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의거 110년… 흉상 제작 16년이 지났는데
설치비용 7000달러 때문에 아직까지
지난달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 110주년 기념일이다. 올해 안 의사는 의거 110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우리는 그의 무덤도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3년 LA한인사회는 ‘안중근 넋이라

▲ 여순 감옥 시절 안중근 의사
도 LA로 모시자’라며 흉상을 제작했으나, 그 넋은 지난 16년 동안 자리조차 잡지 못하고 떠돌고 있는 신세다. 원래 안중근 흉상은 동포사회 헌금으로 2003년에 제작 되었으나, 2012년에 미주안중근기념사업회장을 지낸 윤경학 목사가 사망 하면서 흉상 설치 문제가 미궁에 빠졌다. 최근 안중근 흉상 건립이 그동안 계속 미루어 왔던 것을 두고 안중근흉상건립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원회, 위원장 이종구)와 흉상 보관자 윤자성(고 윤경학 목사 따님) 안중근기념사업회(이라 기념사업회)회장 간에 갈등이 야기되면서 다시 흉상 설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성진 취재부 기자>
최근 동포사회에 ‘안중근 흉상이 OC한인회관에 설치될 것이다’라면서 ‘가든 그로브 시청에 허가를 신청했다’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또 다른 소문은 ‘흉상 설치를 두고 흉상 보관자가 LA총영사관과 만나 협의를 진행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이같은 소문을 들은 추진위원회의 이종구 위원장(전미한인복지회장)은 14일 “그동안 안의사 흉상 설치를 위해 많은 관계자들이 노심초사를 했는데 확인되지 않은 이상한 소문만 타운에 나돌고 있다”면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동포사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두고 후원을 해주기 바라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종구 회장은 과거 안의사 흉상 건립과 설치에 관한 자료철을 보여주면서 “윤경학 목사님 생전에는 흉상 설치 논의가 활발했는데 2012년 윤 목사님이 별세하면서 설치 문제가 요원해 졌다”고 밝혔다.
추진 사업회 갈등으로 미뤄져
고 윤경학 목사는 안중근 의사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의암 윤능효 의사(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여)의 차남으로 1917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생, 해방 후 월남해 교직을 거쳐 농촌 청소년 계몽 운동에 헌신했다. 윤 목사는 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뒤 1975년 도미해 나성초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했으며, 1987년 LA에서 미주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민족의식 고취 등을 위한 활동을 활발히 벌여왔다. 당시 김봉건 전향군회장, 이종구 추진 위원장, 고 한원구 선생, 헨리 전 대한장의사 회장 등이 함께 활동했다. 고 윤경학 목사가 주도해 제작한 안중근 의사 흉상은 지난 2003년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7만 달러 모금 목표를 세우고 추진위원회가 한인사회에서 모금 운동을 벌여 한국에서 제작해 들여와 그해 8월 1일에 한인사회에 처음 공개됐다.
“2003년부터 떠돌이 신세”
안중근 의사의 흉상은 원래 2002년 당시 건립 추진되던 LA 코리아타운 노인 및 커뮤니티센터(이하 노인 센터)부지에 설치하는 계획이었다. 당시 노인센터 건립을 추진한 LA한인회(당시 회장 하기환)도 2002년 5월 28일 자로 기념사업회(당시 회장 윤경학 목사)에게 노인센터 부지안에 안중근 흉상 건립 계획을 허가했다. 그리고 그해 6월 14일 안중근의사 흉상 건립기공식까지 성대하게 치루었다. 그리고 11년이 흘렀다. 2013년 4월 25일 노인센터는 정식 개관했으나 안중근 흉상은 자리잡지 못했다. 흉상이 노인센터 부지안에 건립하기 위해서는 노인센터 부지의 소유주인 LA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안이 있었다. 애초 노인센터 설계도에 안중근 흉상 설치 도면이 포함됐으면 허가가 따로 필요 없었지만 설계 도면에 없었기 때문에 시 허가가 별도로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기념사업회 및 흉상 건립 추진자들과 노인센터 추진 단체인 LA한인회가 이같은 규정을 소홀히 했던 것이다.
