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스토리] ‘딥 스로트’(목구멍 깊숙이) 정권도 날려보내는 ‘내부고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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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워터게이트에 이어 트럼프 탄핵 추진도 ‘내부고발자’ 단초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내년 2020 재선 고지를 노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Donald Trump, President of the USA)이 미하원에서내부고발자 탄핵 위기를 맞고 있다. 탄핵이 제기된 단초가 ‘내부고발자’의 제보라고 한다. 최근 워싱턴포스트(WP, Washington Post)등 미 언론은 중앙 정보국(CIA) 요원으로 추정되는 한명의 ‘내부 고발자’가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 승리를 위해 우크라이나에 정적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부자의 부패 조사를 압박 했다”고 고발했다고 전했다. 최초 내부 고발자 외에도내부고발자 둘 복수의 추가 고발자가 ‘우크라이나 스캔들’ 의혹을 제기했다는 보도가 이어 졌다. 이에 미연방하원의 다수당인 민주당이 즉각 탄핵 조사에 돌입했다. 탄핵은 하원에서 발의하지만 심판은 상원에서 결정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소속된 공화당이 상원의 다수당이기에 탄핵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2020년 대선의 해이기에 그 파장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지난 1974년 당시 재선에 승리한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1913-1994)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의 내부고발자의 한 마디로 권자에서 내려와야 했다. 내부 고발자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살펴본다.
<성진 취재부 기자>

미국이나 세계적으로도 지금까지 가장 유명한 내부고발자는 1972년 당시 막강한 리처드 닉슨 37대 미국 대통령을 권자에서 밀어낸 마크 펠트(Mark Felt) 전 연방 수사국(FBI) 부국장이다. 펠트 전 FBI 부국장은 소위 ‘워터게이트 사건’을 고발해 결국 2년만인 1974년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이끌어 내었다. 당시 내부고발자는 추측만 난무했을 뿐 30여년간 비밀에 싸였었다. 내부고발자의 소리를 폭로한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Bob Woodward)기자와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기자의 용기있는 기사가 빛을 본 것이다. 당시 내부고발자의 익명은 ‘딥 스로프’(Deep Throat)였다. 익명의 제보자, 즉 내부 고발자를 ‘딥 스로트’로 부르게 된 동기가 흥미롭다.

72년 공전의 히트작 포르노 영화처럼

1972년 당시 헐리웃 일반극장에 ‘딥 스로프’ 라는 성인영화가 최초로 개봉되어 공전의 대히트를 치는 이변이 생겼다. 한국에서는 “목구멍 깊숙이”로 알려지고 있다. 종전의 성인영화는 시간도 15분 정도로 조잡하기 일쑤였으며 일반 대형 스크린 극장서는 상영되지 못했다. 그런데 ‘딥 스로프’는 일반 영화관에 처음으로 개봉되어 수천만명이 감상(?)하는 이변으로 포르노 영화의 대변혁으로 가져왔다. 달랑 2만 5천 달러로 제작된 이 영화가 나중 전 세계로 팔려나가 무려 6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이변도 생겼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기사 제목은 보통 편집부에서 달아준다. 당시 편집 담당 이사였던 하워드 시몬스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익명의 제보자인 비밀정보원의 이름을 당시 인기 절정인 성인영화인 ‘딥 스로프’에서 따와 그대로 붙였다. 당시 <뉴욕타임스>도 이 성인영화를 ‘세련된 포르노’(porn chic)라는 신조어로 이 영화를 높게 평가(?)할 정도였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의 신참 밥 우드워드 기자에게 중요한 단서를 계속 제공한 정보원이 있었는데 기사에서 항상 이 사람을 ‘딥 스로프’(Deep Throat)라고 칭했다. ‘딥 스로프’인 주인공 펠트는 당시 FBI의 부국장인 고위관리였다. 우드워드 기자는 신문 기자 이전에 해군 장교로 재직 중에 백악관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펠트 부국장을 우연히 만났다고 한내부고발자 둘2다. 둘은 또 조지 워싱턴 대학원 동창이었던 관계로 친해졌고 펠트는 이후 우드워드 기자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펠트가 우드워드 기자와 접선 과정도 스파이 영화나 다름없었다. 우드워드 기자가 펠트와 만나고 싶을때 자기 집 창문에 빨간 깃발을 꽂은 화분을 놓았고 펠트가 이를 보면 미리 약속한 지하 주차장에서 다음날 새벽 2시에 만났다고 한다. 한편 만약 펠트가 우드워드를 만나고자 할 때에는 뉴욕 타임스의 20면에 시계를 그려 놓았다고 한다. 우드워드 기자는 이에대해 펠트가 어떻게 뉴욕타임스 20면에 시계를 그려 놓을 수 있었는지 자신은 알지 못했다고 나중 책에서 언급했다. 우드워드 기자가 펠트와 만나 고급 정보를 가져오면 칼 번스타인 기자는 이 정보에 대한 확인 작업을 하여 편집국장 브래들리에게 넘겼다. 가끔 우드워드 기자는 사건 관련해 펠트한테 확인을 받기도 했다. 이같은 팀 워크로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두 기자는 워터게이트 사건 폭로의 공로로 무명의 신참 기자에서 일약 전 미국인에게 알려지는 대기자가 되었다. 이 2명 기자는 1971년 워터게이트 건물 침입 사건부터 1974년 닉슨 사임까지 무려 3년 동안 오로지 이 사건에만 매달렸고 결국 대통령 사퇴를 이끌어 내었다.

