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 단독 특종 발굴]1966년 대외비 CIA보고서 입수 공개 한일청구권타결액, 일본마지노선보다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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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4억5천만불 생각하고 있었는데 타결액은 3억달러

정권 창출 야욕에 눈 멀어
민족의 혼까지 헐값에 팔아 넘겼다

박정희대통령‘신일본제철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 1억원씩 배상하라’는 한국대법원 판결에 대해 일본정부가 강력히 반발하는 가운데, 이번 사태의 불씨가 된 한일청구권 협정당시 김종필은 무상 3억달러에 합의했지만, 일본은 내부적으로 4억5천만달러까지 주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미국정부도 3억5천만달러에서 4억5천만달러를 ‘무상’의 적정선으로 생각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미국정부가 공개한 외교전문을 통해 드러났으며, 박정희정부가 지나치게 적은 돈에 합의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게 됐다. 특히 이처럼 굴욕적인 합의를 한 것은 박정희정부가 집권을 위해 일본기업들로 부터 불법정치자금을 받으면서 일본정부에 약점이 잡힌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공화당 사전조직을 위한 ‘4대의혹사건’을 시작으로 일본기업들로 부터 정치자금을 조달하면서 일본정부에 약점을 잡혔으니 대등한 협상이 될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정권찬탈을 위해 민족을 팔아넘기는 바람에 60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민족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본지가 단독으로 입수한 미국 정부의 외교전문을 통해 박정희-김종필의 매국적 한일청구권협정의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본다.
안치용(시크릿 오브 코리아 편집인)

지난 1962년 4월 27일, 사무엘 버거 주한미국대사가 미국무부에 타전한 3페이지짜리의 비밀전문, ‘CONFIDENTIAL’이라는 도장이 찍혀진 이 전문에 한일청구권협정의 큰 비밀이 담겨있다. 이 전문은 버거주한미국대사가 이날 아침 일본정부경제조사단을 이끌고 방한한 외무성 경제국장 요시히로 나카야마단장을 1시간가량 면담한 뒤 작성한 것이다. 이날 면담은 나까야마단장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으며, 양측은 당시 한국과 일본은 물론 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전파를 막아야 했던 미국으로서도 최대현안으로 떠오르던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입장을 타진했다.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11월 일본을 방문하면서 경제적 지원을 요청한데 따라 한일국교정상화가 현안으로 등장했고, 가장 핵심 사안은 ‘일본이 한국에 얼마를 줄 것이냐’가 관건이었다.

‘김-오히라’담판전후 버거대사에 협상 브리핑

이 전문에 따르면 버거대사는 ‘한국은 일본 내 정치적 사정을 고려, 두세 달 동안 기다리겠지만 7천만달러나 1억달러라는 일본의 무상제공청구권액수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나까야먀단장에게 말했다. 그러자 나가야마는 ‘대사가 생각하시기에 어느 정도면 합의가 가능하겠느냐’고 물었고, 버거대사는 ‘내가 추측하기로는 무상제공청구권액수가 3억5천만 달러에서 4억5천만달러는 돼야 한다’며 구체적 액수를 제시했다. 이 말을 들은 나까야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정도가 내가 추정하는 액수’라며 ‘일본이 그 정도를 부담한다고 해서 경제에 큰 짐이 되지 않는다’라며 동의를 표한 것으로 밝혀졌다. 즉 일본이 내심 한국에 ‘무상 제공 하겠다’고 작정한 청구권액수가 4억5천만달러에 달했던 것이다.

▲ 사무엘 버거 주한미국대사는 1962년 4월 27일 본국에 타전한 비밀외교전문을 통해, 한국을 방문한 일본경제조사단 대표 요시히로 나카야마 일본외무성 경제국장에게 무상 3억5천만달러에서 4억5천만달러는 돼야 한국정부가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하자, 나카야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액수가 내 예측’이라며 ‘그 정도라면 일본경제에 큰 짐이 되지 않는다’며 동의했다고 보고했다.

▲ 사무엘 버거 주한미국대사는 1962년 4월 27일 본국에 타전한 비밀외교전문을 통해, 한국을 방문한 일본경제조사단 대표 요시히로 나카야마 일본외무성 경제국장에게 무상 3억5천만달러에서 4억5천만달러는 돼야 한국정부가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하자, 나카야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액수가 내 예측’이라며 ‘그 정도라면 일본경제에 큰 짐이 되지 않는다’며 동의했다고 보고했다.