또한 흉상 제작을 주도했던 윤경학 목사가 2012년에 사망하면서 기념사업회 활동이 위축되기도 하였다. 이후 기념사업회 회장직은 따님인 윤자성씨에게 인계된 것으로 알려졌지만,추진위원회의 이종구 회장은 “2012년 윤목사님 별세 이후 기념사업회 측과 연결이

▲ 2003년 8월 제작한 안중근 의사 흉상을 두고 관계자들이 기뻐하고 있다.
제대로 되지 못했다”면서 “안의사 흉상 설치 문제를 논의하려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으나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안중근 의사 흉상이 들어서기로 했던 노인센터 마당에는 2014년까지 흉상 기단이 마련되어 있었 고 대리석 상층 기단부와 흉상도 마련된 터라 그당시 설치가 가능했었다. 하지만 LA시 허가를 받기 위해별도의 수속이 필요했다.
노인센터에 흉상이 설치되지 못한 이유의 하나로 이종구 추진위원장은 “당시 설치 비용기금이 7천 달러 정도로 알려졌는데 그것을 중당하지 못해 설치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었다”면서 “당시 그런 사정이 알려졌다면 동포사회가 기금 7천 달러 정도를 못 모았겠는가”라며 한탄했다. 또한 이종구 위원장은 “노인센터를 세우면서 흉상을 먼저 설립하면 공사에 지장을 줄 것 같아 미룬게 당시 발목을 잡게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당시 공사를 한 건축 업체가 도면에 간단한 표시만 했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확인 결과 그런 표시가 없어시 관계자에게 다시 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고 전했다. 그당시 흉상 건립 관련 신문 기사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LA시 허가 받는데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후 노인센터에 안중근 흉상 설치는 끝내 이루어 지지 못했다.
애물단지로 전락한 안중근 흉상
한편 기념사업회의 윤자성 회장은 20일 본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안의사흉상 설치는 조만간 결정해 발표할 계획이다”면서 더이상 설명은 하지 않았다. 하편 윤회장은 이 사안에 대하여 “2014년 2월 흉상을 설치하려다 시 허가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며 지난 2002년 노인센터 건축이 시작될 때 안 의사 흉상 설치 지점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2013년 4월 노인센터 완공 당시 기단까지 만들어 졌기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뜻밖이었다”라며 “시에 문의한 결과, ̒허가된 노인센터 건축도면에는 흉상을 세울 곳이 표시돼 있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허가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2014년 3월 다시 허가를 신청했다”라고 2014년 당시 한인 언론에 밝혔다. 내년(2020) 3월 26일은 안 의사 순국 110주년이 된다. LA동포사회에 많은 사람들은 안중근 흉상이 제대로 설치되어 미국사회에서도 안의사 정신이 깃들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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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 15가지”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3.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4.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5. 군대를 해산시킨 죄
6.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7.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8.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9.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10.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11. 한국이 300만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12.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3.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14.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
15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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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군인이 해야 할 일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함으로써 대한의 독립의지와 동양평화의 뜻을 만방에 알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안의사에게 건국훈장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한국이 일본 식민지가 되기 1년 전인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한국을 강점하려는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 (Корея! Ура!)”라고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 독립 만세”라는 뜻이었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었고 안중근을 도와주던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안중근이 불법적으로 일본 정부에 넘겨져 관동주 뤼순(료준)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함께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별첨 참조)
한국의 천주교회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고 부른다. 즉, 안중근을 한국 교회에서는 모세의 애국심과 바오로의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평가한 것이다. 안중근의 일본인 교도관 다카오 미조부치는 그를 “동아시아의 의인”이라고 평하였다.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노길명 교수는 안중근을 독실한 천주교 신앙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로 평하였다. 한국과 북한은 제15차 남북 장관급 회담(2005년 6월 21~24일, 서울)에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사업 공동 추진’에 합의했다.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에서 안중근 의사 국제평화상을 제정하였다. 안중근이 자신을 존경했던 일본인 간수 지바에게 남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군인이 해야 할 일이다”)라는 글귀는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 중 하나가 되었다. 청산리 전투주역 김좌진은 안중근의 의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