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최측근’에서 ‘뇌물수수’로 구속되기까지…
유재수는
이렇게
몰락했다
<선데이저널>은 1194호 11월 14일자 단독보도를 통해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과 관련한 의혹들이 문재인 정권의 시한폭탄이 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보도 후 2주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 유 전 부시장 관련 의혹들은 청와대 심장부를 겨냥하면서 끝내 27일 자정 구속되고 말았다. 현재 본국에서 제기되는 유 전 부시장 관련 의혹은 본류가 아닌 지류에 불과하다. <선데이저널> 보도대로 검찰은 유 전 부시장 개인비리는 그저 발판일 뿐, 이를 딛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그 윗선을 옭아매고 있다. 일단 수사의 초점은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특별감찰반이 2017년 유 씨의 비리혐의를 포착하고 감찰을 진행하다가 ‘윗선의 지시로’ 돌연 중단한 사실에 집중된다. 유재수 당시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은 감찰이 중단된 뒤 2018년 3월 사표를 제출했지만 그해 4월 국회 정무위 수석전문위원, 7월에는 부산시 경제부시장으로 영전을 거듭했다. 조국 민정수석, 박형철 반부패비서관, 이인걸 특감반장으로 이어지는 당시 청와대 사정라인이 그의 비리에 눈을 감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권력 핵심부인 청와대에서부터 법질서가 무너져 내린 사건이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도 우병우 민정수석이 이석수 특별감찰반이 자신을 감찰한 것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하며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까지 이어졌다. 그런 측면에서 유재수 사건은 문재인 정부의 근간을 무너뜨릴 사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리차드 윤 취재부 기자>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은 2004년 금융위원회에 근무 당시 참여정부 청와대에 파견 나갔다. 청와대에 파견 나간 지 얼마 안 된 어느 일요일, 당번이었던 동료가 순번을 바꿔 달라고 부탁해 대신 출근했다. 그때 한 일이 대통령 집무실에 신문을 넣어 주는 것이었다.
마침 당일 노 대통령이 측근 대여섯 명과 티타임 회의를 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직원(유재수)이 들어와 신문을 주니 노 대통령이 ‘자네는 누군가’고 물었다. 유재수가 ‘공무원’이라 대답하니 노 대통령은 ‘공무원 시각도 알고 싶으니 같이 얘기하자’고 했다고 한다. 그 회의석상에서 유재수가 금융 전문가답게 현안을 잘 설명한 듯하다. 그래서 노 대통령이 ‘앞으로 매주 (일요일) 회의에 와 달라’고 해 유재수는 회의 정기 멤버가 됐고 결국 이것이 계기가 되어 노 대통령 측근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2005년 12월 30일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후 유 전 부시장의 해외순방 때도 노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박근혜 문고리 3인방 싸움 판박이
이후 본지가 보도했던 것처럼 그는 문재인 정부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함과 동시에 금융위원회 최고 요직인 금융정책국 국장에 임명됐다. 그가 금융위 요직에 앉자마자 금융권에서는 그에게 줄을 대려는 움직임으로 분주해졌고, 실제로 금융 쪽 인사를 그가 좌지우지 했다는 소문이다.
그가 청와대 특감반원들의 레이더에 걸린 것은 출장 갈 때 직원들이 그를 공항에 데려다주던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부터다. 특감반원들이 유 전 부시장의 뒤를 캐보니 그가 몇몇 업체로부터 금품 및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의혹이 나왔다. 2017년 하반기에 청와대 특감반이 ‘공무원이 무슨 돈으로 자녀를 장기간 유학 보냈나?’며 유 전 부시장의 계좌 내역을 추궁하는 조사를 마지막으로 돌연 감찰이 중단됐다. 이후 유 전 부시장은 병가 내고 몇 달 쉬다 명예 퇴직했다. 징계도, 수사 의뢰도 받지 않고 연금·퇴직금 다 챙긴 그는 지난해 6월 지방선거 직후 본인과 아무 연고 없는 부산시 부시장이 됐다. 유 전 부시장은 강원도가 고향이다.