일본이 4억5천만달러를 고려했다는 것은 또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에 회의 자료로 제출한 국무부 문서에서도 확인된다. 1962년 5월 17일자의 이 문서는 바로 그 다음날인 5월 18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위해 작성된 문서라고 기재돼 있다. 이 문서의 맨 마지막, 제16번 항목에서도 일본이 무상제공청구권액수의 마지노선으로 4억5천만달러를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항목에는 ‘버거대사는 나카야마 외무성 경제국장과의 면담을 통해 무상제공청구권 액수가 3억5천만달러에서 4억5천만달러[장기저리정부차관과 민간상업차관 제외]수준에서 타결될 것으로 평가했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이 겉으로는 7천만달러, 1억달러를 주장했지만 속으로는 4억5천만달러까지는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했던 셈이다.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거대한 소비시장인 한국을 확보하기 위해서 몸이 달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일청구권협정에서 최종 합의된 것은 ‘일본은 무상 3억달러, 장기저리정부차관[유상] 2억달러, 민간상업 차관 3억달러이상을 한국에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무상3억, 유상3억, 민간베이스 3억이다. 양측의 합의액은 한국이 1950년대부터 요구한 12억달러, 8억달러등에 턱없이 부족한 것은 물론 일본이 내심 결심한 무상제공청구권액수 4억5천만 달러에도 못 미친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 유리한 굴욕의 한일청구권협정

한일청구권협정이란 지난 1965년 6월 조인되고 그해 12월 발효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을 말한다. 이 협정의 골격은 이미 1962년 11월 12일 ‘김-오히라’메모로 불리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외상사이에 타결됐지만,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최종 타결을 미뤘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마무리협상에 나서 1965년 최종 조인된 것이다. 이 조약은 한일국교정상화를 규정한 본조약과 일본거주 한국민의 지위, 어업, 청구권, 문화재 반환 등 4개의 부속협정으로 구성돼 있지만 가장 주목을 끄는 부분은 이른바 청구권에 따른 보상내용이다.

▲ 국사편찬위원회는 1966년 CIA가 작성한 ‘한일관계의 미래’라는 보고서를 ‘복제가능하나 학술적 이용에 한정되며 허락없이 발간 불가 자료’라고 규정하고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는 1966년 CIA가 작성한 ‘한일관계의 미래’라는 보고서를 ‘복제가능하나 학술적 이용에 한정되며 허락없이 발간 불가 자료’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일청구권협정등 국교정상화문제는 지난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체결된 뒤인 같은 해 10월 20일을 시작으로 양국이 교섭에 나섰지만, 좀처럼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민주당 장면정권이 들어선 뒤 한국이 일본에 받아야 할 돈, 이른바 ‘청구권 8개 항목’을 매우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1960년 10월 20일 5차협상에 나섰지만 결렬되고 그 이듬해 5.16쿠데타가 발생한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같은 해 10월 20일 제6차 회담을 했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했고, 박정희가 같은 해 11월 미국방문길에 일본에 들러 경제적 지원을 요청함으로써 정치적 타결을 모색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특사로 나서서 오히라 일본외상과 담판을 벌였고 그 합의가 바로 ‘김-오히라’메모인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1962년 8월부터 일본과 협상에 나섰고 8월에 3차례, 9월에 3차레등 6차례 협상을 한뒤 7차협상에 해당하는 같은해 10월 20일과 8차협상인 같은해 11월 12일 두차레에 걸쳐 김종필이 오히라와 담판을 벌여 청구권액수에 합의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해 12월 13일 양국정부의 추인을 받음으로서 가장 큰 걸림돌이 해결된 것이다.

그동안 김-오히라 메모내용은 공개됐지만 양측의 주장 등 협상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본보가 한일청구권협정과 관련해 1962년부터 1965년까지의 주한미대사관과 주일미대사관 등이 미국무부에 타전한 외교전문을 입수, 분석한 결과 청구권타결액수는 일본이 일본에 유리한 합의였음이 밝혀졌다.

박정희정권, 당초 7억달러 요구가 3억달러로

‘김-오히라’ 1차 담판을 사흘 앞둔 1962년 10월 17일 버거 주한미국대사는 한일청구권협정과 관련한 전문을 국무부로 타전했다. 버거대사는 10월 17일 최덕신외무부장관으로 부터 김종필의 일본방문과 관련한 한국정부의 입장을 들었다고 적고 있다.

