이드

를 벌여 미국사회에서 ‘대한민국이 독립국’임을 만방에 알렸다. 당시 이 지역 신문인 ‘다뉴바 센티넬’ (Dinuba Sentinel)은 “한인들이 아침 10시부터 밤까지 독립운동 행사를 벌였는데 시가행열에 350명 이상이 참가했다”면서 시가행진 사진을 게재하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시 이 지역의 모든 한인 여성들은 흰옷으로 정장하고 남자들도 정장하여 도열한 가운데 대한 제국 군인 복장을 한 대표가 말을 타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수십 대의 자동차와 도보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날리며 시내 중심가에서 시가행진을 하여 미 주류사회에 한국이 독립국임을 알렸다.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한 한인들이 500명 내외로 당시 미인구센서스 통계로 볼 때 350여명이 시가 행렬에 참가했다는 것은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거의 모두 참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북가주의 윌로스의 한인비행학교 조종사가 당시 시가 행진에 축하 비행하려고 비행하여 오다가 기상 악화로 프레스노까지 상공에서 다시 회항해 다뉴바 상공에는 이르지 못했다.

무엇보다 당시의 3·1운동 기념 시가행진은 전세계를 통틀어 유일했던 한인들의 만세행렬이었다. 그 이후로도 3·1운동 시가행렬은 해마다 개최되다가 한인 인구가 줄어들면서 중단됐다가 최근 들어 매 2년에 한번씩 재현대회를 개최하고있었는데 그나마 더이상 개최되지 못했다. 한편 뉴욕에서의 1921년 당시 3·1운동 2주년 기념식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날 뉴욕 맨하탄 43가에 있는 타운홀에는 비가 내리는 중에도 무려 1,300명의 인파가 몰려 3·1운동 2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당시 뉴욕에는 한인들이 100여명에 불과했는데, 이처럼 많은 인파가 몰린것 은 일본의 한국 식민지를 반대하는 미국인 친구들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날의 3·1운동 기념행사를 주최하고 진행한 주인공은 한인이 아니고 미국 여성 킴벌랜드 였다. 이같은 미국인 친구들이 3·1운동 기념행사에 참가한 것은 다름아닌 서재필 박사 노고였다. 특히 리들리에서는 1921년에 리들리 타운퍼레이드(Reedley Town Parade)에서 한미수교(1882)를 축하하는 한인 꽃차를 출품해 한국이 1882년에 미국과 수교조약을 맺은 독립국가임을 과시하였 다. 이처럼 중가주 지역은 미주 이민사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독립운동 성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3·1운동을 기억한 중가주

중가주는 1903년부터 시작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의 한인 이민들이 하와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면서 샌프란시스코와 LA 중간에 있는 중가주 지역 과일 농장에서 일을 하기위해 옮겨왔던 곳이다. 중가주 지역에 한인이 처음 도착한 것은 1905년으로 추산되며 1906년에 프레즈노의 한인 노동자 22인이 공립협회 지회를 설립하였으며 1914년에는 대한인국민회(KNA) 지방회가 조직 되었다. 1920년대 중가주 리들리와 다뉴바 지역은 대한인국민회 이외 대한여자애국단을 포함해 대한여성 구제회등을 포함한 애국단체들이 활동하던 유서깊은 지역이었다. 당시 이지역은 과일 단지로 유명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했던 선조들이 대륙으로 오면서 이 지역에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이 지역에서 한인 김호, 김형순이 설립한 ‘김 브라더스’(Kim Brothers) 가 큰 사업체로 등장 하면서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조국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중가주 지역은 독립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독립자금의 중요한 공급처가 되었다. 그래서 이승만 박사와 안창호 선생이 기회있을때 마다 이 지역을 방문하였다.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많은 선조 이민들은 주로 총각이나 홀아비들이 많았으며, 과일농장에서 일한 돈으로 의식주 이외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기부하다가 쓸쓸하게 죽어 이곳 리들리와 다뉴바 공동 묘지에 잠들었다. 이곳에 안장된 선열들의 묘들이 나란히 묻혀 있다. 이는 ‘김 브라더스’의 대표인 김호 선생이 쓸쓸히 죽어간 선열들을 위해 미리 묘지를 사두었기 때문이다.

