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상 설치 장소 두고 갑론을박
‘당초 계획대로
노인회관 설치가 답이다’
오는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10주년이 된다. LA동포사회에 많은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안중근 의사를 공경해 왔으며, 2003년에는 안의사 흉상도 제작하여 ‘미주독립운동 1번지’ LA에 모시고 한국인의 정체성 확립에도 도움이 되고 미국사회에서도 안의사 정신이 깃들기를 바라고 있다.(본보 1195호, 2019년 11월 21일 보도) 원래 안중근 흉상은 미주동포사회 헌금으로 2003년에 제작되었으나, 2012년에 미주안중근기념사업회장을 지낸 윤경학 목사가 작고하면서 흉상 설치 문제가 미궁에 빠져버렸다. 그러던 중 안중근 흉상이 LA한국교육원 1층 로비에 최근 개관된 한국역사문화체험관내에 설치된다는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2003년 당시 구성된 안중근 흉상 건립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원회, 위원장 이종구)측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종구 위원장(전미 한인복지회장)은 “안의사 흉상 제막을 추진위원회와 동포사회 여론 수렴없이 마음대로 설치하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면서 “이번 흉상 제막에 LA총영사관이 임의로 개입했다는 의혹도 있다”고 밝혔다. <성진 취재부 기자>
안의사 흉상 설치 문제는 2012년에 미주안중근기념사업회장을 지낸 윤경학 목사가 작고하면서 미궁에 빠져버렸는데, 문제의 흉상은 작고한 윤 목사의 따님인 윤자성씨가 보관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윤자성씨는 아버지 윤 목사에 의해 미주안중근기념사업회장직을 승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사실에 대하여 추진위의 이종구 위원장은 최근 “윤자성씨가 고인의 의해 회장직을 승계 받은 사실도 공식적으로 기념사업회에 승인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안다”면서 “중요한 것은 안의사 흉상은 동포사회 성금으로 제작된 것으로 이 흉상 설치나 제막식은 윤자성씨 개인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지난해부터 ‘안중근 흉상이 OC한인회관에 설치될 것이다’라면서 ‘가든 그로브 시청에 허가를 신청 했다’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또 다른 소문은 ‘흉상 설치를 두고 흉상 보관자가 LA총영사관과 만나 협의를 진행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이같은 소문에 대하여 이종구 위원장은 최근 “안의사 흉상 보관자가 흉상 설치를 두고 지난해부터 LA총영사관과 접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이 같은 제의를 받은 LA총영사관은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니라 동포사회 관계 단체나 관련 단체들과도 상의를 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한편 2월 15일 현재 일부에 알려진 사실은 오는 3월에 안의사 흉상 제막식이 LA한국교육원 1층 에서 개최된다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흉상은 원래 2002년 당시 건립 추진되던 LA 코리아타운 시니어 및 커뮤니티 센터 (이하 노인센터)부지에 설치하는 계획이었다. 당시 노인센터 건립을 추진한 LA한인회(당시 회장 하기환)도 2002년 5월 28일 자로 안중근기념사업회(당시 회장 윤경학 목사)에게 노인센터 부지 안에 안중근 흉상 건립 계획을 허가했다. 그리고 그해 6월 14일 안중근의사 흉상 건립 기공식까지 성대하게 치루었다. 그리고 11년이 흐른 2013년 4월 25일 노인센터는 정식 개관했으나 안중근 흉상은 자리잡지 못했다. 흉상이 노인센터 부지안에 건립하기 위해서는 노인센터 부지의 소유주인 LA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안이 있었다. 애초 노인센터 설계도에 안중근 흉상 설치 도면이 포함됐었으면 허가가 따로 필요 없었지만 설계 도면에 없었기 때문에 시 허가가 별도로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기념사업회 및 흉상 건립 추진자들과 노인센터 추진 단체인 LA한인회가 이같은 규정을 소홀히 했던 것이다.
“2003년부터 떠돌이 신세”
한편 흉상 제작을 주도했던 윤경학 목사가 2012년에 사망하면서 기념사업회 활동이 위축되기도 하였다. 이후 기념사업회 회장직은 따님인 윤자성씨에게 인계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추진위원회의 이종구 위원장은 “2012년 윤목사님 별

▲ 2002년 당시 노인센터에서 세워지기로한 당시 조감도에 표시된 안의사 흉상
세 이후 유족 측이 기념사업회측과 연결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면서 “안의사 흉상 설치 문제를 논의하려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으나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안중근 의사 흉상이 들어서기로 했던 노인센터 마당에는 2014년까지 흉상 기단 이 마련되어 있었고 대리석 상층 기단부와 흉상도 마련된 터라 개관 당시 설치가 가능했었다. 하지만 LA시 허가를 받기 위해 별도의 수속이 필요했었다. 노인센터에 흉상이 설치되지 못한 이유의 하나로 이종구 추진위원장은 “당시 설치 비용기금이 7천 달러 정도로 알려졌는데 그것을 충 당하지 못해 설치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 었다” 면서 “당시 그런 사정이 알려졌다면 동포사회가 기금 7천 달러 정도를 못 모았겠는가”라며 한탄 했다. 또한 이종구 위원장은 “노인센터를 세우면서 흉상을 먼저 설립하면 공사에 지장을 줄 것 같아 미룬 것이 당시 발목을 잡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당시 공사를 한 건축업체가 도면에 간단한 표시만 했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확인 결과 그런 표시가 없어 LA시 관계자에게 다시 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고 전했다.