최덕신은 1980년대 초 북한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이 자리에서 최씨는 ‘10월 14일 박정희의장, 국무총리, 김종필, 김동하 최고회의외교국방위원장등이 모임을 갖고 장시간 협상전략을 논의했다’고 말했다. 이 회의에서 청구권액수와 관련, ‘무상제공 청구권 3억5천만달러, 장기저리정부차관 2억5천만달러등 민간상업차관을 제외한 유무상 요구액을 6억달러로 확정했고, 김종필은 장기저리정부차관 액수에서는 협상여지가 있지만, 무상제공청구권액수는 바꾸지 않을 것 같다’고 버거대사에게 설명했다. 또 ‘김종필은 장기저리정부차관을 2억달러로 낮출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의 양보는 서울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박정희군사정권은 당초 7억달러를 요구하다 조금씩 양보해 무상 3억5천만달러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으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마지노선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만다.


아베의 교활한 경제 보복 뒤에 숨겨진 CIA충격 보고서

‘박정희, 일본기업불법자금 받아 공화당창당’

김종필한국 측은 ‘김-오히라’ 협상이 타결된 이틀 뒤인 1962년 11월 14일에도 버거 주한미국대사에게 양측의 주장과 타결내용을 상세히 설명했고 버거대사는 이를 본국에 보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문서를 통해서도 ‘김-오히라’ 협상은 한국 측 입장이 아닌 일본 측 주장대로 타결됐음을 알 수 있다. 버거대사는 이날 김종필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초청에 대해 사의를 표한 뒤 한일 청구권협정타결 내용을 설명했다고 적고 있다.

김종필은 무상제공청구권과 관련, ‘한일청산계정[오픈 어카운트]상 대일채무 4573만달러를 포함, 3억달러로 타결했다’고 설명했다. 즉 일본이 제공하는 무상자금에는 기존 한국이 일본에 갚아야 할 돈 약 5천만달러를 제외하면, 실제로는 2억5천만달러 상당인 것이다. 또 무상제공청구권액수 협상에서 ‘오히라는 대일채무를 제외하고 2억5천만달러를 주장한 반면, 김종필은 대일채무를 포함, 3억5천만달러를 주장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일채무를 포함, 3억달러에 합의함으로써 일본 측 주장이 그대로 관철됐고, 한국은 5천만달러를 양보한 셈이다.

일, 무상으로 주는 돈은 깎고, 빌리는 돈 늘려

김종필은 일본이 이 무상제공청구권을 10년에 결처 매년 3천만달러씩 제공받는데 합의했으며 이 역시 일본에 유리한 것이다. 이 전문에는 ‘당초 일본은 12년에 걸쳐 제공하겠다고 주장했고, 김종필은 6년 내에 3억달러를 모두 달라고 요구했다’고 기록돼 있다. 결국 10년에 합의됨으로써, 이 부분에서도 한국 측이 큰 양보를 했다.

▲ CIA는 ‘한일관계의 미래’라는 보고서 5페이지에서 ‘일본정부가 무상 3억달러, 장기저리차관[유상] 2억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달러를 한국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 CIA는 ‘한일관계의 미래’라는 보고서 5페이지에서 ‘일본정부가 무상 3억달러, 장기저리차관[유상] 2억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달러를 한국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흔히 유상이라고 표현되는 장기저리상업차관에 대한 양측의 주장도 이 전문에 기록돼 있다. 양측은 총액 2억달러, 연이율 3.5%, 7년 거치 20년 상환에 합의했다. 일본 측은 당초 총액 1억달러, 연이율 5.5%, 5년거치 17년 상환을 주장했고 김종필은 총액 2억5천만달러, 연이율 3.5%, 7년 거치 20년 내지 30년 상환을 주장했다. 협상과정에서 융자금은 늘어난 반면, 상환기간은 대폭 짧아졌다. 당초 한국정보 요구대로라면 7년을 거치한 뒤 그 이후부터 20년 내지 30년 뒤 원금을 모두 갚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소 27년에서 37년 뒤 모두 갚는 것이다. 그러나 7년 거치 20년 상환으로 결정됐고, 그나마 7년 거치기간도 20년에 포함되는 것으로 합의됐다. 따라서 7년 동안은 원금을 갚지 않고 그 이후 20년 동안 원금을 모두 상환하는 것이 아니라, 13년 만에 원금을 모두 상환하는 조건을 한국이 받아들인 것이다.

