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독립운동가 황기환선생 유해봉환 둘러싼 국가보훈처의 어이없는 해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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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공동묘원에 안치된 애국지사 유해 한국으로 봉환하겠다며 낸

이장요청서에 엉뚱한 이름이…

▲ 황기환선생

▲ 황기환선생

한국 국가보훈처가 인기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주인공 ‘유진초이’의 실제인물인 애국지사 황기환선생의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하기 위해 뉴욕주법원에 승인을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보훈처는 황 선생이 한국독립을 위해 노력한 애국지사이므로, 현재 연고자가 없는 황 선생의 유해를 돌보겠다며, 한국이장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황선생의 영어이름이 ‘얼 K황’임에도 불구하고, 법원에 제출한 서류에서 ‘칼 K황’이라는 엉뚱한 이름을 적는 어이없는 실수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가보훈처가 사후 약 100년 만에 애국지사를 국내로 모시면서 커다란 결례를 범한 것은 물론 승인절차까지도 지연이 불가피하다. 특히 이 청원서는 지난달 중순 뉴욕총영사직을 마치고 이임한 박효성 총영사가 서명한 것으로 기재돼 있으나 당시는 박 총영사가 이임한 뒤여서 서명위조 등의 의혹등도 제기되고 있다.
안치용(시크릿 오브 코리아 편집인)

유럽등지에서의 독립운동을 그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황기환선생, 지난 1995년 한국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황선생의 유해가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조국 땅을 밝기 위한 첫 발걸음을 뗀 것으로 확인됐다. 황 선생이 이국땅 미국 뉴욕에 잠든 지 96년, 황선생의 유해가 발견된 지 11년만에야 애국지사를 한국현충원에 모시기 위한 구체적 인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6일 뉴욕주 퀸즈카운티법원에 마운트올리벳공동묘원을 상대로 이 공동묘원에 안치된 ‘칼 H 황’씨의 유해이장을 승인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보훈처는 이 청원서에서 ‘국가보훈처는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애국지사와 제대군인을 위한 대한민국정부의 기관’이라고 밝히고 ‘법원은 고인의 유해를 대한민국 대전의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하는 것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 황기환선생의 묘비, 영어이름이 ‘얼 K 황’이라고 기재돼 있다.

▲ 황기환선생의 묘비, 영어이름이 ‘얼 K 황’이라고 기재돼 있다.

고인의 이름 철자와 행적도 달리 기재

국가보훈처는 ‘황 씨의 유해는 뉴욕 퀸즈 매스페스의 그랜드애비뉴 65-40 소재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원의 웨스트론 2484묘역에 안치돼 있다’며 황 씨의 묘비명 등의 사진 2장을 증거로 첨부했다. 이 사진과 묘역번호 등으로 유추해 볼 때 국가보훈처가 이장승인을 요청한 ‘칼 K 황’씨는 애국지사 황기환 선생임이 틀림없다.

국가보훈처는 ‘황 씨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훈장중 하나인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으며 한국이름은 황기환이며, 한국에서 태어나 1923년 4월 17일 뉴욕 퀸즈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국가보훈처는 ‘황씨가 1919년 프랑스에서 김규식선생의 비서로 활동한 것은 물론 영국, 미국 등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고 밝히고, ‘한국정부는 2013년 황 씨의 모역을 방문하고, 그의 애국심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유해를 한국에 모셔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특히 국가보훈처는 ‘2016년 7월 1일부터 황씨의 유해봉환 승인을 받기 위해 친인척이나 후손을 찾았지만 연고자를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이장에 반대할 사람이 없다’고 설명하고, ‘한국정부가 황씨 유해를 한국의 국립현충원에 안장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이 청원서에서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첫째 무엇보다도 황선생의 영어이름을 잘못 기재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엉뚱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청원서에서 마운트올리벳에 잠들어 있는 ‘칼 K 황’씨의 유해를 이장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 황선생의 묘비에 적혀 있는 영문이름은 ‘칼 K 황’이 아니라 ‘얼 K 황’씨이다. 국가보훈처가 묘비명과 다른 사람의 이름을 청원서에 적고 엉뚱한 사람을 이장을 요청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셈이다. 특히 국가보훈처가 증거로 첨부한 황선생의 묘비사진 2장에도 ‘얼 K 황’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보인다. ‘칼 K황’은 묘역은 이 공동묘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장승인을 받을래야 받을 수가 없다. 이에 따라 이 청원서는 이장대상자의 이름을 다시 정정해야 할 판이다. 첫발부터 삐끗한 것이다.

