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한국일보 창업주 장재구, 동생 장재민 회장에 보낸 공개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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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장재구-장재민 형제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시작됐다’

▲ 미주 한국일보 창업 발행인 장재구 전 회장

▲ 미주 한국일보 창업 발행인 장재구 전 회장

미주한국일보의 창업 발행인이자 실제적으로 오늘날 미주한국일보 발판을 구축한 장재구 전 회장이 아우인 장재민 현 미주한국일보 회장을 상대로 공개편지(1)를 통해서, 지난 2013년 8월 5일 횡령‧배임 혐의로 한국에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2년 5개월간 수감 생활을 한 후 성탄절 특사로 2015년 출소 후 재판 관련 자료를 재검토한 결과 ‘잘못된 과정’ 다 드러났다면서, 이 과정에서 장재민 회장과 서울경제신문 임원들은 ‘진실’을 은폐했다고 지적했다. 장재구 회장은 당시 판결문에 적시된 ‘ 횡령금 119억원(미화 약 1천 2백만불)’의 내역 중 55억원(미화 약 550만불)은 장재민 회장이 미국으로 가지고 갔다며, “55억원은 누구의 자금인가?”라고 진실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장재구 회장은 장재민 회장에게 미주에 송금해 간 55억원과 용역비 20억원을 주주가 지급금으로 허위 계정 했음을 인정하고 자금 출처와 송금 과정의 적법 여부를 밝히라고 촉구했다. 이번 공개편지(1)는 지난 2002년 장재구 전회장이 장재민 회장과 함께 당시 동생 장재국 한국일보 회장을 퇴출시킨 “제 1의 형제의 난” 이후 이번에는 서로가 대결로 나타난 “제 2의 형제의 난”으로 볼 수 있다. <특별취재반>

이번 공개편지(1)는 장재구 전회장이 본보에 전면광고로 게재하면서 일차적으로 미주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본보 27면 광고 참조) 장재구 전회장은 지난해 6월 9일 미주한국일보 창간 59주년을 맞이할 때 별도로 <미주한국일보 창간 50주년을 맞아 한분 한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는 전면 광고를 게재하면서 “백상 한국일보 창간의 숨은 큰 뜻을 밝혀 두고자 한다”면서 약 350명의 한인사회 각계 인사들과 전, 현직 사우들의 성명을 수록하면서 감사의 뜻을 표명했다. 당시 ‘미주한국일보 창업 발행인 장재구’의 명의로만 게재된 광고를 본 국내외 한인 언론계와 일부 독자들은 ‘장재구 전회장과 장재민 회장간에 문제가 발생했구나’로 풀이했다. 그런데 이번 공개편지(1)이 게재되면서 장재구 회장과 장재민 회장간의 전면전 서곡(?)이 나타난 것이다.

제2차 ‘형제의 난’ 개봉박두

장재구 전회장은 이번 공개편지(1)는 상황에 따라 시리즈로 계속할 것을 예고하면서 “전, 현직 사우들과 동포사회 많은 유지분들의 충언을 듣고 수차례 해명과 약속 이행을 촉구하였으나 답변이 없어 고심 끝에 공개편지를 보낸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약속을 지켜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불행한 일을 사전에 해결하기를 충고한다”면서 “민, 형사상의 모든 법적 책임은 장재민 회장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장재구 전회장은 이번 공개편지를 통해서 ‘장재민 회장은 언론사 대표로서 동포사회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또 ‘백상(고 장기영 사주의 호) 정신에 부끄럽지 않게 공정한 보도를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회장직은 어떻게 맡게 되었는가?’라고도 물었다.

장재구 전회장은 지난 2013년 당시 구속되기 전 2012년 미국에 와서 동생인 장재민 미주한국일보 회장과 만나 한국일보와 미주한국일보 주식을 서로 맞바꾸는것을 논의했던 것으로

▲ 미주 한국일보 30년사에 수록된 초창기 수록 내용

▲ 미주 한국일보 30년사에 수록된 초창기 수록 내용

알려졌다. 당시 한국일보 주식은 장재구 회장이 40%, 장재민 미주한국일보 회장이 29%, 서울경제 신문이 29%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주한국일보 주식은 장재구 전회장이 50%, 장재민 회장이 50%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논의에서 장재구 전회장이 가진 미주한국일보 주식을 장재민 회장에게 주고 반대로 장재민 회장이 가진 한국일보 주식을 장재구 전회장에게 주는 방식이다. 그 같은 주식 교환은 장재구 전 회장이 한국일보 주식을 더 취득해 경영권을 공고하게 하는 한편 상암동 DMC 입주를 위한 자금 마련 때문으로 풀이됐다. 서울경제 매각 등 계열사 매각을 통해 창간 58주년을 맞이하는 2012년 해 6월에 맞춰 한국일보 제 2의 창간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일보 노조의 불만으로 고발되어 1년 후 2013년 구속 당하게 된다. 본보는 이번 장재구 전회장의 공개편지(1)와 관련해 장재구 전회장과 장재민 회장에게 질의서를 보냈다.

