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세상 속으로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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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세상 속으로 나가고 싶다”

코미디계의 거장 ‘쟈니 윤’근황
요양병원에서 나홀로 치매 투병 중

한때 “코미디계의 거장”이라고 불린 쟈니 윤(82, Johnny Yune)씨의 근황을 본보는 지난해 5월 10일자 보도에서 “다시 세상 속으로 나가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소개 했었다. 다른 한인 언론들도 ‘쟈니 윤은 치매로 양로병원에서 힘들게 지내고 있다’라고 했다. 올해 ‘황금돼지해’ 를 맞아 정월 대보름을 앞둔 지난 16일 LA인근 헌팅톤 양로병원에 있는 쟈니 윤을 10개월 만에 다시 찾았다. 반가운 것은 지난해 방문 당시 보다 혈색이 좋아졌지만, 거동은 역시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하는 불편함은 그대로였다. 그는 ‘나를 알아보겠는가’라는 기자 질문에 고개를 끄덕 거렸다. “자니 카슨 쇼”를 그리워한다는 그는 “다시 세상 속으로 나가고 싶다”고 또다시 말했다. 하지만 사랑, 명예, 재산도 사라진 지금 그에겐 지난날의 기억이나 추억도 한조각 한조각씩 사그라지는 마당에 세상 속으로 다시 나갈 수가 있는가? 지금 캄캄한 곳에 있는 그에게 한줄기 빛이라도 비출 수 있을까? 좋은말 글귀에 이런 글이 있다. “당신이 아플 때 당신의 명예나 재산이 당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오직 당신의 친구나 가족만이 당신 곁은 지켜줄 것이다” 가족만이라도 지켜주면 다행이다. 누구나 한번쯤을 생각해 볼 글이다. <성진 취재부 기자>

쟈니윤지난 16일 토요일 낮 점심시간이 다가올 무렵, 쟈니 윤이 지내고 있는 헌팅턴 양로병원에 도착했다. 마침 그는 다른 환자들과 함께 공동홀에서 점심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이 한인 노인들이 거주하는 그곳에, 주말이지만 가족 친지 등 방문객이 보이지 않았다. 이날 자니 윤을 만나는 자리에 기자는 언론인 정진철(Glin-TV 대표)와 타운에서 코메디언으로 잘 알려진 김막동(김막동 엔터테인먼트 대표)단장과 함께 했다. 정 대표와 김 단장은 자니 윤과는 평소 막연한 사이이다. 김막동 단장은 “할 수 만 있으면 이자리에서 위로 쇼라도 해주고 싶다”고 밝혔으나, 양로원 규정상 당장 그자리에서 공연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날 쟈니 윤은 지난해 4월 27일 방문 때 보다 안색은 좋아 보였으나, 말수는 극히 적었다. 기자가 말을 건넬 때 마다 답변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나를 알아 보겠는가’라고 하자 약간 미소를 띄우며 고개만 끄덕였다. 알아듣는 표정이었다. 손을 잡으니 온기가 느껴졌다. 그에게 계속 질문을 하면 한참만에야 힘들게 답변을 했다. 이날 그와 대화를 나누던 중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하여 기자를 놀래게 했다. 그는 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이 감옥에 있는 것을 아는가’라고 물었는데 “알고 있다”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가 ‘박 대통령이 감옥에 있는 거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했더니, 뜻밖에 “연락을 했다”고 했다. 이 말에 놀라서 ‘언제 연락을 했는가?’라고 했더니, “한 달 전에 했다”는 답변이 나왔다. 조크(?)치곤 너무 했다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답변이었다. 기자가 다시 ‘언제 박 대통령과 연락했는가?’라고 물었더니, “한 달전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박 대통령이 무어라고 했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잘 지내는가 라고 했다”라고 답했다. 또다시 기자가 ‘박 대통령과 어떻게 연락을 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더이상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기억속에 살아가는 노인’

이날 쟈니 윤은 ‘지금 누구를 가장 보고 싶은가?’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숙이며 입으로 손을 가져 가며 거의 울먹이듯한 표정을 지으며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요즘 누가 찾아오는가?’라는 물음 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쟈니 윤을 평소 알고 있던 이웃 환자는 “동생이 가끔 방문하고 있으며, 전 부인은 큰 명절 때나 들리는 정도이고 그 이외는 없다고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가장 명확하게 답변을 한 내용은 ‘자니 카슨 쇼를 기억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분명하고 똑똑한 발음으로 “잘 알고 기억한다”면서 “다시 그때처럼 하고 싶다”며 눈을 반짝였다. 지난 해 방문했을 때는 그는 눈도 흐려 보였고 안색도 매우 초췌했는데, 이날 그의 모습은 비록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지만 악수하는 손에도 힘이 느꼈고, 안색도 맑았다. 이날 함께 동행한 Glin-TV의 정 대표가 지난 2013년에 쟈니 윤과 인터뷰한 장면을 스마트폰 영상으로 보여주자 눈빛을 반짝이며 영상을 계속 쳐다 보았다. 쟈니 윤의 어깨를 계속 주물러주고 과자도 건네주던 김막동 단장도 “선배 코메디언이 이처럼 외롭게 쓸쓸하게 지나는 모습이 마음에 아리어 온다”고 말하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지난 3년 전 그가 한국에서 두번이나 쓰러진 후 LA로 돌아와 OC 소재 터슨틴 양로병원에 처음 입원했을 당시 기자가 찾아갔을 때만 하더라도 가벼운 조크도 하고 재기를 하려는 의지도 분명하게 밝혔었다.