청원서 내 고인의 공적등도 기존 알려진 내용과 다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심지어 같은 청원서 내에서도 상반되는 내용이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마디로 말하면 국가보훈처의 청원서가 엉망진창인 셈이다. 국가보훈처는 청원서의 6항에서 ‘황씨가 1919년 5월 미군에 자원입대해 세계 제1차 대전에 참전했다’고 주장했다. 세계 제1차 대전은 1918년 종전된 것을 감안하면 고인이 1919년 5월에 미군에 입대, 1차대전에 참여했다는 것은 어이없는 주장이다.

1995년 건국훈장추서 불구 ‘행적몰랐다니’

또 국가보훈처는 ‘황선생의 독립활동 등은 뉴욕한인교회가 교인명부에서 황선생의 이름을 발견하고, 2010년 묘지를 찾을 때까지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가보훈처가 황선생의 독립활동을 높이 평가,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한 것은 1995년이므로 황선생의 독립활동을 2010년까지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또 뉴욕한인교회가 황선생의 묘를 발견한 것도 2008년임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 국가보훈처는 지난 6일 뉴욕주 퀸즈지방법원에 황기환선생의 유해이장 승인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황선생의 이름을 ‘얼 K 황’이 아닌 ‘칼 K황’으로 잘못 적은 것으로 드러났다.

▲ 국가보훈처는 지난 6일 뉴욕주 퀸즈지방법원에 황기환선생의 유해이장 승인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황선생의 이름을 ‘얼 K 황’이 아닌 ‘칼 K황’으로 잘못 적은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이 청원서에 승인한 사람은 최근 이임한 박효성 뉴욕총영사로 밝혀졌다, 국가보훈처가 제출한 청원서 부속서류에서 박총영사는 ‘대한민국 뉴욕총영사로서 청원서를 모두 읽었으며, 국가보훈처를 대신해 위 청원서 제출을 승인한다. 모든 내용이 사실이다’고 기재하고, 11월 29일 서명을 하고 공증까지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서류만 본다면 박전총영사가 황선생의 이름이 잘못 기재된 청원서를 읽고도 이를 바로 잡지 않고 청원서제출을 승인한 셈이다.

하지만 이 부속서류의 서명자는 박총영사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박전총영사는 11월 중순 뉴욕에서 이임해 서울에서 장원삼 후임총영사와 업무인수인계를 했고 장총영사는 11월말 뉴욕에 도착했다. 부속서류에 따르면 박총영사는 11월 29일 뉴욕의 퀸즈에서 서류에 서명한 것으로 돼 있지만, 그 당시 박총영사는 뉴욕에 없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누군가가 박총영사의 서명 등을 위조했거나 서명일자를 위조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박총영사가 이임 전 부속서류에 서명을 했다면 황기환선생의 영어이름을 잘못 기재했다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고인의 유해는 사후 85년만에야 발견됐지만, 국가보훈처의 어이없는 잘못으로 고국을 찾는 길은 또 다시 우여곡절을 겪게 된 것이다. 황선생의 묘지를 발견하게 된 것은 뉴욕 독립운동의 성지로 유명한 뉴욕한인교회의 교인명부 덕택이었다. 장철우 목사가 찾아낸 교인명부에 나타난 황선생의 흔적은 단 2줄, ‘황기환, 서울에서 출생, 1923년 4월 18일 사망, 장지 GRAVE NO.2484 IN PLOT WESTLAWN, MOUNT OLIVET CEMETERY’ 딱 2줄이었다. 장목사는 그 직후 교인 몇 명과 직접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원을 방문, 황선생의 무덤을 찾아냈다. 그때가 2008년, 애국지사가 가신지 85년 만에 마침내 후손들의 방문을 받은 것이다.