그후 세월이 흘러 조국이 독립되었으나 이곳 선열들의 묘역은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이 성역을 1992년부터 중가주해병전우회의 김명수 회장을 포함한 각 지역 해병전우들과 지방 유지들이 묘역 성역화 작업에 나섰다. 최근에는 조경사업까지 완성시켰다. 그리고는 1992년부터 매년 메모리얼데이와 광복절에 리들리 묘역과 다뉴바 묘역에 잠든 선조들 의 혼을

▲3·1운동 발생소식을 미국에 알린 전보문

▲3·1운동 발생소식을 미국에 알린 전보문

달래주는 ‘애국선조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2014년 1월 9일 대한민국 국회는 당시 묘역을 방문한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인 김을동 국회의원을 통해 김명수 회장에게 그의 공적을 기려 국회의장 공로장을 수여했다. 한편 지난 2013년에는 또다른 3·1운동체인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이원범. 2018년 작고)가 LA를 방문해 미주지부를 설립해 3·1운동 100주년 기념 사업을 추진한다고 했다. 그해 8월 당시 3·1운동기념사업회는 LA를 방문하여 LA한국교육원에서 광복절 기념식과 3·1 USA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3·1운동기념사업회 미주지부는 “3·1정신을 2세들에게 여러 행사와 교육 프로그램 을 통해 3·1정신과 리더십을 가르치고 다가오는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들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 이후 100주년 기념행사와 관련해서는 “범국민적”이라는 구호와는 달리 뚜렸한 움직임이 없었다.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행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과제는 미주에서의 3·1운동 관련 문헌 자료나 유적지 발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내는 물론 미주 동포들도 알지 못하고 있는 미주내 3·1운동에 관한 자랑스런 이민역사를 발굴하는 것이 또 다른 100년을 위해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대한민국 건국에서 미국의 이민 선조들이 행한 3·1정신의 계승 이 원동력이었음을 미주이민사는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거품이 되어가는 역사를 다시금 3·1운동 100주년을 기해 새로운 미래를 향한 물줄기를 변화시켜야 한다. 오늘날 3·1절 기념식에는 100명도 모이기가 힘들었다. 100년전 뉴욕에서 1,300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던 그 영광의 날을 올해 100주년에는 다시 볼 수 있을지…. 100주년을 맞는 미주사회가 그날을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

서동성 원로 변호사 특별기고

미주에서의 3·1운동의 역사적 의미

대한민국 설립 초석 ‘한인연합대회’
역사적 재조명은 반드시 필요하다

서동성 원로변호사는 언론인이며 변호사이기도 하다. 지난 동안 한인이민역사연구원 대표. 남가주한미변호사협회 회장.  LACC 신문학 교수. 미주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LA공동회장. 한미박물관 부이사장 등을역임했다. 서 변호사는 특히 미주독립운동사에 족적을 남긴 독립운동가이며 ‘독립신문’ 발행인이고, 서울의 독립문 설립자로 미국에서 최초의 한인으로 시민권을 받은 서재필 박사의 형 서재춘씨의 증손자이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서 변호사가 특별기고를 보내왔다. <편집자 주>

