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한 사건 많았지만
과보다는 공도 많았다
남가주에서 한인 한의사들이 미국 주류사회에 침술을 보급하고 침술에 대한 한의학을 발전 시키는데 선구자적인 역할과 활동을 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문인으로서 한의사 활동에서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자주 문제를 일으켜 가주침구사위원회로부터 징계를 당하는 한인 한의사들이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이같은 징계 사항에 최근에는 한인사회의 지도급 한의사로 활동했던 한의사까지도 징계를 당해 충격을 주고 있다. 초기 시절 한의사를 배출하는 한의대학교를 설립했던 개척자도 징계를 당했으며, 주정부 관련 위원회에서 잘못된 한의사들을 징계하는 자리에 있던 위치에서 오히려 자신이 징계를 당하는 케이스도 있다. 한인 한의계의 반성이 요구된다. 한의사계 지도급 인사의 징계 계기로 침구시술 이민사를 짚어 보았다. <특별취재반>
캘리포니아 침구사 위원회(California Acupuncture Board) 징계보고서(사건번호 1A-2011-70)에 따르면 과거 E 한의과대학을 설립했던 한의사 B. Kim씨에 대하여 2015년 7월 8일자로 환자 치료 중 사망 사건과 관련해 면허 박탈을 유예하고 집행유예 7년의 행정판결을 내렸다. 한편 가주정부 징계보고서(사건번호 1A-2014-64)에 따르면 지난 1994년부터 2000년까지 한인으로선 유일하게 가주정부 침구사위원회 위원장과 평위원으로 활약해온 J. Kim씨에 대하여 환자에 대한 불성실한 치료로 면허박탈을 유예하고 집행유예 3년의 행정판결을 내렸다.
한인사회보다 주류사회로 눈 돌려야
징계보고서에 따르면 징계당한 B. Kim씨는 지난 2011년 2월 3일 E한의과 대학내 한방치료소에 온 환자 Dalia D씨를 치료하는 과정에 불성실한 진료 등으로 환자가 사망에 이르게 한 책임 등을 물어 집행유예 7년의 중징계를 내렸다. 당시 K씨는 보조자로 한의대 인턴과 학생 등 2명과 함께 환자 Dalia를 진료했다. 당시 Dalia D 환자는 처음 발저림 증상을 호소했으나 진찰 결과 여러가지 불편한 증세가 나타나, B. Kim씨는 이에 침술 진료를 실시했다.
그러나 환자는 침술 치료를 받던 도중 패닉 증세를 보여 호흡 곤란과 함께 혼수 상태로 빠져 911 신고로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곧 숨졌다. 환자 Dalia D의 사망사건을 수사한 침구사 위원회는 2014년에 B. Kim씨를 가주행정규정 Section 652 등을 포함한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한편 J. Kim 징계보고서에 따르면 J. Kim씨는 지난 2010년 유방암 전력이 있는 44세의 여성환자 EH를 2013년까지 14차례나 진료하면서 불성실한 시술로 환자의 상태를 제대로 진료하지 않아 가주행정규정 section 4955. 2 등을 포함한 위반 혐의로 징계를 당했다. J. Kim씨는 지난 2000년 9월 침구사 위원회 위원직을 사임하고 한의사의 본분으로 돌아갔다. 그는 지난 89년 주류사회에까지 큰 파문을 몰고온 침구사 시험문제 불법유출 사건 이후 땅에 떨어진 한의사들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K씨가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은 침구사 위원 재임기간에 그간 시행착오가 많아 문제가 됐던 한의사 실기 시험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필기시험의 질이 높아진 것은 다행이지만 시술 능력을 테스트 받지 않고 한의사 자격증을 딸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당시 K씨는 “현재 가주에서 활약하고 있는 전체 한의사 5,000여명 중 한인이 800∼
900명정도나 된다는 점을 감안할때 9인으로 구성된 가주 한의사 보드에 적어도 한인이 1∼2명은 꼭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후임으로 몇몇사람을 추천했다고 전했다. “한인타운은 인구비례로 볼 때 이미 포화상태를 넘어섰다”고 지적한 김씨는 “이제는 주류사회로 눈을 돌리고 적극적인 진출을 모색해야 할때”라며 한의사를 꿈꾸는 지망생들의 의식 전환을 당부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남가주에서 한의사가 직업으로 정착을 하기 시작한 시기는 70년대 초반이다. 이때 한국에서 한의사를 하던 사람, 그리고 정식 한의사는 아니지만 재야 침구사 생활을 하던 사람, 그리고 약사들 중에서 한의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이민을 오기 시작하면서 한의사 직업군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한 때는 미국 대통령까지도 침술에 경탄
언론인이면서 한의사였던 이원영 전 미주중앙일보 편집국장이 전한 남가주 한의사 활동은 한편의 한의 이민사이다. 웨스턴과 7가 근처에서 ‘이준필 한의원’을 운영했던 이준필(작고)박사는 생전에 “72년에 이민을 오니 한두명 정도 한의사로 활동을 하고 있었지요. 당시엔 면허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한켠엔 불안한 마음을 갖고 한의사로서 일을 했어요. 동포사회가 갓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인사회에선 밥 벌이가 안돼 미국인들에게 눈을 돌렸지요.”라고 말했다. 당시 이준필씨는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고 난 뒤 뉴욕타임스 제임스 레스턴 기자가 자신이 중국에서 침 치료를 받은 경험을 기사화하면서 불기 시작한 ‘침’에 대한 호기심 덕을 톡톡히 봤다고 전했다. 미 국무부에서 동양국가에서 한의사들을 우선순위로 초청한 것이다. 이 케이스로 고 이준필 박사는 72년 도미, ‘이준필 한의원’을 차렸다. 이박사는 개업을 하기 전 웨스트 LA에 있는 ‘웨스트 코스트 메디컬 그룹’이란 병원에 자리를 얻어 양방의사의 보조 침구사로서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당시 ‘침’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은 놀라울 정도였다는 것이다.
