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폭동 27주년 특집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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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타운 스스로 지킬 시스템 필요하다’

제목잊혀져 가는 4‧29 폭동을 생각하면서 한인사회에서 반듯이 집고 넘어가야 하는 과제가 있다. 역사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LA폭동’과 같은 사태가 미래에 또다시 일어날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LAPD 경찰국장을 지닌 찰리 벡 전국장도 “LA폭동과 같은 유사한 폭동이 재발하면 LAPD 단독으로 진압은 불가능하다”면서 “주민들의 도움과 협조 없이는 진압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성진 취재부 기자>

LAPD에서 베테랑 수사관으로 근무했던 한상진 전수사관은 4‧29 폭동 27주년을 맞아 한인사회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과제를 던져 주었다. 그는 “지진이 언제 발생할지 잘 모른다”면서 “하지만 언제간 일어날 재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고 전제한 다음 “폭동도 언제 다시 발생할 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또 다시 일어날 것” 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한인사회가 아직도 LA폭동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폭동1고 말했다. 외형적인 변화는 있을지 몰락도 성숙된 변화가 없었다는 지적이다. 그는 4‧29 폭동 당시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나 커뮤니티가 엄청난 피해를 당했는데, LA경찰국에 고소를 한 경우가 전혀 없었다’면서 “한인사회에서 성금비리가 크게 논란이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 한 건도 고소가 제기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어 “폭동 성금 비리는 법적으로 공소 시효가 끝났다”면서 “하지만 커뮤니티에서 그 문제는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문제는 4‧29 폭동처럼 대규모 폭동이 다시 일어날 경우, 피해를 가장 줄이고 있고, 한인사회가 공통적으로 대처할 네트워크는 무엇일가에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한인사회가 공통적으로 논의하고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4‧29 폭동 27주년에 한인들이 4‧29 폭동에 관해 잘못 알고있는 사항도 바로 잡아야 한다. 잘못 알고있는 사항들을 다시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4‧29 폭동에서 배운 교훈을 한인사회는 고쳐 나가야 한다. 27년 전 4‧29 폭동에서 한인들에게 가해를 한 폭도들이나 기타 인권위반자들을 미정부 사법 당국은 ‘인권 위반’으로 기소하겠다고 공언했지만, 한 건도 기소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인사회가 당한 피해보상과 명예회복을 위해 법정투쟁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지난 27년간 계속되어 왔다. 한인사회 원로 법조인인 민병수 변호사는 “인권투쟁은 외롭고 힘든 일”이라며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하는 일”라고 말했다. 그는 “법적투쟁은 오래가고 힘든 일이지만, 이 일은 우리를 위한 것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한인사회 미래를 위해 그리고 차세대를 위해서도 맡겨진 역사적 사명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잊혀진 4‧29’가 더 문제

LA 코리아타운은 미국내에서도 소수인종이 정부의 도움없이 스스로 개척하여 일궈낸 타운이다. 한인들은 개인적으로 우수하지만, 단체적으로는 단결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한인들은 하나로 뭉쳤고, 위기를 기회로 더나은 세상을 개척해 나갔다. 매년 4‧29가 돌아오면 한인사회는 무슨 연중행사처럼 지내고는 또 잊어버린다. 미주이민 140여년 에서 최대수난의 역사인 ‘사-이-구’ 를 이렇게 보내서야 되겠는가. 한상진 전 수사관에 따르면 “언젠가 다시금 폭동이 올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4‧29 폭동 당시 한남체인과 가주마켓은 폭도들로부터 비즈니스를 지킨 사례로 남겨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다시 폭동이 올 경우를 생각해서라도 커뮤니티 차원에서 ‘우리 타운 지키기’를 제도화 해야한다”고 제안했다. 가정과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경찰이나 군대만을 믿고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그동안 한 전수사관은 스포츠 사냥 클럽을 통해서 비상시를 위해서 총기도 집안에 보관하고 클럽 자체로서도 비상시 커뮤니티를 도울 ‘자경단’ 형태를 조직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부에서 ‘총기를 가정에 두면 자칫 가정불화 시 불상사를 낼 수 있다’등등의 이유로 비상구조 시스템 조직이 구성되지 못했다는 경험담을 들려 주었다. 그는 “4‧29 폭동의 시련을 겪은 한인사회는 진정한 변화의 조짐은 없는 것 같다”면서 “LAPD에는 큰 변화가 왔다”고 전했다. 원래 LAPD의 수장인 경찰국장은 LAPD 자체에서 선출되었다. 그래서 LA시장이나 시의회로부터의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나갔다. LAPD가 뉴욕이나 시카고 경찰과는 다르게 부정부패가 없었던 것도 정치인들의 부당한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4‧29 폭동 당시 LA시장은 흑인계 톰 브래들리 시장이었고, LA경찰국장은 백인계 데릴 게이츠 국장이었다. 폭동의 도화선이 된 ‘로드니 킹’ 사건 발생후, 블래들리 시장과 게이츠 국장은 서로 눈도 안 마주칠 정도였다. 블래들리 시장은 LA경찰국의 경위 출신이었다. 게이츠 국장은 경위 출신 시장을 시장으로 보기보다는 경위로 보았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러나 4.‧29 폭동이라는 미증유의 폭동을 거치면서 LAPD에 쏟아진 논란이 결국은 게이츠 경찰 국장이 스스로 사임하기에 이르렀으며, 이후 경찰국장 선임제도를 경찰위원회 추천에 의해 LA시장이 임명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경찰국장이 시장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체제로 변화 되었다. 그후 타도시에서 영입된 인사가 LAPD경찰국장이 되어, LAPD의 특수한 환경을 이해하지 못해 임기를 마치는 경우도 있었다.

