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검찰은 ‘권력의 저승사자…성역없는 수사로 국민 신뢰’
■한국 검찰은 ‘권력의 몸종시녀…권력정치 수사로 국민 지탄’
정치로부터 검찰독립은
‘검찰개혁’ 본질이지만…
조국 법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 되면서 공직자에 대한 외국의 사례가 새삼 관심을 모으는데, 그중 ‘권력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일본 검찰에 대한 사례가 주목을 받고 있다. 과거 5공서부터 박근혜 전대통령때까지 한국에서 공직자 수사건이 나올 때 마다 금권정치를 가로막는 최후의 보루’라 불리는 일본 검찰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일본 검찰은 역대로 총리를 비롯한 최고급 공직자를 포함해 정경유착 관련자, 실세정치인 등을 구속 수사하는 등 혁혁한 전과로 명성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일본 검창이라고 하면 특히 도쿄지검 특수부는 법대로 수사하고 비리가 있으면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법정에 세우는 ‘권력의 저승사자’로 불린다. 최근 일본 검찰의 ‘전성기가 지나 신화가 퇴색했다’는 비판도 나오지만, 아직도 과거의 명성을 지니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공직자들의 권력 남용을 논할 때 계속 일본 검찰의 사례를 기억하곤 한다. <성진 취재부 기자>
도쿄지검 특수부가 한국 검찰에 전달하는 메시지는 의미가 다양하다. 요즘처럼 조국 장관 일가 수사와 관련해 한국 검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폭발하고 있는 현실에서 과거 일본 검찰의 명성은 교훈으로 볼 수 있다. 세계 각국 검찰 조직들 중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만큼 명성을 자랑하는 곳은 찾기 어렵다. 일본 검찰의 전성시대에는 일본 국민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곳을 꼽는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를 달렸다. 일본 검찰, 좀 더 압축하면 도쿄지검 특수부는 그동안 전직 총리를 비롯해 고위 공직자와 실세 국회의원들을 가차없이 구속수사하면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권력의 저승사자’였고 신뢰 상승의 1등 공신이었다. 최근에는 도쿄지검 특수부의 몰락을 이야기하며 신화가 퇴색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그래도 권력에 대한 감시로, 그리고 국민이 갖는 믿음으로 높은 명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 한국에서 검찰의 상급인 조국 법무장관과 가족을 상대로 검찰이 수사하고 있다. 한국 국민들은 과연 한국의 검찰이 일본 검찰처럼 외압없이 소신대로 수사할지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일본에선 항상 도쿄지검 특수부가 최고위층 비리수사를 전담했기에 수사 대상에 대상이 총리이건 장관이건 구분도 없고 ‘현직이냐 전직이냐’는 구분도 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총리가 수사 대상이 되느냐 아니냐’는 규정도 사실상 없다. 또 특별검사 제도도 일본에는 없다. 특검이라는 방식이 기존 검찰 수사를 못믿고 정치적 중립성이 의심스러울 때 별도의 수사 팀을 만들자는 것인데 그런 인식이 일본에선 약하다. 그만큼 검찰에 대한 일본 국민의 신뢰가 높다는 것이다. 한국에는 지방검찰청마다 있는 특수부가 일본에선 도쿄와 오사카, 나고야 등 단 3곳만 있을 정도로 그 위상이 특별하다. 여기에 특수부에는 일본 최고의 엘리트 검사로 40명, 그리고 80여명의 검찰 사무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2000년대 초기에 도쿄지검 특수부는 기소 유죄율 99%를 나타낼 정도로 강력한 진용을 과시했다.
일본 검찰 여론 신뢰도 1위
도쿄지검 특수부가 ‘최강의 수사기관’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결정적 계기는 희대의 게이트로 불린 1976년 ‘록히드 사건’이다. 당시 무엇보다 의혹의 중심에 전후 일본정치 최고의 거물인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있었다. 다나카는 총리 퇴임 후에도 자민당 최대 파벌을 거느리며 실질적으로 일본정치를 지배한 인물이다. 이 사건은 미국의 세계적인 항공기 제작사인 록히드사가 항공기 판촉을 위해 일본 정부 고위층에 거액의 뇌물을 준 게 골자다. 이 사건은 당시 도쿄지검 특수부를 특별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록히드 사건의 발단은 록히드 마틴이 만든 제트 여객기 L-1011 트라이스타부터 시작됐다. 군용기는 선두주자였지만 항공기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록히드마틴은 트라이스타라는 민항기를 야심작으로
내놨다. 군용시장과 달리 민간 시장에서는 보잉, 맥도날 더글라스와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다. 경제 호황에 올림픽 특수까지 있던 일본은 항공기 시장에서 중요한 타깃이었다. 당시 전일본 공수 (ANA)는 이미 맥도날 더글라스의 DC-10을 발주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와카사 토쿠지 ANA사장은 록히드마틴의 트라이스타를 발주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74년 정식으로 비행기를 받아 운항을 시작했다.