그러나 지난해 4월에 LA인근 헌팅턴 양로병원으로 옮긴 후 방문했을 때는 휠체어에 의지한 “잊혀진 노인”이었다. 머리카락은 흰눈처럼 변했고, 혼자서는 거동도 못한채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으로 보였다. 다만 “세상 속으로 가고 싶다”고만 말했다. 그는 지금 3명이 한 룸에 사용하는 방에서 지낸다. 작은 침대와 작은 서랍이 있는 작은 탁자가 놓여있는 그의 침대 머릿맡에는 지난날 애용했던 갈색의 운동 모자 2개가 걸려 있다. 왼쪽 벽면에는 작은 태극기와 성조기가 달력과 함께 부착되어 있는데 달력은 아직도 1월이었다. 그 옆에는 종이로 만든 ‘하와이언 레이’가 걸려 있다. 이것이 그의 지금의 전 재산이다. 이곳에서 만약 나갈 수 있어도 갈 집이 없다. 그는 40여년 전 미국에서 처음 한창 나갈 때 한 회 출연료만도 2만 5천 달러였으며, ‘자니 카슨 쇼’ 그리고 NBC ‘쟈니 윤 스페셜 쇼’등에서 미국인들을 제대로 웃긴 최초의 동양계 코메디언이었다. 프랭크 시나트라와 봅 호프와도 친하게 지내면서 거액을 벌었다. 그는 NBC 스페셜 쇼에서 “한국에서 가장 재밌는 농담 한마디 하겠다”(the most funniest joke of Korea…)면서 물론 영어로 운을 뗀 후, 능청맞게 한

▲양로병원의 단촐한 쟈니 윤의 방

▲양로병원의 단촐한 쟈니 윤의 방

국어로 “옛날에 한국에서 봉이 김선달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라고 읊으자, 방청석에서 폭소와 박수가 쏟아졌다. 방청객들은 그 내용은 몰라도 능청스런 이방인 말에 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그처럼 그는 미국인들을 꿰뚫고 있었고 웃길 줄을 알았다. 나중 한국에 가서 최초의 ‘토크쇼’의 문을 열어 큰 인기와 돈을 거머쥐었고, 막판에는 박근혜 대통령 후보 시절에 해외후원회장까지 맡아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쟈니 윤의 본명은 윤종승이다. 그는 한때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에게 크나 큰 인기를 모았던 코메디언이었다. 법적으로 국적 회복을 통해 현재 미국과 한국 복수국적자이다. 미국에서 한때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활약했으며, 1989-1990년에 ‘쟈니 윤쇼’로 한국 방송 전체에서 최고 MC로 대접 받기도 했다.