여기서 핵심은 누가 감찰 수사를 중단 지시가 있었지 여부로 모아진다. 일단 유 전 부시장의 비위 의혹을 금융위에 알린 인물은 백원우 당시 민정비서관이다. 통보 시기는 2017년 12월로, 유 전 부시장에 대한 반부패비서관실 산하 특별감찰반의 감찰이 중단된 직후로 전해졌다.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청와대 감찰 결과 품위손상 관련 인사에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용범 전 금융위 부위원장은 연락한 인물로 백 전 비서관을 지목했다.
백 전 비서관의 전화를 받고서도 금융위가 평판을 조회해온 민주당에 이를 당당히 숨긴 것을 보면, 당시 백 전 비서관이 사실상 중재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다.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은 원칙대로 수사의뢰 입장을 표명했지만, 돌연 고강도 감찰이 중단된 상황에서 백 전 비서관이 금융위에 사표를 받고 봉합하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 짓도록 일정 역할을 했다는 의심이다.
윗선은 과연 누구냐?
기본적으로는 대통령 친인척을 감찰하는 백 전 비서관이 고위공직자 감시를 맡는 박형철 비서관을 제치고 직접 연락한 점도 이 같은 의심을 사는 대목이다. 재선 국회의원 출신에 친문 세력의 실세인 백 전 비서관이 ‘우리 편’인 유 전 비서관의 문제에 중재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백원우 전 비서관은 문재인 정부 초기 민정비서관으로 근무했는데, 조국 민정수석을 뛰어넘는 파워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 때문에 조국 전 수석을 비롯해 박형철 전 비서관 등과 권력투쟁 양상을 보였다는 설도 있다. 즉 친노인사들과 가까웠던 백 전 비서관인 검찰 출신인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이 감찰에 나서자 무마에 나선 것이라는 해석이다.
현 민정수석실은 민정비서관실, 공직기강비서관실, 반부패비서관실 등 총 세 개로 구성되어 있다. 민정비서관실은 대통령 친인척관리, 공직기강비서관실은 청와대 내부 직원들 감찰 업무, 반부패비서관실은 공직사회 감찰 업무를 주로 한다. 이 중 특별감찰반은 민정비서관과 반부패비서관 산하에 각각 있다. 반부패비서관실은 주로 사정기관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민정비서관실과 공직기강비서관실에는 캠프 출신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정기관 출신 등 다양한 출신 인사들이 있다. 업무가 분리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하나의 수석실 아래 있고,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비리 수사처 등 다양한 현안 등으로 맞부딪칠 수밖에 없어 갈등의 소지는 항상 내재되어 있었다.
규정상 비위 통보는 공문으로 이뤄져야 하지만 비공식적인 전화 통화로 알린 점 역시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특히 백 전 비서관은 당시 유 전 부시장이 특감반 감찰 도중 병가를 내고 잠적했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통상 감찰 대상이 잠적하면 대상자를 파면하거나 수사 의뢰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 전 부시장은 보직해임만 된 채 금융위에 사표를 냈다. 이후 사표가 수리되면서 그는 명예퇴직했고, 별도 내부 감찰은 이뤄지지 않았다. 석연찮은 이유로 감찰이 중단된데 이어 금융위가 유 전 부시장의 비위 사실을 쉬쉬한 정황까지 드러나면서 결국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금융위 사이 의사 전달 과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백 전 비서관의 검찰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조국 당시 민정수석도 자유롭지 못한 처지다. 의혹의 중심에 선 백 전 비서관에게 금융위 통보를 지시한 게 조 전 수석이기 때문이다. 조 전 수석은 지난해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백원우 비서관에게 금융위에게 통제하라고 제가 지시했다”고 밝혔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백 전 비서관은 물론, 조 전 수석에 대한 검찰 조사는 의혹 규명 차원에서라도 필수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정권 몰락의 시작은 민정수석실에서
박근혜 정부의 몰락 시점을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전 정권 청와대에서 일했던 직원들이나 출입했던 기자들은 대체로 2014년 연말을 꼽는다. 당시 한 일간지에서는 이른바 ‘정윤회 문건’으로 불리는 청와대 내부 문건을 보도했다. 사건이 커지자 박근혜 대통령은 문건 내용의 진위보다 문건 유출 과정을 문제 삼으며 ‘국기문란’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면서 검찰 수사가 유출경로를 찾는 것에 맞춰졌다. 이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청와대 내부 권력 투쟁이 외부에 표출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초 민정수석실 내에서 민정비서관실과 공직기강비서관실 간 힘겨루기가 있었다는 것이 당시 일했던 직원들의 대체적인 시선이다.