첩보영화 같은 취재 활동

워싱턴 포스트의 승리에는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기자 이외에도 당시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이었던 벤자민 브래들리와 사주였던 캐서린 그레이엄도 큰 역할을 했다. 브래들리 편집국장은 미국 역사상 엄청난 사건 기사를 냉철하게 편집해 실어 사건의 전개 과정을 조율해 냈으며, 사주 그레이엄은 워싱턴 포스트의 폐간까지도 각오하고 편집국과 두 기자

▲ 트럼프 대통령

▲ 트럼프 대통령

를 보호하며 닉슨 대통령을 포함해 공화당 정권의 정치적 외풍에 맞섰다. 이미 워싱턴 포스트는 닉슨 대통령의 가족들을 취재하면서 무단침입(?)을 통해 사진을 찍어 가기도 해서 닉슨 대통령에게 반감을 사기도 했고, 펜타곤 보고서를 전량 입수해 뉴욕 타임스와 함께 보도하여 닉슨 대통령이 워싱턴 포스트 기자는 백악관에 절대 들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닉슨 행정 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실제로 닉슨 행정부에서는 워싱턴 포스트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 조사는 물론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해왔던 걸로 알려져 있다. 워싱턴 포스트에 기사를 제공한 취재원 ‘딥 스로트’가 누구였는지는 사건 후 30여년간 미국 정치계 및 언론계 최대의 수수께끼였으며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우드워드 기자와 번스타인 기자는 ‘딥 스로트’가 죽기 전에는 그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겠다고 주장해 왔으나, 2005년 5월 31일 당시 91세였던 마크 펠트 전 FBI 부국장이 미국의 월간지 《배니티 페어》와 인터뷰에서 자신이 ‘딥 스로트’ 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에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그리고 당시 편집국장이던 밴 브래들리는 그가 ‘딥 스로트’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 후 3년 후 2008년 펠트 전 부국장은 사망했다. ‘딥 스로프’(Deep Throat)로 알려진 익명의 제보자인 펠트 FBI부국장은 원래 닉슨 대통령과 사이가 좋았다. 당시 닉슨 대통령은 1924년부터 1972년까지 48년간 FBI 수장으로 재직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에드거 후버 국장을 견제하기 위해 ‘2인자’ 펠트를 중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펠트는 자신이 나중 FBI 국장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1972년 후버가 죽자 닉슨 대통령은 펠트 대신 패트릭 그레이 법무 차관보를 새 FBI국장에 임명했다. 펠트 부국장이 “제 2의 후버”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펠트 부국장은 배신감에 휩싸였다. 그런데 이같은 상태에 워싱턴 DC에 있는 워터게이트 호텔에 자리잡은 민주당 선거본부에 닉슨 재선 캠프와 관련된 인물이 침입한 사건이 발생했다. WP 측에 재선을 준비하던 닉슨 캠프가 민주당 본부가 꾸려진 워싱턴 ‘워터게이트 호텔’에 침입했음을 알렸다.

애초 이 사건은 몇몇 공화당 선거 요원들이 충성심(?)에서 저지른 실수 정도로 끝날 것으로 보였으나 닉슨 대통령의 은폐 의혹이 확대되면서 엄청 난 나비효과를 만들어 낸 2년여의 공방 끝에 닉슨 대통령은 사퇴해야 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교훈은 미국사회에서 내부고발자의 중요성도 다시 느끼게 해주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일개 언론사에 불과했던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의 주류 언론이 되었다. 이같은 ‘딥 스로프’(Deep Throat)라는 용어는 이후 많이 유명해져서, ‘익명의 제보자’, ‘내부고발자’ 라는 뜻의 보통 명사처럼 사용되었다. 또 이런 한가지 사건에 집중한 장기간의 심층 취재와 보도는 매일 마감시간에 쫓기면서 속보 경쟁만 하고 있던 당시의 미국 신문, 방송에 일대 경종을 울리면서 탐사보도 저널리즘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30년 동안이나 ‘워터 게이트’ 정보제공자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보호한 워싱턴 포스트는 언론사의 귀감으로 평가 받아오고 있다. 제보자에 대한 신뢰를 보여 준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 취재원 보호 압권

