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USC 졸업해 미주독립운동에 뛰어든
조성환 선생 공헌 찾아냈다
우리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고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축하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잊혀지고 묻혀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현양하고, 그들의 후손들을 찾아 감사하고 도와주는 일이다. 조성환(1880-1968)선생은 1905년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미국으로 망명해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승만 박사 등과 교우하였으며, 흥사단에 가입하고 LA의 USC(남가주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 해 졸업했다. 졸업 후 현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전도사로 교회 창설 회원이 되었으며, 1909년 4월 미주독립운동의 총연합체인 대한인국민회 나성지방회를 김필성, 박창순, 강번 등과 함께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대한인국민회 송종익 재무와 함께 북미총회 학무원 직책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한 민국 임시정부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 송금하는 한편, 1936년 5월 분열된 북미지역 한인민족 운동 단체의 부흥을 위해 소집된 각 지방 대표자회의에 참석해 각 단체를 통합해 북미 대한인국민 회를 재조직하는데 열성을 보이는 등 미주 한인사회의 부흥과 항일운동, 임시정부의 재정 후원을 도모하였다.
조성환 선생은 1945년 해방까지 줄기차게 안창호, 이승만, 신흥우, 송종익, 강번 등을 포함한 독립 지사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조성환 선생의 활동은 미주에서 가장 오래됐던 신문이며, 유일한 글로벌 언론이었던 신한민보에 그의 활동 내역이 수차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한국의 역대 정부는 해외에 묻혀 있는 독립유공자 발굴에 너무나 인색했다.
특히 조성환 선생의 맏형 조정환 선생은 일찍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으로 1990년 12월 21일에 노태우 대통령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으며, 1993년 6월 1일에 김영삼 정부에 의해 국가유공자로 지정됐다. 아우 형제가 중국 땅과 미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하지만 조성환 선생은 후손도 없이 미국 땅 LA에서 외롭게 지내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1968년에 별세하여 할리웃 포레스트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신한민보에 수록된 조성환 선생의 중요 활동 기록을 소개한다. 1909년 5월 12일 로스앤젤레스 지방회 이순기 선생이 회장으로 취임하여 신영구 박윤묵 선생과 함께 동참하였다. (이순기 선생은 미국 올림픽 다이빙 2관왕 새미리의 부친으로 이승만 박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1910년 1월부터 대한인국민회 국민회보 나성지방 회보를 신흥우, 윤문숙 선생과 함께 발간 하였다. (신한민보 1910년 1월 26일자). 처음에는 활자가 없어 직필로 하였다. 1919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학무원에 선출됐다. 당시 총무는 이일, 서기는 송종익, 법무원은 강번 등이었다. 1919년 3월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후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독립선언기념 경축 행사를 벌였을 때 43명과 함께 주최하였다. (신한민보 1919년 3월23일자)
1919년 5월 대한인국민회 해외한인 독립위원으로 안창호, 황두용 등과 16명이 활동하였다. (신한민보 1919년 5월 6일자). 1919년 3월에는 대한인국민회 각 지방의 3·1절 경축행사에 박인준 등과 함께 41명이 참석하였다. (신한민보 1919년 3월 16일자). 1928년 당시 나성한인장로교회 소식을 전국에 전하였다. (신한민보 1928년 11월 22일자)
‘외롭게 숨진 독립운동가’
조성환 선생은 1880년(고종 17년) 경남 김해군 녹산면 분절마을(현재 부산시 강서구 미음동) 114번지에서 7남매 중 둘째로 출생하였다. 조성환 선생은 미주독립운동의 시초인 대한민국민회 조직원으로부터 독립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해방이 되자 한국으로 가기 위하여 하와이로 건너가 교회 시무 활동을 하였으며 고국 한국으로 갈 비자를 신청하였으나 비자가 발급되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시 로스앤젤레스로와서 외롭게 후손도 없이 부부가 고독하게 살다가 1968년에 LA에서 사망하였다. 현재 그의 묘지는 할리우드 공원묘지(Hollywood Forest Lawn)에 있다.
조성환 선생의 형 조정환 선생은 이미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국가훈장 애족장까지 수여됐으나, 아우 조성환 선생은

▲ 정재덕 회장 부부가 조성환 독립운동 역사를 밝히고 있다.
자녀도 없어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실적을 찾지 못하여 오던 때, 조성환 동생의 막내 동생인 조동술의 장녀 조정희씨가 자료 발굴에 나섰다. 한편 조정희씨의 부군인 정재덕 미주 한인상조회장은 “민병용 한미역사박물관장 등을 포함한 여러 인사들의 조언으로 신한민보를 검색하여 조성환 선생의 기록을 일부나마 찾게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4일 해외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청와대에 초청해 “독립운동가를 최대한 발굴해 내고, 그 후손들을 제대로 모시려는 노력을 정부가 많이 하겠다”고 다짐했다. 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이날 독립유공자 후손 65명과 함께 청와대 영빈관에서 가진 오찬에서 ‘친일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리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을 언급하면서 “친일한 사람들은 당대에 떵떵거릴 수 있었고 자식들을 잘 교육시키고, 유학도 보내고 해서 해방 후에도 후손들이 잘 살수 있었다”며 “반면에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가족들을 제대로 돌봐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정말 뿔뿔이 흩어지다시피 한 가족들도 있고 오랜 세월 고생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그런 것을 바로잡는 것이 해방된 조국이 해야 될 일인데, 과거 우리 역대 정부가 그런 점에서 부족한 점들이 있었다”고 사과했다. 문 대통령은 그러면서 잊혀지는 독립유공자나 그 후손이 없도록 정부가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분단이나 해외 거주 등의 이유로 발굴하지 못한 독립유공자가 많다”며 “독립기념관의 독립운동사연구소의 기능을 더욱 확대해 독립운동 사료수집과 함께 국내ㆍ외에서 마지막 한 분의 독립유공자까지 찾아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성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