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에서 일했던 한 직원은 “정권 초부터 민정비서관과 공직기강비서관 사이의 힘겨루기가 있었고 이것은 문고리 3인방을 내세운 정윤회씨와 공직기강비서관을 내세운 박지만씨와의 대리전 성격이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문건이 겨냥했던 것은 정윤회씨였고, 이 문건을 작성한 인물은 공직기강비서관에서 일했던 경찰 출신 박관천 전 경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내부 문제가 발단이 되어서 정권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문건 보도 이후 우병우 전 민정수석에게 사정 권력이 쏠리면서 사실상 측근 비리 통제가 어려워졌고 이것이 정권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참여정부도 비슷했다. 참여정부 초기 민정수석은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대통령 친인척 비리 파문 등으로 1년 만에 민정수석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이명박 정권 시절 첫 민정수석도 4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문 정부 3대 게이트 수사 불가피
한편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원내대표-중진의원 연석회의를 주재하면서 “이른바 ‘조국 게이트’는 워밍업 수준이었던 것 같다. 그 후 속속 밝혀지는 이 정권의 무시무시한 비리와 부패, 권력형 범죄는 말 그대로 영화에서나 나올만한 스케일”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유 전 부시장 감찰 무마는 그야말로 친문무죄, 반문유죄의 전형”이라고 주장했다. 나 원내대표는 “이 정권이 왜 그토록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매달리고, 왜 그토록 조국 전 장관을 임명하려고 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공포의 퍼즐이 맞춰지고 있다”며 “유 전 부시장 감찰 무마와 황운하 관권 선거는 모두 조 전 장관이 민정수석 재직시에 있던 일”이라고 했다. 또 “아직 크게 이슈화되진 않았지만 우리들병원 사건이 또 있다. 유재수 감찰 농단, 황운하 선거 농단, 우리들병원 금융농단에 이르기까지 세 가지 3종 친문농단게이트가 이 정권의 민낯”이라며 “우리 당에서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 국회 국정조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여당에게 요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교안의 어설픈 벼랑 끝 ‘단식투쟁’ 전술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공안검사 출신의 가소로운 민주투사 흉내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 처리 등을 저지하기 위해 청와대 앞 단식농성에 들어간 지 일주일 만에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다. 한국당은 오는 11월 27일자로 국회 본회의에 부의된 공직선거법 개정안 저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선거법은 내년 총선에 적용될 ‘게임의 룰’로, 제1야당의 합의 없이 이를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한국당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한 선거법 개정안에 반대하고 있다. 당 일각에서 ‘협상을 통한 패스트트랙 법안 타협’ 필요성이 거론되지만, ‘패스트트랙 법안 철회’를 전제로 한 협상이 아니면 무의미하다는 강경론이 대체적인 분위기다.
문제는 황 대표의 단식이 계속되더라도 한국당을 뺀 여야 4당이 공조해 패스트트랙 법안을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선거법 개정안의 공통분모를 찾기 위한 여야 4당의 물밑 접촉이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정치권에선 황 대표의 단식이 패스트트랙 법안 처리 저지의 실현을 노렸다기보다는 최근 지도부를 향한 당내 비판을 잠재우고 당 장악력을 높이는 ‘대내용’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또한 패스트트랙 법안이 처리될 것임을 예견, 추후 대여 투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단식이라는 말도 있다.
실제로 줄곧 비판의 목소리를 내오던 한국당 내의 목소리가 줄었다. 특히 황 대표에게 비판적이었던 김무성, 홍준표 전 대표가 단식현장을 찾았다. 불안했던 리더십이 안정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황 대표의 단식에도 불구하고 선거법 처리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황 대표의 리더십은 다시 도마에 오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당초 단식 명분의 하나로 제시했던 지소미아 종료 철회는 이미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문재인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유예’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하더라도, 단식의 이유가 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소미아 종료가 일본의 수출 규제에서 빚어졌고 미국과 일본이 우리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면서 갈등이 커졌는데, 제1야당 대표가 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파적 이익을 앞세워 미국과 일본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끼니를 끊는 단식은 절박한 상황에 놓인 정치적 사회적 약자가 선택하는 최후의 방법이다. 황 대표의 단식에서 이런 의미를 찾아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