2피트가 채 못 되는 묘비에는 한글로 ‘대한인 황기환 지묘’라고 세로로 새겨져 있었으며, 그 아래에 ‘EARL K WHANG. BORN IN KOREA, DIED APRIL 19, 1923’라는 영문이 가로로 기재돼 있다. 국가보훈처도 애국지사가 뉴욕에 안장된 사실을 알고, 지난 2013년 4월 12일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원을 방문, 고인의 묘비와 묘역 등을 직접 확인했다. 또 공동묘원 관리소에서 매장기록을 살핀 뒤 뉴욕한인교회를 방문, 혹시 황선생의 후손이 미국에 생존해 있는지 등을 문의하기도 했다.

타국에서 외롭게 숨진 황기환 선생은 누구?

그렇다면 황기환선생은 어떤 인물일까? 고인은 평안남도 순천출신으로 10대 후반인 1904년 미국으로 이민 온 뒤, 1917년 세계 제1차 대전 때 미군에 자원입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1차 대전 뒤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파리로 이동,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리에 설치한 주파리위원부에서 김규식선생을 도와 파리강화위원회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했으며 1920년 영국에서 영국국회의원 17명을 포함한 친한파 영국인사 62명을 규합, 대영제국 한국친우회를 결성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고인은 1921년께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미국으로 건너와 이승만, 서재필 등을 보좌하며, 워싱턴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다 1922년 뉴욕으로 이주, 뉴욕한인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인은 1919년부터 사망 직전인 1923년까지 5년간 유럽과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것이다.

▲ 국가보훈처가 뉴욕주 퀸즈법원에 제출한 서류에는 박효성 전 뉴욕총영사는 국가보훈처의 위임을 받아 청원서를 검토했고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고 지난 11월29일 서명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이때는 박전총영사는 이미 한국으로 돌아간 뒤여서 서명 또는 서명일자가 위조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국가보훈처가 뉴욕주 퀸즈법원에 제출한 서류에는 박효성 전 뉴욕총영사는 국가보훈처의 위임을 받아 청원서를 검토했고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고 지난 11월29일 서명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이때는 박전총영사는 이미 한국으로 돌아간 뒤여서 서명 또는 서명일자가 위조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국가보훈처는 1995년 황규환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면서 황선생의 행적을 보다 상세하게 밝혔다. 국가보훈처가 웹사이트에 공개한 공훈록에 따르면 ‘평남 순천사람인 황 선생은 미국에 유학가서 공부하다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미군에 자원입대, 출전했다, 그 뒤 1919년 6월 프랑스로 귀환한 뒤, 이승만이 워싱턴에 설치한 구미주차한국위원회의 대표 김규식이 프랑스 베르사이유에서 개최되는 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 오자, 김복등과 함께 대표단의 사무를 돕고, 김규식의 서기장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독립 선전활동을 펼쳤다’고 밝혔다.

또 프랑스 파리의 한국선전단 선전국장으로 불어잡지를 창간, 한국의 독립필요성을 세계 여러나라에 호소하고, 파리대학 교수인 우락을 초청, 인권위원회를 조직하고, 프랑스 지리학회 세미나에서 ‘원동 한중 화평이 받는 압박’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또 그해 10월 런던에서 매켄지와 윌리엄스가 발기한 한국친우회에 참여, 활동했으며 임시정부 외무부 추자 영국런던위원으로 임명돼, ‘영일동맹과 한국’이라는 책을 편집,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정책에 따른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뒤 워싱턴 구미위원회 본부에서 이승만과 서재필을 도와 독립운동을 하다 1923년 뉴욕에서 타계했다고 전했다.

프랑스한인회가 재외동포재단의 도움을 받아 올해초 발간한 ‘프랑스 한인 백년사-꼬레앙 백년의 항해’에서도 황선생의 활약을 접할 수 있다. 프랑스한인백년사는 ‘1918년 11월 세계제1차대전의 포성이 멎고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자, 3월 13일 김규식이 가장 먼저 파리에 도착해 한국대표관을 열었고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뒤 한국대표관을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로 개칭하고, 이관용을 부위원장, 황기환을 서기장에 임명했다’고 적고 있다.