“자주 침술에 대한 강의를 하고 시범도 보였죠. 당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직후여서 ‘침’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이 무척 높았을 시기죠. 한번 강연회를 하면 수백명이 모여들고, 현장 시범을 보이면 경탄을 금치 못했죠. 당시엔 유명 스타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사인을 해달라고 줄을서서 기다리곤 했죠.” 곧이어 고 이준필씨와 경희대 대학원 동기인 이정규씨도 73년 도미해 8가와 마리포사 근처에 ‘한성 한방원’을 열었다. 이씨는 “한국에서 20년 정도 한의사 생활을 하다온 경력 때문에 초기 이민사회에서 많은 인정을 받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가주에서 침구법이 마련되어 한의사가 정식으로 직업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75년까지는 10여명의 한인 한의사들이 주로 상가주택에서 주로 미국인 환자들을 상대로 반공개, 반비밀로 영업을 계속 해왔다. 초기 침구사 법안 마련에 앞장섰던 이용섭씨는 “단속을 나오면 쫓겨가고 잠잠하면 다시 영업하고 하던 불안정한 시기였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주류사회에까지 한인 침술 효과 홍보
1975년은 가주 한의사 역사에 획을 긋는 한 해로 기억된다. 당시 정상적인 면허제도가 없어 불안하게 생계를 유지해야했던 한인 한의사들은 중국계, 일본계 한의사들과 함께 정식 면허제도를 위한 로비를 시작한다. 합법적인 직업으로 인정받자고 시작한 모임은 바로 면허제도를 위한 청원으로 이어졌고, 이에 침술의 효험을 받던 환자들도 가세를 했다.
이때 한인으로 주도적으로 활동한 사람이 신상혁, 지동만, 김봉달씨 등이었다. 특히 신씨와 김씨는 한국에서 카투사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해 법안 마련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침구사를 정규 직업으로 인정하는 침구사 법이 76년 제리 브라운 주지사의 서명으로 통과되기에 이른다. 당시 첫 면허에는 ‘그랜드 파더’조항에 의해 일정한 경력만 인정되면 시험을 거치지 않고 면허를 일괄적으로 발급하는 시한부 조항이 적용됐다. 이 조항으로 2백여명의 한인들이 첫 면허를 받았으며 이들이 남가주 한인 한의사의 초기 멤버를 이루고 있다. 약사 출신인 신상혁씨가 가주 면허 1호를 땄다. 신씨는 동물에 침을 놓아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시화, 이융섭, 이정규, 송형래, 이용섭, 이준필, 신상혁, 엄한광, 지동만, 김봉달, 백형권씨 등은 당시 ‘그랜드 파더’ 조항에 의해 면허를 받은 초기 멤버들이다.
이처럼 한의사 면허제도가 생겨나자 한의대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78년 침과 서양 의학의 상관 관계를 연구한 미국인 심리학자 스티브 로잔블러가 78년 ‘아큐펑쳐 칼리지’를 세운 것이 남가주에선 시초다. 이후 78년 중국계가 세운 ‘삼라 한의대’ 79년 한인 김창기씨가 세운 ‘로얄 한의대’, ‘계명 베일로 한의대’(사우스 베일로의 전신), ‘황제’, ‘유인’, ‘경산’ 한의대가 잇따라 들어섰다. 한의사 다량 배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주류 사회와 많은 로비를 벌였던 이용섭씨는 한의사들이 독자적으로 진단을 하고 침을 놓게된 80년을 ‘기념비적인 해’로 꼽았다. “처음 면허가 시행됐을 때 한의사들은 독자적으로 침을 놓지 못했어요. 양의사들의 지시가 있어야 침을 놓을 수 있었지요. 침자리도 모르는 양의사들의 지시를 받는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한의사들이 독자적으로 침을 놓고 약을 처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것은 80년 법 개정을 통해서나 가능했지요.” 초기 멤버였던 이정규씨는 “80년대는 한의사들의 직업이 안정되면서 수입도 좋아지고 다른 한인들의 선망의 직업이 됐다”고 회고했다.
로얄 한의대 전 이사장을 지낸 김대영씨는 “영어도 못하던 한인이 손짓, 발짓으로 의사 소통하면서 북가주 카멜에서 10년간 대단한 유지로 지낸적도 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한때의 파동도 있었다. 80년대 중반 한인 Y모씨는 가주 침구사위 원의 자격을 남용해 돈을 받고 면허시험을 유출하는 비리가 발각돼 실형을 받는 등 파장을 낳기도 했다. 당시 면허증 한장에 1~2만 달러가 든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던 시절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