‘내 가정 사업도 내가 지켜야’

‘4‧29 폭동’이란 단어를 위키백과에서 클릭하면 서두에 아래와 같은 설명이 나온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사태(영어: 1992 Los Angeles Riots, Rodney King Riots, South Central Riots, 1992 Los Angeles Civil Disturbance, 1992 Los Angeles Civil Unrest)은 1992 년 4 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 소녀에 대한 인종차별에 격분한 흑인들에 의해 발생한 유혈 사태였다. 미국 LA경찰청 경찰관이 운전수인 로드니 킹을 구타한 사건과 한인 상점에서 흑인 소녀에게 총격을 가한 사건에서 무죄가 판결나면서,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로 시작되었다. 4월 29일 이후 5월 4일까지 수 만명이 LA에서 시위를 일으켰으며, 유혈, 방화로 확산되었다. 재산 피해액이 약 10억 달러를 넘었다. 총 53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부상 당했다. 이 폭동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열 두 번째 폭동으로 알려져 있다.> 위의 내용에서

▲ LA폭동으로 잿더미가 된 코리아타운 상점들

▲ LA폭동으로 잿더미가 된 코리아타운 상점들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 소녀에 대한 인종차별에 격분한 흑인들에 의해 발생한 유혈 사태였다. 미국 LA경찰청 경찰관이 운전수인 로드니 킹을 구타한 사건과 한인 상점에서 흑인 소녀에게 총격을 가한 사건에서 무죄가 판결나면서,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로 시작되었다.>고 되어있다. ‘두순자 사건’(1991년 3월 16일)과 ‘로드니 킹 사건’(1991년 3월 3일)은 묘하게도 2주일 간격으로 발생했다. ‘흑인소녀’나 ‘로드니 킹’이 폭동의 한 원인으로 이야기 할 수는 있지만 그런 것들이 4‧29 폭동의 주 원인으로 내세우기는 잘못된 것이다. 당시 미주류 언론들은 ‘흑백갈등’을 교묘하게 ‘한흑갈등’으로 몰아갔다. 또 이들 일부 주류 언론들은 “흑인 소녀에 대한 인종차별”로 한인사회를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소위 말하는 ‘두순자 사건’이다. 한상진 전수사관도 “당시 미국 일부 언론들은 LA폭동 1년전에 발생한 ‘두순자 사건’을 두고 한인사회를 잘못 묘사했다”면서 “피해자가 한인인데 오히려 가해자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미국 언론의 편견이 원인’

‘두순자 사건’이란 1991년에 3월 16일 남부 지역에서 ‘엠파이어마켓’ (Empire Liquor)’라는 리커스토어를 남편과 함께 운영한 두순자씨가 가게에 들어와 물건을 가지고 계산을 하지 않고 그냥 나가려던 15세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Latasha Harlins)와 다투다가 총격 오인으로 사망케 한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과 개요는 다음과 같다. 사건 당시 남편이 자리를 비는 바람에 리쿼스토어 가게를 보고 있던 두순자씨는 가게에 들어 온 흑인 소녀가 오렌지쥬스 한 병을 책가방에 넣는 것을 보고 도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녀가 흑인 소녀의 책가방을 움켜지자, 체격이 컸던 흑인 소녀는 욕설과 함께 주먹으로 그녀의 얼굴을 여러번 때렸으며, 폭행을 당한 두순자씨는 바닥에 넘어졌다 일어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카운터 아래에 놓였던 권총을 집어들고 방어하려다 총알이 발사 되었다. 가게를 나가려던 문제의 흑인 소녀는 뒷통수를 맞고 그 자리에서 숨지고, 두순자씨는 현장에서 체포되고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사건 발생 이틀 뒤인 1991년 3월 18일에 경찰은 기자회견을 통해 두순자씨가 할린즈를 뒤에서 쏘았다고 발표하였고, 19일에는 검찰이 두순자씨를 1급 살인죄로 기소했다.