후손들의 불충, 영원히 미국법원 남을 듯

특히 황선생은 일제에 의해 러시아 무르만스크로 끌려갔던 한인노동자 2백여명의 일본강제송환을 막은 것으로 드러났다. 1919년 10월12일 영국군을 따라 산타엘라나호를 타고 영국 에든버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황기환 서기장이 영국으로 달려가 강제송환에 항의하고 프랑스에도 간청해 한국인 37명을 프랑스로 데려왔고 1919년 11월 19일 이들을 중심으로 재법한국민회[프랑스한인회]를 출범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황선생의 노력이 프랑스한인이민의 시발점이자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것이다.

이들 한인들은 월급의 일부를 파리위원회에 기부했고 1920년 1월 허정, 나기하등의 유학생이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으나 이듬해, 즉 1921년 황기환이 미국으로 떠나고 파리위원회가 사실상 활동을 종료하면서 임정과의 연결통로가 끊겼다고 적고 있다.

▲ 국가보훈처 웹사이트에 게재된 황기환선생 공훈록

▲ 국가보훈처 웹사이트에 게재된 황기환선생 공훈록

한편 뉴욕총영사관은 5년여 전에도 총영사 몰래 변호사선임계에 서명을 하고 당시 소송장에도 피고를 엉터리로 적었던 사실이 드러났었다. 뉴욕총영사관은 지난 2013년 10월 4일 뉴욕주 법원에 ISEA커뮤니케이션과 앤드류 최 대표이사를 상대로 5만달러를 돌려달라며 소송을 제기했으나 이당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파견된 전성오영사가 공관장인 손세주 당시 뉴욕총영사에게 일체 보고하지 않은 채 뉴욕총영사관 명의를 사용, 독단적으로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밝혀져 공관직원들의 기강해이가 극에 달했던 것으로 드러났었다. 손세주총영사는 이 같은 사실이 시크릿오브코리아에 보도된 뒤 뒤늦게 소송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하며 소송취하지시를 내렸고 그 다음날 소송이 곧바로 취하됐다.

이때 뉴욕총영사관은 ‘지난 2012년 5월 7일 ISEA 커뮤니케이션과 앤드류 최씨에게 10만달러를 지급하기로 하고 같은 해 12월 31일까지 한류프로그램을 제작, 각 방송사 방영까지 책임지는 계약을 체결하면서 선금 5만달러를 지급했으나 계약사항이 전혀 이행되지 못했다면서 5만달러를 즉각 반환해 달라’고 요구했었다. 그러나 이때 전 영사는 총영사 몰래 총영사관명의를 도용한 것은 물론 소송장에는 피고의 이름조차 잘못 적었던 것으로 드러났었다.

ISEA COMMUNICATION USA CORP를 ISEA COMMUNICATION CORP로, 이 회사대표의 이름이 앤드류 조 임에도 불구하고 앤드류 최로 기재해, 소송이 성립되지 않을 뿐더러, 설사 피고의 무대응으로 궐석재판으로 승소를 하더라도 존재하지 않는 법인과 개인을 대상으로 한 소송이어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 판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파격적 조건으로 거액계약을 하고 선금까지 받은 조씨는 뉴욕총영사관에 파견됐던 해당계약기관의 공무원이 한국으로 돌아간뒤 뉴욕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해당공무원의 자녀를 데리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공관장 몰래 공관을 도용, 소송을 제기한 것은 물론, 피고의 이름을 잘못 기재한 엉터리소송이었던 것이다. 당시 손세주 총영사는 ‘나는 몰랐던 일, 영사의 독단적 행동’이라고 밝혔고, 전 영사는 ‘총영사 몰래 공관명의로 변호사선임계에 서명했다, 제 잘못이다.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애국지사 황기환은 이국땅에서 잠든 지 96년, 유해발견 11년 만에 드디어 고국방문이 현실화되고 있다. 하지만 꽃길을 깔아드려도 모자랄 판에, 국가보훈처가 선열의 이름마저 엉터리로 적는 바람에 미국법원에 영원히 그 불충의 기록을 남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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