한회 출연료 2만 5천달러, 지금은 무일푼

1936년 10월 22일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태어났다. 원래 1959년에 대한민국에서 방송인으로 데뷔한 후 한동안 MC생활을 하였으나, 1962년에 해군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갔다. 그리고 제대 후에도 그냥 미국에 눌러앉아 알바를 무려 세 개씩이나 하며 공부를 한 끝에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했다. 1964년부터는 뉴욕에서 무명 MC겸 코미디언 생활을 했는데, 이미 그때부터 뉴욕의 ‘텔 아비브’라는 카페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탠드업 코미디 양식을 과거쟈니윤개발했으며, 이때부터 그의 스탠드업 코미디는 미국인에게 먹힌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자극적인 소재나 욕설, 폭력 등의 천박한 방법을 하나도 쓰지 않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동양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하, 성적 풍자, 정치 풍자 등을 간결하게 툭툭 던지고 넘어가는 식으로 미국인들을 엄청 웃게 만든 것이다. 그러다가 1977년 산타 모니카 코미디 클럽에서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쇼인 《투나잇 쇼》의 전설의 MC 자니 카슨에게 픽업되었고, 그에게서 제의를 받아 아시아인 최초로 《투나잇 쇼》에 출연했다. 제일 처음 출연은 간단하게 스탠딩업 코메디만 하려고 했는데, 다음 출연인 대배우 찰턴 헤스턴이 갑자기 사라져서 대타로 20분 가까이 자니 카슨하고 시간을 끌어야 했으며, 나중에는 시간 끌려고, “어머니가 부르셔서 부를 줄 안다”라면서 이태리 가곡 “오 솔레미오”까지 불러서 자니 카슨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잘 대처한 쟈니 윤을 자니 카슨은 매우 마음에 들어 해서 무조건 한 달에 한번씩은 쟈니 윤을 초청하라고 담당 PD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자니 카슨 쇼에 총 34번을 출연하는 등 미국 스탠딩 코미디 업계의 네임드로서 활약했다. 한때는 NBC 방송국과 전속계약을 하며 ‘쟈니 윤 스페셜 쇼’를 진행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백인들은 함부로 못 건드리는 인종차별문제, 성차별문제 같은 것을 동양계 이민자로서 자기 그런 거 잘 모르는 것처럼 시치미 뚝 떼고서 툭 건드렸다가 얼른 빠지는 식으로 각종 드립을 치며 넘어가는 게 그의 전형적인 개그 루틴이었다. 그렇게 수준 높은 고난도 블랙 코미디를 구사하며 일세를 풍미했다. 그러다가 뉴욕에서 인기가 떨어지자, 1980년대 중반부터는 도박의 도시이자 환락가인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했다. 그 당시 카지노 호텔 공연으로 주급을 2만 5천 달러나 받았는데, 당시 1년의 절반을 라스베이거스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러니까 라스베이거스에서만 대략 1년에 60만 달러 이상의 돈을 벌어들인 셈이다. 물론 이 당시 그는 라스베이거스 뿐 아니라 애틀랜틱 시티, 리노, 레이크 타호 등에서도 프랭크 시내트라, 밥 호프 등과 함께 각종 호텔 카지노를 돌면서 순회공연을 했고 큰 돈을 벌어들였다.

‘백만장자에 이른 코메디언’

그후 1989년에 귀국하여 조영남을 보조 MC로 두고 자신이 메인 MC가 된 ‘쟈니 윤 쇼’를 진행하여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인기로 인해 쟈니 윤은 고국에서도 스타덤에 올랐고 광고를 여러 개 찍기도 했다. 쟈니 윤 쇼로 한국에서 그의 이름이 알려졌을 때의 나이가 이미 50대 중반이었다. ‘쟈니 윤 쇼’는 미국의 ‘자니 카슨 쇼’, ‘데이비드 레터맨 쇼’ 형식을 그대로 들여온 토크쇼로, 진행자의 이름을 내걸고 매회 게스트를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본격적인 토크쇼라고 보면 된다. 점잖게 덕담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확 의표를 찌르며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식의, 순전히 ‘재치’와 ‘해학’만 갖고 승부하는 그런 류의 미국식 개그는 국내에 완전히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에, 1989년 당시 ‘쟈니 윤 쇼’는 국민 대부분이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큰 인기를 누렸다. 당시 시청률이 40%를 치솟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시청자들의 불편하다는 항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특히 쟈니 윤이 “높으신 분”들을 건드리는 유머를 하면, 하는 족족 편집되는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에 쟈니 윤이 불만을 가지면서 ‘쟈니 윤 쇼’는 방송 1년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내 TV쇼를 때려 치고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후 SBS개국과 함께 ‘쟈니 윤 이야기 쇼’라는 이름만 다르고 나머지는 다 똑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이때 당대 MC중 최고 연봉으로 계약하며 큰 화제를 낳기도 했지만 예전과 똑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하여 결국 얼마 못가 다시 쇼를 그만두고 말았다. 어쨌든 ‘쟈니 윤 쇼’를 필두로 하여 한동안 한국 에 토크쇼 전성시대가 펼쳐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 후로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와 한국 등을 오가며 무료한 노후를 보냈다. 그 과정에서 한국 국적을 회복하여 이중국적을 갖기도 하였다. 1999년에는 64세의 나이로 18세 연하의 줄리아 리와 결혼했으나, 2010년에 이혼하였다.

박근혜 전대통령이 대통령 후보에 나섰을 때 2013년 LA방문 시 재외동포후원회장을 맡았으며, 당시 청운교회에서 열린 환영회에 무려 1천여명이 참석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14년에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 의해 한국관광공사 상임감사에 임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적절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는 사실이 2016년 말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의해 폭로 되었다. 어쨌든 낙하산 인사 논란을 빚었을 당시 국정감사에 출석하여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밝힌 것은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16년 4월 13일 오전,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미국에 돌아와 양로병원에 입원했다. 2017년 12월 말과 지난해 3월에 한국 언론들은 ‘현재 치매 상태이며 LA인근 헌팅턴 요양원에서 홀로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보도에서 ‘치매의 영향으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자니 카슨 쇼는 기억한다는 걸 보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만은 기억하는 듯 보인다’고 했다. 최근에는 다소 증세가 호전되어 거동은 힘들지만 의사의 허가를 받으면 외출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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