미주 창간 50주년 감사광고가 서곡

한국일보를 1954년에 설립한 고 장기영 사주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다. 첫째는 장강재(작고) 전 한국일보 회장이고 둘째가 장재구 미주한국일보 창업 발행인 겸 전 회장, 셋째가 한국일보 미주 본사 장재민 회장, 넷째는 장재국 전 한국일보회장, 다섯째가 장재근 전 일간스포츠 회장이다. 이들 중 둘째인 장재구 회장과 셋째인 장재민 미주본사 회장은 오래 전부터 미국에 나와 한국일보 미주지사를 운영해 한국에서는 한때 “해외파”로 불리워 왔다. 이들 해외파 형제들은 지난 90년대까지 국내로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울의 한국일보가 4천억원 대의 부채를 지는 등 신문사의 존폐 위기까지 거론될 정도에 다다르자 “해외파”의 서울 진입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제 1차 한국일보 판 ‘왕자의 난’으로 언론계선 불렸다. 당시의 상항을 ‘미디어 오늘’의 보도로 소개한다.

지난 2002년 1월 29일 한국일보 서울본사 건물 7층 회장실에서 한국일보사 주주총회가 열렸다. 이날 주총에서는 둘

▲ 장재민 미주 한국일보 회장/ 뒷면은 장재구 전 회장의 5 0주년 감사광고문

▲ 장재민 미주 한국일보 회장/ 뒷면은 장재구 전 회장의 5 0주년 감사광고문

째 장재구 당시 서울경제 회장의 한국일보 본사 입성 작전이 전개되었으며, 이에 넷째인 장재국 회장은 버티기 작전으로 나왔다. 한국일보의 주주총회는 장씨 일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가족회의나 다름이 없었으나 이날은 한쪽 형제가 다른 형제와 회장 자리를 두고 대결했다. 이날 주총의 계획은 장재구 회장 측과 장중호 당시 한국일보 상무측에서 장재국 회장에게 사퇴를 권고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국일보 판 형제의 난’의 마지막 한판 대전이 벌어진 것이다. 장재구 회장 측은 장재국 회장에게 ‘명예롭게 퇴장키 위한’ 장장 7시간 동안의 사퇴권고와 설득을 벌였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가자, 공식적으로 해임에 관한 주총의안을 심의하기 시작해 불과 20분 만에 ‘장재국 회장 해임안’을 전격 통과시킨 것이다.

이같은 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상 언론사 회장이 주총에서 해임 당하는 초유의 사태를 기록하고 말았다. 언론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은 ‘문제의 주총’에 대해 한국일보 측 관계자는 “최대 주주인 장중호 상무 측과 장재구 회장 측이 주총에서 장 회장에게 자진 사퇴하도록 하는 편이 낫다고 보고 수 차례 이를 권했으나, 장재국 회장은 ‘안 하겠다’고 버텨 결국 7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 끝에 오후 8시 40분 주총을 공식 개회해 해임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른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날의 장재국 회장 해임안은 장재구 회장, 장재민 미주본사 회장이 장중호 본사 상무와 함께 동의해 통과됐다.

‘동지에서 원수’로 돌아선 두형제

원래 “해외파”인 장재구 회장과 장재민 회장이 소유한 한국일보 본사의 지분 으로는 장재국 회장을 사퇴시킬 수 없었다. 여기에 장중호 상무의 지분이 월등히 많기에 이 같은 작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장재구 회장 측은 조카의 힘을 빌어 넷째 동생 장재국 회장을 해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와관련, 당시 한국일보 측은 “주주들 입장에서 장재국 전 회장은 한국일보가 수천억원의 부채와 경영부실을 초래한 데 대한 책임이 크기 때문에 한국일보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대안으로 장재구 회장이 한국일보를 맡아 투자 등을 통해 회생시킬 수 있기 위해 장재국 회장의 퇴진을 요구했던 것”이라고 설명했었다. 한편 장재구 회장은 장재국 전회장을 퇴출시킨후 한국일보 회장으로서 정식 출근하면서부터 노조, 기자협의회와 만나 회사의 구조조정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언론계의 관심을 모았었지만 끝내 몰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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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신문을 이용할 수 없다”