이처럼 ‘김-오히라’ 담판은 한국의 당초요구는 물론, 일본이 내심 마지노선으로 정한 무상 4억5천도 받아 내지 못하고, 그나마 3억달러롤 깎아주면서도, 그 안에 대일채무를 포함함으로써 실제로는 2억5천만달러였다. 일본 마지노선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을 받아내는데 그친 것이다. 상업민간차관은 당초 합의는 1억달러였으나 1965년 조인과정에서 3억달러로 늘어났지만, 이 또한 무상으로 주는 돈이 아니라 빌리는 돈이다. 즉 일본은 무상으로 주는 돈은 깍고, 빌리는 돈을 늘리는 방법으로 생색을 낸 것이다.

그렇다면 박정희정권이 이처럼 굴욕적인 저자세로 합의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한시라도 빨리 돈을 들여와야 한다는 다급한 사정이 분명히 존재했다. 또 막 시작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도 달러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저자세 합의는 박정희 정권의 태생적 한계에 따른 것이다. 5.16쿠데타 뒤 대통령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기 위해 일본 측 기업들로 부터 불법정치자금을 조달함으로써 일본정부에 단단히 약점을 잡혔기 때문에 저자세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미국 측 문서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1966년 CIA보고서 ‘아직도 학술외 발간불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복제 가능하나 학술적 이용에 한정되며 허락 없이 발간 불가자료’라는 꼬리표가 붙은 문서 1건이 눈길을 끈다. 문서의 제목은 ‘한일관계의 미래’, 작성기관은 미CIA, 작성일자는 1966년 3월 19일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성된 지 무려 53년이 지난 문서를 꼭꼭 숨기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 문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한국정부는 이토록 필사적으로 문서공개를 꺼리는 것일까?

이 문서가 바로 지난 2004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찾아내 그 내용을 공개한 문서이다. ‘공화당이 일본기업으로 부터 5년간 6600만달러의 불법정치자금을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본보는 미국국립문서보존소로 부터 이 문서를 입수, 검토한 결과 이 문서는 표지를 포함, 모두 9페이지로 구성된 CIA의 한일관계 분석 보고서였다. 한일청구권협정이 타결된 지 약 3개월 뒤 작성된 문서로 해당내용은 이 문서의 6페이지하단과 7페이지에 담겨 있다.

▲ 1978년 연방하원이 발간한 프레이저보고서 - 공화당이 일본기업들로 부터 2천만달러이상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 1978년 연방하원이 발간한 프레이저보고서 – 공화당이 일본기업들로 부터 2천만달러이상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CIA보고서는 ‘민주공화당이 일본으로 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주장은 상당히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일본기업들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6개 일본기업은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600만달러를 제공했다. 각 기업들은 1백만달러에서 2천만달러를 각각 지원했다’고 적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중요한 것은 ‘일본 기업들이 보고했다’는 부분이다. 공화당에 자금을 제공한 기업들이 상장기업들로, 기업회계를 공개한 의무가 있는 기업이어서, 한국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사업보고서를 통해 공개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CIA가 ‘상당히 근거가 있다’고 주장했듯 한낱 뜬소문이 아닌 것이다.

또 ‘일본기업들은 한국에서 독점적 사업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돈을 지불했고, 공화당은 일본과 사업을 하는 한국기업으로 부터도 돈을 받았다. 일본에 정부미 6만톤을 수출한 8개 한국기업도 공화당에 11만5천달러를 지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김종필에게 한일청구권협정을 조속히 진행시키라는 차원에서도 돈을 지불했다’고 적혀 있다는 사실이다. 즉 김종필이 한일청구권협정과 관련, 일본기업의 돈을 받았다는 것으로, 사정이 이럴진대 김종필은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목

새나라자동차 수입가격 2배 이상 높여

비자금 조성해 일본에 숨겼다

오늘 <선데이저널>은 한국정부가 ‘허락 없이 발간 불가자료’라고 규정한 그 ‘불온문서’를 한국정부 허락 없이, 그에 따른 모든 처벌을 감수하고, 오직 공개를 바라는 국민의 염원을 받들어 웹사이트에 문서전문을 공개한다.

