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특집4] 코로나와 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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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해 오늘 잠시 떨어져 있는것’

코로나19 사태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강요하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도 보지 못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못만나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영적생활에 크게 지장을 받아 당황하고 있다. 코로나 19 재난을 맞아 교회를 바라보는 신자들의 생각도 많이 달라지게 될 것으로 보여진다. 이를 보는 신앙인들의 글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1. 이탈리아에서 온 편지

“내일 더 안아주기 위해 오늘 잠시 헤어져 있는거야”

총보다 무서운 바이러스와의 전쟁

김혜경(세레나‧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 프란시스코 교황이 코로나 극복을 위해 기도에 나서고 있다.

▲ 프란시스코 교황이 코로나 극복을 위해 기도에 나서고 있다.

지금 이탈리아는 준-전시 상황이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지난 1월 말까지만 해도 이탈리아에서 코로나19 확진자는 로마에 관광 온 중국인 2명 뿐이었다. 이탈리아 보건당국은 중국만 차단하면 될 줄 알고 유럽에서 가장 먼저, 2월 1일자로 중국을 오가는 모든 항공편의 운항을 중단시켰다. 그런데 갑자기 2월 21일, 롬바르디아 주 코도뇨에서 현지인을 통한 지역사회의 감염이 확인된 후 상황은 급변했다. 이후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확진자와 사망자의 수는 급기야 3월 9일 밤, 주세페 콘테 총리로 하여금 3월 10일부터 4월 3일까지, 외출 금지령을 선포하게 했다. 하루 더 지난 11일, WHO는 팬데믹을 선언했다. 현지 일각에서는 제 2차 세계대전 때보다 더 엄중하다고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제2차 세계대전 시에도 미사가 중단된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 사태로 바티칸과 산마리노 공화국을 포함한 장화 반도는 적색등이 켜지고, 일단 4월 3일까지 각종 스포츠 행사는 물론 음악회, 종교 집회와 장례식 등 모든 유형의 모임을 금하고, 학교와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 이탈리아인들의 일상이 하루 아침에 바뀐 것이다. 어디나 무지한 사람의 돌발적인 행동은 있는지라, 초기에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있기도 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역으로 작용했다는 비판이 안에서부터 나왔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중국 탓”이라며 자기네끼리 뭉친 것이 되레 바이러스의 전국화와 세계화에 기여한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차별주의는 혐오감을 조성하기에, 바이러스는 언젠가 지나가지만 차별은 흉터로 남는다는 말도 나왔다. 이탈리아에 바이러스가 확산된 시점을 두고도 의견이 분분했으나, 그걸 따지는 것이 이제와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다소 자조적인 말도 흘러나왔다. 문제는 앞으로 바뀌게 될 삶의 패턴에 대한 입장이다. 세계관이 크게 달라져 중국 혹은 뉴욕의 일이 언제든지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것, 배달음식과 온라인 쇼핑, 스트리밍의 시대가 한계에 봉착하고 과거로 전향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 이번 팬데믹에 대한 공동의 기억이 정치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것, 친구와 두려움에 대한 개념이 바뀔 거라는 것, 끝으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제4차 산업혁명의 문턱에서 결국 인간은 한계에 봉착하고 나약한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마지막 항목에 대한 공감대는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선택과 포기, 새로운 용기와 희망이 그것이다. 살릴 수 있는 사람만 살리겠다는 국가행정과 의료 시스템은 선자에 해당되고, 교회는 후자에 해당된다. 닫았던 성당의 문이 열리고, 미사는 중단되었지만 본당 사제에 따라 성체 거동이 시작되고 개별기도가 증가했다. 연대와 사랑의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어, “내일 더 안아주기 위해 오늘 잠시 헤어져 있는 거야”라고 외치며 플래시 몹을 아파트 발코니에서 집단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산 에지디오 공동체를 비롯한 각종 자선단체들은 바이러스에 취약한 노숙자와 저소득층 사람들을 돌보는데 발 벗고 나섰다. 결국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아마도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메타노이아,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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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부와 교회에게 묻는다

언제부터 교회가 세상 정부에게 허락받고 예배를 드렸는가

주일성수가 무너진 한국교회의 통곡

김진호 감독(기독교대한감리회제25대 감독회장, 원로목사)

정부로부터 교회에 공적 모임인 주일 예배를 자제해 달라는 요청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주일 예배당 문을 쉽게 폐쇄하고, 인간의 편리함과 코로나19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수많은 교회가 영상 예배로 각 가정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일생을 목회하고 성도들에게 주일 성수를 강조해온 한국 교회의 원로로서 너무나 마음 아픈 심정으로

▲ 한국에서 대부분 교회가 문을 닫고 있다.

▲ 한국에서 대부분 교회가 문을 닫고 있다.