올해는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기미(己未·1919)년 3월 1일, 남녀노소 3000만 온 국민서동성이 한날 한시에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전국에서 일제히 일어나, 우리가 일본의 속국이 아니라 자유인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하면서 독립운동의 횃불을 드높이 치켜든 해이다. 이 숭고하고 역사적인 장거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국에선 이미 2년 전부터 여러 정부, 교육기관. 사설 단체들이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해 왔고, 우리가 사는 미주에서도 여러 곳에서 갖가지 행사를 준비해 왔다. 특히 당시 미주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필라델피아에서는 작년부터 야심찬 기념행사를 기획해 오고 있다고 한다. 3·1운동이 터지면서 나라 안팎 여러 곳에서 독립운동이 퍼져나갔지만 특히 나라 밖 두 군데에서 역사적으로 특기할 일이 벌어졌다. 그 하나는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고, 또 하나는 필라델피아에서 4월 14일부터 3일간 미래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지는 한인대회가 열린 것이다. 당시 상하이에 머물고 있던 현순 목사에 의해 전보를 통해 3·1운동이 샌프란시스코 국민회에 전달되고, 그 소식은 다시 안창호에 의해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에게 전달되었다. 서재필은 이승만과 함께 미 전역에 흩어져 있는 한인 지도자를 소집, 이른바 제 1차 한인연합대회(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그 당시 미주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지도자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승만, 정한경, 임병직, 윤병구, 조병옥, 김병구, 유일한, 장택상, 임영신 등 포함됐다. 그 당시 서재필이 거주하면서 활동 거점이 바로 필라델피아였고 시정부, 공공기관이 당시 조선에 매우 우호적이었기에 거사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200년 전에 미합중국이 태어날 때에 건국을 설계하는 대륙회의 (Continental Congress)가 두 번에 걸쳐 바로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역사적 연관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 모임에서 새로운 나라는 어떻게 세울 것인가, 어떠한 형태의 국가를 건설하고 어떠한 정치이념 아래 나라를 다스릴 것인가 같은 국가 수립의 근본적인 골격이 짜여졌다.

조선은 1910년 한일강제합병으로 이미 사라졌으니 새로 세워지는 나라는 왕권정치 제도가 아니고 공화국(Republic) 체제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지배적이었다. 이 역사적 회의는 4월 16일 마지막 회의가 열렸던 리틀 시어터(소극장)에서부터 필라델피아의 독립기념관까지의 구간을 시가행진으로 마감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가운데 모든 참석자들이 우산을 받쳐들고 질서정연하게 행진을 했다. 이 행진은 모국 전역에서 수없이 벌어진 3·1운동 시위 행진을 미국 땅에서 재현한 것이다. 필라델피아 시는 경찰악대가 앞장을 서 주고 경찰 기마대가 행진대열을 좌우로 호위해 줌으로써 억압받는 조선민족에 대한 시정부의 호의를 보여주며 행사에 힘을 실어줬다. 올해 필라델피아에서는 서재필기념재단이 주축이 되어 범동포적으로 100년 전의 시가행진을 재현한다는 소식이다. 또 3·1운동 당시 파고다 공원의 독립선언서 낭독도 재현한다고 한다. 듣기만 해도 신나는 계획이다. 이곳 남가주에서도 이미 2년 전부터 미주3·1 여성동지회가 주축이 되어 1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해 왔다는 소식은 있다. 기대가 된다. 중가주에서는 3·1운동 1주년인 1920년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살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남달리 많이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던, 리들리 인근 다뉴바에서 애국부인회가 주동이 되어 시가행진을 했다. 이후 이 지역에서는 매 주기적으로 시가행진을 재현해 오고 있어서 올해도 그 뿌듯한 광경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올해는 지역적인 행사로 국한하지 말고 북가주와 남가주를 총망라하고 나아가서 전국적인 행사로 발전시켰으면 좋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라델피아와 다뉴바에서 재현하는 시가행진이, 1919년 이후 모국과 여타 지역에서 펼쳐졌던 수많은 시가행진의 종합판 성격으로 재현·승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엇보다 1919년 4원 14일부터 16일까지 사흘 동안 필라델피아에서 진행된 제1차 한인 연합 대회에 대한 학술적, 역사적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은 바로 3·1운동 정신에 기반을 둔다고 대한민국 헌법 서문에 명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설립의 초석이 된 한인연합대회의 역사적 재조명은 반드시 필요하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
최신기사
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