1978년 박정희 정권을 이 잡듯 조사한 미 하원 프레이저위원회가 펴낸 보고서에도 박정희정권과 일본의 유착내역이 담겨있다. 프레이저보고서 228페이지에는 ‘김종필이 제1차 (1963년께)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위한 선금형식으로 일본정부에서 1억3천만달러를 받은 것은 물론 공화당도 다가오는 선거[63년 대통령선거]를 위해 일본에서 2천만달러를 별도로 받았다’고 적고 있다.
또 ‘1962년 1월 이스라엘 무기상 사울 아이젠버그가 김종필과 일본기업인과의 만남을 주선했다는 사실이 미국대사관에 포착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 1962년 11월 14일 사무엘 버거대사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 부터 11월 12일 ‘김오히라담판’에서 합의내용과 합의과정에서의 양측의 주장등을 설명들었다며 국무부에 보고했다.

▲ 1962년 11월 14일 사무엘 버거대사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 부터 11월 12일 ‘김오히라담판’에서 합의내용과 합의과정에서의 양측의 주장등을 설명들었다며 국무부에 보고했다.

특히 프레이저보고서는 ‘1965년 6월 한일청구권협정이 조인되기 이전인 1965년 1월과 2월 김종필의 형인 김종락이 일본으로 부터 공화당 정치자금 명목으로 돈을 받은 것은 명백하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렇듯 프레이저보고서 또한 박정희정권이 한일청구권협정타결이전에 일본기업들로 부터 거액의 돈을 정치자금 내지 개인축재용으로 받았다고 기술한 것을 감안하면, 박정희정권은 자신의 정권욕과 민족을 팔아넘긴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박정희의 정치적 기반이 된 공화당 사전조직을 위한 4대의혹사건만 살펴봐도 간단하게 이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4대 의혹사건은 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수입, 워커힐호텔건설, 파친코 등이며 증권파동을 제외한 3가지 사건이 모두 일본기업들로 부터 특혜나 리베이트를 받은 사건이다. 1961년 말부터 1964년까지 이어진 이 사건들은 왜 박정희 정권이 일본정부에 굽실거릴 수 밖에 없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즉 만약 이때 일본 검찰이 이 사건에 관련된 일본기업들을 조사했다면, 박정희정권의 부정부패가 낱낱이 드러나며, 군사정권을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다. 쉽게 말하면 일본정부가 박정희군사정권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 한일청구권협정과정에서 한국 측 요구사항을 강하게 밀어붙이기 보다는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박정희 정권 18년은 존재할 수 없었던 셈이다.

CIA보고서에 언급된 공화당 6600만달러 수수설은 공교롭게도 ‘김-오히라’ 마지막담판에서 김종필이 양보한 무상제공 청구권 5000만달러와 엇비슷한 수치다. 어쩌면 받은 만큼 돌려줬는지도 모른다.
월리암 마지스트레티 주한미국대사관 차석대사는 1963년 6월 19일 김재춘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자신의 집에서 만난 뒤 본국에 타전한 면담보고서에서도 4대의혹사건의 실체가 언급돼 있다. 김종필이 새나라자동차 수입과 관련, 수입가격을 시세보다 2배 이상 높이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 일본에 숨겼다는 것이다.

김재춘은 4대의혹사건의 하나인 새나라자동차사건과 관련, 일본차 가격은 한 대당 9백달러이지만, 실제로 일본 측에 1대당 1800달러를 지급한 뒤 김종필 등이 차 1대당 약 1000달러씩의 차액을 돌려받아 일본현지은행의 김종필계좌에 예치했다고 말했다. 또 김종필이 한국에 투자하려는 재외교포로 부터 전체투자금의 4분의 1만 한국에 들여가고, 나머지 4분의 3은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게 해주는 방법으로 투자금을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당초 투자하려던 금액의 4분의 3은 김종필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일본현지은행에 예치하는 방법으로 해외에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강조했다. 김재춘은 재일동포 실업가인 서갑호가 국내 태창방직을 인수할 때도 김종필이 이 같은 방법으로 돈을 챙겼다고 주장했다.

마지스트레티차석대사는 2페이지의 전문을 통해 보고사항을 요약한 뒤 5페이지에 달하는 면담록을 작성, 1963년 6월 28일 국무부에 타전했다. 마지스트레티차석대사는 군사정부내의 부패와 파벌갈등을 잘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외교전문을 포함한 미국정부보관문서는 작금의 사태가 박정희 정권이 잉태한 비극임을 보여주고 있다. 박정희정권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이 크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 엄청난 과를 남겼음도 분명하다.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외관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에 의지했고, 결과적으로 약점이 잡히면서, 엉뚱하게도 무고한 국민들이 그 약점의 댓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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