그해 12월, 당시 총리였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전혀 게이트가 될 것 같지 않던 일본 내부와 달리 이 문제는 미국에서 먼저 터져버렸다. 1976년 2월 4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 다국적기업 소위원회의 공청회에서 록히드 마틴이 일본 내 항공기 판매를 위해 일본 고위 정계인사들에게 돈을 건넸다는 얘기가 나왔다. 구체적으로 자금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밝혀졌는데 이중 다나카 가쿠에이 당시 총리에게 넘어간 돈이 5억엔이었다. 당연히 불똥이 일본으로 튀어 일본 전국이 발칵 뒤집어 졌다. 일본 국회에서 조사가 시작됐고 관련자들이 하나 둘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문제는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였다. 비록 총리에서 물러났지만 자민당 내에서 최대 파벌을 거느리고 있던 초거물 정치인이었다.
전,현직 총리도 과감히 구속 수사
일본 국민들의 수사 요구가 빗발쳤고 결국 검찰에 수사 지시가 떨어졌다. 반대로 다나카는 자민당 내 파벌을 동원해 방패막이를 시켰다. 다나카가 물러난 뒤 총리에 오른 미키 다케오는 자민당 내 소수 파벌이었다. 다나카는 파벌들을 합쳐 유리해진 정국 상황을 이용해 총리 해임안을 합의했다. 국민들은 분노했지만 다나카는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쿄지검 특수부가 1976년 7월 26일 벼락같이 다나카를 체포했다. 당시 후세 다케시 검찰총장이 “무죄 판결이 나오면 내 배를 가르겠다”고 장담하는가 하면, 부하검사들에게 “모든 책임을 내가 질 테니 사표 낼 걱정은 말라”고 독려한 일화는 유명하다. 수사과정에서 다나카 전 총리가 재임 당시 자택에서 전 일본공수(ANA) 항공사가 록히드 비행기를 구입하도록 장관에게 지시했고, 성공보수로 현금 5억엔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사 6개월 만에 다나카를 구속하는 초유의 사태로 발전했던 것이다. 수사팀은 다나카 체포 전날까지 법무장관에 보고하지 않을 정도로 철통 보안을 지켰다. 수사 지시를 받은지 6개월 만에 전직 총리를 구속하는, 일본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 전광석화 같이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 수사팀은 다나카에게 정보가 들어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체포 전날까지 법무장관에게 보고 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구속을 ‘정치적 박해’로 규정한 다나카는 1976년 12월에 열린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며 의원직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1983년 10월 12일 도쿄 대법원은 다나카에게 외환 관리법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했지만 뇌물죄는 적용받지 않았다. 이처럼 도쿄지검은 막후 실세뿐 아니라 1989년 살아있는 권력도 무너뜨렸다. 다나카의 경우 도쿄지검 특수부의 칼이 물러난 총리를 향했다면 살아있는 현직 총리를 향해 칼을 들이댄 적도 있다. 시작은 일본 정보회사인 리쿠르트사가 계열 회사인 리쿠르트 코스모스의 비상장 주식을 공개 직전 정관계에 싸게 양도해 문제가 된 사건이 알려지면서 부터였다. 1988년 아사히 신문이 처음 보도한 이 사건으로 걸려든 사람은 미야자와 당시 대장상이었다. 이후 취재가 계속되고 파문이 커지자 도쿄지검이 직접 나섰다.