실종된 창업주 백상 장기영의 언론관

▲고 장기영 사주 흉상

▲고 장기영 사주 흉상

이 말은 대한민국 언론사에서 크게 족적을 남긴 한국일보를 창업한 장기영 사주가 1954년 6월 9일 부터 《한국일보》라는 새로운 신문 제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을 때 창간사에서 사용한 말 이다. 한국 언론사에 기념비적 문구다. 지난해 6월 9일은 미주한국일보 LA미주본사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창간 5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해외에서 한글말로 발간된 일간지로서 50년 역사를 지내왔다는 사실은 미주한인 이민사에서도 자랑스런 역사이다. 한국일보는 대한민국에서 한때 최고 최대의 일간지였다. 그 한국일보의 미주판 LA본사의 미주 한국일보도 한 때 해외 최대 한인 일간지였다. 한국일보와 미주한국일보가 국내와 해외에서 최고의 신문이 된 것은 그 신문의 뿌리인 장기영 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창업한 한국일보는 국내 모든면에서 새롭고 창의적이고 내일을 여는 번영과 꿈의 신문이었다. 장기영 사주는 대한민국 언론 사상 최초로 기자를 공개적으로 채용하는 새로운 기자상을 탄생시켰다. ‘기자 사관학교’라는 별명을 듣는 한국일보였다. 기자 공채를 시작했고 학력 제한을 두지 않고 수습기자를 뽑았다. 그리고 여기자가 가장 많았던 신문이었다. 한국일보 역사에서 장기영 사주의 족적은 독특하고 특출한 전설이다. 그의 호는 백상(百想), 즉 ‘백가지 생각’이라는 뜻처럼 한국일보 초창기에 발행인‧편집인‧편집국장 그리고 기자를 겸하면서 ‘많은 생각’으로 신문사를 키워냈다.

한국일보는 언론사였지만 사업에도 특출한 수완과 기량을 벌였다. 1957년에는 한국일보사 주최 제 1회 미스코리아 대회를 개최하여 미스 유니버스대회로 출전을 시키면서 국내에 새로운 미인 여성상을 만들어 냈다. 1959년에는 미국의 빙상 무용단 “홀리데이 온 아이스”를 초청하여 당시 중앙청 뒷 마당에 특설링크를 만들고 우리나라 사상 초유의 외국 피겨 아이스쇼를 공연하여 당시 한국 사회를 놀라게 하였다. 한국일보는 국내에서 문학인의 등용문인 신춘문예를 받는

▲창업자 고 장기영 사주는 74년 LA지사를 방문해 격려했다.(가운데 좌측은 장재구, 중앙은 고 장기영사주

▲창업자 고 장기영 사주는 74년 LA지사를 방문해 격려했다.(가운데 좌측은 장재구, 중앙은 고 장기영사주

곳이고, 봉황대기 전국고교 야구 대회, 프로바둑기전 명인전을 주최했다. 1965년에 시작한 백상예술대상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종합예술상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1973년부터 창간 2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대한산악연맹과 공동으로 한국 에베레스트 등반 계획을 세워 1977년 고상돈의 한국 최초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을 이룩했다. 이같은 한국일보는 70, 80년대까지는 국내 최대 수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신문이었고,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누구나 알아주는 신문이었지만, 2000년대 이후부터는 급격히 사세가 기울어 창간 50주년인 2004년에는 ‘4대 일간지’에서 밀려나 ‘조‧중‧동’이 되면서 사라져 갔다.

한편 미주한국일보 LA본사의 창간은 장기영 사주의 둘째 아들 장재구 회장이 1969년 6월 9일 자로 LA인근 스튜디오 시티에서 일간 신문을 발간으로 시작됐다. 여기에는 국제 정세에도 밝은 장기영 사주가 미주 한인 이민의 증가를 예견해 한국일보를 해외로 내보낸 깊은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1965년 케네디 이민법 개정으로 한인들의 대량 이민물결을 예상한 장기영 사주는 미국내 한인사회에 한국일보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이다. LA에 미주 한국일보 본

▲ 미주 한국일보 창간 사옥(11638 벤투라 블러버드 소재)

▲ 미주 한국일보 창간 사옥(11638 벤투라 블러버드 소재)

사를 창설한 장재구 회장은 70년 5월 1일에 워싱턴 지사, 그리고 5월 14일에는 샌프란시스코 지사, 71년 3월 3일에는 시카고 지사, 9월 1일에는 캐나다 토론토 지사가 차례로 설립돼 북미 대륙에 최초로 한국일보 미주 네트워크를 최초로 구축했다. 장재구 회장은 부친 장기영 사주를 닮아 자신이 발행인과 사장 “그림자 편집국장”, 기자로서 미주 한국일보 LA본사를 야심차게 운영했다. 그는 신문 기사가 될만한 사건이 생기면 아낌없이 투자했다. 기자들과 함께 토론도 벌이고 지면 쇄신에도 열성을 보여 ‘미주한인사회의 정상의 신문’을 만들었다. 한인 이민의 미국 정착을 선도하고 한인들의 목소리를 주류사회에 전달하는 미주한국일보는 70년대 80년대 90년대 그리고 밀레니엄 2000년에 이르면서 그야말로 미주한인 최대 신문으로 막강한 ‘파워’를 지닌 언론이었다. 한국일보에 기사가 보도되어야만 인정을 받게되고, 심지어 기자 회견이 개최되어도 그 장소에 한국일보 기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기자회견도 시작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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