미국 언론들은 주로 두씨가 뒤로 돌아 나가는 흑인 소녀를 쏘는 장면만 많이 내보냈다. 미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뒤에서 총을 쏘는 것을 가장 비겁하다’ 인식이 깃들어 있다. 검찰 기소 후 21일 부터 두순자의 엠파이어마켓 앞에서는 흑인들의 시위가 시작되었으며, 인근 한인 주류상점 곳곳 에서 흑인들의 보복 행패가 잇달았다. 재판에서 두순자는 흑인 소녀를 쏜 것이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미 두씨의 엠파이어 마켓은 30여 차례가 넘는 강도를 당한데다가 흑인 소녀는 도둑이 분명했고, 싸움 도중에 두씨는 흑인소년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사건 당시 흑인소녀에게 주먹으로 강타당한 두순자씨는 그자리에서 실신한채 중상을 입고 병원에 긴급 입원했다. 한쪽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고 다른 눈은 찢어져 피가 철철 흘러내릴 정도였다. 두순자씨 가족에게 더한 고통은 집 앞에서 계속된 흑인들의 촛불시위였다. 그보다 더 큰 고통은 동포인 한인사회로부터의 손가락질이었다.

‘소잃고 외양간 고쳐야’ 교훈

나중에 미국 법대에서 이 사건을 수업시간에 다루었고 영상 없이 사건 내용을 설명한 후, 학생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이때 대부분이 두순자에게 내린 판결이 관대하다고 답했다. 그러나 재판 자료 중 하나인 사건 영상을 보자 대부분이 두순자가 총을 쏠 만한 위협을 느꼈다고 의견을 바꿨다. 이 사건에 대해 배심원은 유죄 평결을 내렸고, 검사는 흑인 사회의 반발을 고려해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담당 조이스 칼린스 판사는 두순자씨가 재범의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40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과 함께 5년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결국 이 백인 여판사의 판결을 흑인들은 ‘어떻게 어린 소녀를 사살한 가해자에게 징역형을 내리지 않았는가’라면서 미국의 사법제도를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덩달아 한인들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었다. 나중 칼린스 판사는 ‘두씨는 선고보다는 일생 이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 고통이 더 클 것이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LA타임스를 포함한 일부 미국 언론들의 논조도 흑인을 두둔하고 상대적으로 한인을 비하시키는 기사나 보도를 내보냈다. 방송에서는 단적으로 당시 4‧29 폭동 전까지 최근 5년간 한인 가게 주인이나 종업원들이 흑인계 등을 포함한 강도로부터 죽은 사례가 40여건에 이르렀으나, 이들에 대한 미언론의 보도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한인이 가해자가 됐을때는 여지없이 나타나 사건을 침소봉대하기에 이르렀다. ‘두순자 사건’을 보도할 때도 LA타임스와 일부 언론 방송들은 “한인 두순자….”를 운운해 한인이 가해자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인식시켰다. 반대로 흑인이나 다른 인종이 관련됐을 때는 “…강도가 …”하며 인종을 밝히지 않았다. ‘4‧29 폭동’ 사건의 배경에는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적 편견과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 주로 ‘흑백’간의 인종차별이 극심했다. 이 사건은 1년 뒤인 1992년 4월 29일 발생한 LA폭동 과정에서 흑인들이 한국인과 기타 아시아인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우선 이 같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많은 내용들 중에서 잘못된 부문을 한인사회는 고쳐 나가는 작업이 아주 중요하다. 4‧29 폭동 사건 이후, 한인 사회에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겨났다. 우선 한인 커뮤니티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동포들이 새삼 ‘한국인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또 하나 미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미국인으로서 권리를 얻어야만 한다는 의식이 생겼다. 이전까지 한인들은 한인 공동체에서만 살았고, 경쟁 대상도 보통은 같은 한국인들이었으며, 심지어 미국 시민권 취득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미국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가와의 교류에 무심했기 때문에, 흑백 양쪽에서 일방적으로 따돌림을 당한 것이었다. 이제 한인사회는 “흑백갈등”이라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희생양”이 되었던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4‧29 폭동의 교훈을 행동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또 다른 폭동에서도, 27년전처럼 “희생양”이 될 것이다. 역사를 모르는 백성은 미래에서도 희망을 구할 수 없다. 후대를 위해서도, 역사를 위해서도 4‧29의 진실을 규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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