“막후 실세나 살아있는 권력도 무너뜨렸다”
특수부 수사과정에서 다케시타 노보루 당시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아베 신타로 자민당 간사장(지금의 일본 총리다) 등이 연관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거대한 게이트로 비화됐다. 결국 줄지은 정치 거목들의 스캔들로 노보루가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도쿄지검 특수부는 내각을 붕괴 시켰다. 이처럼 도쿄지검 특수부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사례는 총리들을 상대로 시시비비를 물었을 때 였다. 그리고 이와 유사하게 한국 검찰도 지금 문재인 정권의 “조국 게이트”를 두고 조국 법무 장관과 가족을 ̒피의자̕로 보면서 수사에 따라 청와대를 향해 책임 문제를 묻겠다는 입장까지 보이고 있다. 비슷한 처지니만큼 도쿄지검으로부터 반면교사로 얻을 것도 있을 터다. 국민의 신뢰를 받던 도쿄 지검 특수부가 ̒신뢰의 위기̕에 봉착한 것은 ̒불패신화̕가 깨지면서 부터다. 그들이 응원을 받는 동안에는 정치인의 수사 결과물로 내놓았던 기소 중 완전 무죄 확정 판결이 나온 적이 한 차례도 없었다. 록히드 사건 이후의 특수부 기소는 대부분이 항소심에서
유죄가 확정되고 상고가 기각 됐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1990년대 들어 정계 최고 거물인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를 불법정치자금 혐의로 구속했지만,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상처도 남겼다. 가네마루를 한차례 소환조사도 없이 약식 벌금형으로 기소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시민들이 도쿄지검 청사에 페인트와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손하기도 했다. 명성이 퇴색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10년 정계 최고 실세인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을 불기소 처분하면서부터다.
정치자금 관련 장부를 허위 기재토록 한 사건이었지만 검찰의 불기소에 시민 단체들이 자체 재판행사를 하는 등 신화 몰락의 계기가 됐다. 당시 ‘도쿄지검 특수부의 붕괴(2010년)’란 책이 등장해 “증거가 있으면 기소하던 특수부가 시나리오를 설정해 조작하는 집단으로 변질했다”고 질타하기에 이르렀다. 검찰 출입기자 출신이 쓴 이 책에선 검사들의 수사 역량이 떨어졌고 외부압력에 대항하는 기개가 옛날만 못하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일본 내부에서는 “2010년 타격을 입은 뒤 검찰 상층부가 정치인 비위 관련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온다. 권력형 비리와 맞서 신뢰를 얻은 도쿄지검 특수부는 반대로 권력형 비리에 제대로 맞서지 못해 신뢰를 잃었다. 우리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맞섬에서 어떤 태도를 견지할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공소장에 있는 내용뿐만 아니라 담지 못한 내용도 계속 수사를 해나가겠다는 의
지를 이미 검찰은 뱉어놓은 상황이다. 이처럼 일본 검찰의 명성이 예전 같지 않더라도 한국 검찰보다 낫다는 평가는 여전하다. 한국 검찰도 정권의 핵심부를 수사한 경험이 있지만 대부분 정권 말기였고 언론이나 여론 반발이 심해진 뒤에야 마지못해 움직였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 명성은 잃었으나 아직 기대충만
반면 일본에선 아직도 TV 인기 드라마의 대표적 소재로 도쿄지검의 정의로운 검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국민적 기대가 살아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 검찰은 한국 검찰이 따르는 모델인데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의지에는 큰 차이가 난다. 일본 총리나 간사장에 비해 한국 대통령의 힘은 크게 차이가 있다. 하지만 문화 차이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그리고 일본 검찰은 퇴임 후에 정치인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본 중의원·참의원 727명 가운데 검찰 출신으로 민주당 홍보위원장인 오가와 도시오 의원이다.
원래는 지방법원 판사였다 1976년 도쿄지검 검사가 되었다. 그 뒤 변호사 생활을 거쳐 1998년 야당 정치인이 되었고 아베 총리에게 종군 위안부에 대한 공식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재일 한국인 참정권을 주장하는 진보 성향 정치인이다. 반면 한국은 국회의원 가운데 약 10% 이상이 검찰 출신이다. 그중 대부분이 야당에 소속이고 대부분 고위 간부를 지냈다. 한국 검찰 고위층의 정치적 태도가 일본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윤석열 검찰 총장에게는 한국검찰 본연의 가치를 되찾을 시험대이기도 하다. ‘정치로 부터 검찰 독립’은 그와 검사들의 과제이다. <출처: 한겨례, 시사저널,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