한편 내부고발자는 비록 양심에 따른 정의의 고발을 했지만 역풍도 만만치가 않다. “정의로운 영웅”이란 칭호도 따르지만, “반역의 배신자”라는 소리도 듣는다. 미국에서 ‘내부고발자’로 나섰다가 본의 아니게 이들 중 상당수가 수감되거나 해외를 전전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2013년 미 NSA의 광범위한 민간인 및 외국 정상 도‧감청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36, Edward Joseph Snowden, 1983-)이 대표적이다. 그는 NSA가 ‘프리즘’ 감시 체계로 수많은 민간인의 개인정보를 불법 수집하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최소 35개국 국가 원수를 도청했다고 폭로했다. 스노든은 중앙정보국(CIA)과 미국 국가안보국(NSA)에서 일했던 컴퓨터 기술자였다. 2013년 그는 가디언지를 통해 미국내 통화감찰 기록과 PRISM 감시 프로그램 등 NSA의 다양한 기밀 문서를 공개했다. 스노든은 자신의 폭로가 대중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대중의 반대편에 있는 일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스노든에게서 NSA 기밀문서를 건네받아 가디언지에 보도한 글렌 그린월드 기자는 2014년 5월 13일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No Place to Hide> 라는 책을 펴냈다. 전세계 24개 국가에 동시 출간된 이 책에는 첩보영화를 방불케하는 스노든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폭로 과정, 그리고 국가 감시 및 주류 언론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그는 사건 직후 미국과 사이가 나쁜 러시아로 도피했다. 이후 6년간 에콰도르, 독일, 프랑스 등에 망명을 신청했지만 모조리 거부당했다. 세

▲ 닉슨 대통령과 1974년 워터게이트로 사임 당시 워싱턴 포스트 1면 기사

▲ 닉슨 대통령과 1974년 워터게이트로 사임 당시 워싱턴 포스트 1면 기사

계 최강대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지 않을 나라는 없다. 20년째 장기 집권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권좌에서 내려오면 그의 처지가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한편 2013년 8월 2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스노든의 망명을 미국의 국익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임시 망명 (3년)을 허용하였다. 또다른 내부고발자는 2010년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에 이라크 전 당시 미국의 민간인 학살을 폭로한 첼시 매닝(32, Chelsea Elizabeth Ma-nning, 1987- )으로 여전히 수감자 신세다. 그는 2013년 35년형을 선고받았다.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가 7년으로 감형했고, 2017년 5월 출소했다. 이후 성전환 수술을 받고 양성 평등 운동가로 변신 했지만 올해 3월 연방대배심 증언을 거부해 다시 감옥에 갇혔다.

매닝은 위키 리크스에서 최대 규모의 미국의 군사 기밀 사항이 포함된 내부 자료를 제공한 인물 이다. 그는 2010년 5월 26일, 이라크 바그다드 현지 군부대에서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체포 되어 미군 교도소에 미결수로서 수감되었다. 2013년 2월 28일, 메릴랜드 주 포트미드 군사법원 에서 브래들리 매닝은 유죄라고 처음 자인했다. 영상인〈부수성을 띤 살인〉과 전쟁 일지와 국무부 외교 전문을 위키리크스에 제공한 사실을 공식으로 인정했다. 브래들리 매닝은 유죄 인정과 함께 35쪽 분량의 모두진술에서 〈부수성을 띤 살인〉과 외교 전문을 공개한 경위와 이유를 상세히 밝혔다. 미국 정부는 아직도 스노든과 매닝의 폭로를 “분명한 간첩 및 반역 행위이며 적들의 선전선동에 악용됐다”고 보고 있다. 미 국방부 산하 연구소 직원이던 대니얼 엘즈버그(88, Daniel Ellsberg)는 1971년 일명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했다. 소위말하는 “펜타곤 폭로의 전설”로 불리는 것으로 미국이 베트남전 개시의 명분으로 삼은 통킹만 사건이 북베트남 공산 정권의 전복을 위해 조작 됐음을 입증한 문서다. 기밀 유출 혐의로 기소당한 그는 같은 해 벌어진 재판에서 무려 징역 115년형을 구형받았다. 2년 후에야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그가 풀려난 이유가 워터게이트 사태로도 정신없었던 닉슨 정권이 전임 정권의 잘못으로 인한 논란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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