그 당시 흉상 건립 관련 신문 기사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LA시 허가 받는데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후 노인센터에 안중근 흉상 설치는 끝내 이루어 지지 못했다. 한편 지난 15일 정문섭 LA 코리아타운 시니어 및 커뮤니티 센터 이사장은 본보 기자와 만나 “원래 안의사 흉상은 우리 노인센터에 자리잡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까지도 기단 자리가 남아 있다” 면서 “안의사 흉상이 노인센터에서 자리잡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추진위원회의 이종구 위원장도 15일 “노인센터에서 안의사 흉상을 환영하고 있으니 그곳에 안주할 수 있도록 동포사회가 성원해주기 바란다”면서 “LA총영사관도 동포사회의 여론에 귀를 기울 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종구 위원장은 지난해 본보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과거 안의사 흉상 건립과 설치에 관한 자료 철을 보여주면서 “윤경학 목사님 생전에는 흉상 설치 논의가 활발했는데 2012년 윤 목사님이 별세하면서 설치 문제가 요원해졌다”고 밝혔다.
윤경학 목사 작고 후 설치 문제 요원
한편 기념사업회의 윤자성 회장은 지난해 본보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안의사 흉상 제막에 앞서 기자회견을 통해 동포사회에 알린다고 했으나, 이번에 조치는 그런 사전 작업도 없이 LA총영사관에 의해 LA한국교육원에 일방적으로 설치하려고 하는 바람에 동포사회의 지적을 받게 됐다. 윤자성 회장은 지난해 11월 20일 본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안의사

▲ 2003년 안의사 흉상의 제작을 완료하고 동포사회에 공개했다. 당시 기념사업회 윤경학 목사(앞줄 오른편에서 두번째)
흉상 설치는 조만간 결정해 발표할 계획이다”면서 더 이상 설명은 하지 않았다. 당시 윤 회장은 안 의사 흉상을 두고 LA총영 사관과의 접촉에 대한 본보 질의에 대하여 답변을 거부했었다. 노인센터와 관련 부분에 대해서는 ‘허가된 노인센터 건축도면에는 흉상을 세울 곳이 표시돼 있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허가가 필요 하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결국 2014년 3월 다시 허가를 신청했다”라고 2014년 당시 한인 언론에 밝혔다. LA에서 안중근기념사업회를 설립했던 고 윤경학 목사는 안중근 의사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의암 윤능효 의사(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여)의 차남으로 1917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생, 해방 후 월남해 교직을 거쳐 농촌 청소년 계몽 운동에 헌신했다. 윤 목사는 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뒤 1975년 도미해 나성초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했으며, 1987년 LA 에서 미주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를 설립해 민족의식 고취 등을 위한 활동을 활발히 벌여왔다. 당시 김봉건 전재향향군회장, 이종구 추진위원장, 고 한원구 선생, 헨리 전 대한장의사 회장 등과 함께 활동했다. 고 윤경학 목사가 주도해 제작한 안중근 의사 흉상은 지난 2003년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7만 달러 모금 목표를 세우고 추진위원회가 한인사회에서 모금 운동을 벌여 한국에서 제작해 들여와 그해 8월 1일에 한인사회에 처음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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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어떤 인물인가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이다. 천주교 신자로서 세례명은 토마스(Thomas, 토마스, 한국식 도마이다. 본관은 순흥, 고려 시대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이다. 동학 농민 운동에서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군을 정벌하는데 함께 참여하였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매국노 척결을 주장하던 그는 의병대를 찾아다녔다. 그 뒤 황해도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계동청년회에 가입하고, 곧 계동 청년회의 임시사찰에 선출되었다.
1908년 7월 전제덕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 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9년(융희 3) 초,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쪽 손의 약손가락(넷째 손가락) 한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라고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독립만세”라는 뜻이었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피체되었고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 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안중근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관동주 뤼순(료준)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 해 3월 26일 순국했다. 29세 나이었다.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 과정에서 재판소 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