이 글을 쓴다. 일본강점기에도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순교해 온 한국교회요, 6‧25의 전쟁 속에서도 주일 성수를 강조하고 지켜 온 한국 교회가 코로나19의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정부의 자제 요청에 쉽게 문을 닫아버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너무나도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물론 오늘의 한국 교회를 섬기고 애쓰는 현직 목회자들이 고민하며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고민하고 기도한 결과가 교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었다. 정부의 교회를 향한 예배 모임 자제는 잘한 처사인가? 처음부터 코로나19가 중국에서 시작되었을 때, 정부는 바로 결단하지 못하였고, 마스크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의 지시에 교회가 순순히 따르고 있는 것이 과연 잘한 일일까.

또한 정부나 사회는 오늘의 교회를 신천지 집단과 동일시해선 안 된다. 신천지 집단은 한국교회가 경계하는 이단 집단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바이러스의 위험이 있다고 자제요청을 한다면 정부 기관도, 회사도, 공장도 문 닫아야 하고, 지하철도 버스도 운행을 중단해야 한다. 만일 코로나19가 진정되지 않고 3개월, 6개월 동안 지속될 때도 교회는 계속 문 닫고 있을 것인가. 성도의 주일 성수는 인간이 편리한 대로 지키는 주일성수가 아니다. 이런식으로 교회가 인간 위주로 주일 성수를 한다면, 많은 성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자기 좋은대로 각자의 편리대로 예배드린다고 누가 책망이나 권면을 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 교회가 세상 정부에게 허락받고 예배를 드렸는가. 교회가 정부에 속한 기관인가. 자유대한민국이 통제국가인가. 아니면 세상 사람들의 여론이 두려워서인가. 왜 교회가 예배로 인하여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죽인 권세자들이 성도들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목숨 걸고 예배하며 믿음을 지켜오지 않았는가?

로마 정부의 핍박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지하 카타콤에서 300년간 신앙의 지조를 지켜온 교회가 기독교가 아닌가. 지금도 북한에서, 또는 이슬람권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예배하고 찬송하는 그들을 생각해 볼 때,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재 모습은 너무 부끄럽지 않은가. 교회가 모든 면에서세상으로부터 칭찬받을 수는 없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이 하신 일을 세상으로부터 오해도 받고, 미움도 받고, 배척도 받았다. 교회는 인간보다, 세상보다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 내가 원로로서 마음 아픈 충고를 오늘의 한국 교회를 향하여 호소한다. 주일 성수만은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예배를 드리면서 나라를 위해서,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고통당하는 수많은 환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더 기도하고, 또 다른 후원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러한 위기일수록 교회는 교회로서 정체성을 상실하면 안 된다. 다른 종교가 어떠하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한국교회는 성숙하고 절제된 자세로 주일성수를 지켜나가는 것이 바른 자세다. 오늘의 교회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의 공포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는 무능하고 무력한 한국 교회가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큰 각오로 결단하기를 진심 으로 바란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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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재앙시대에 교회는 어디서 무얼 하는가

이 시대에 하나님은 예배 속에만 계시는 것일까?

인류 ‘대재앙의 시대’에
과연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가?

최 영 목사(정직한사회만들기)

2020년 1월 28일 중국으로부터 인류의 재앙이 되는 코로나19가 시작되었다. 전 세계에 10만이 넘는 확진자가 나왔고, 그 중 중국이 9만의 확진자와 3천만이 넘게 죽었다. 코로나19는 중국에 근접한 한국을 그냥 두질않고 전 국민을 고통에 내몰고 있다. 이와 같은 재앙의 주범은 신천지라는 신앙집단에 의해 위기의 심각성을 국가적으로 증폭시켰다. 이로인한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 손실과 상처는 기록적이다. 사실 코로나19 보다 더 무서운 것은 거짓으로 인권을 유린하며 포교 하는 신천지 집단이 더 고민거리다. 코로나19가 연일 생명을 죽음에 내몰고 있을 때, 사회도처에서 봉사와 온정의 손길이 쏟아졌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자원봉사자로 대구에 갔고, 배우들은 돈을 보내고, 시민들은 손수 마스크를 제작하여 나누었다. 기업들은 연수원과 모텔들은 방을 치료실로 내주었다. 물론 뒤 늦게 몇 대형 교회들이 수련원을 병실로 약속했다. 이 재앙의 시대에 과연 교회는 예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가? 죄로 망가진 세상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던진 예수의 책임적인 모습을 교회는 보여주는가?

코로나19 확진자가 7천 5백명이 넘어가고 50명이 넘개 죽는 동안 교회는 어디에 있었는가? 상당 수의 교회들이 정부의 시책대로 예배를 중단하면서도 “교회가 체제에 무능하게 굴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만을 키우는 자도 있다. 어떤 교회에는 헌금수입 때문에 예배를 중단할 수 없다는 배경이 숨어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코로나19의 방역정책에 설득력이 약하다. 당국이 예배를 폐쇄하는 것이 아니고 잠시 방역을 위해 거리두기에 협조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지도자들이 예배 탄압같은 소리로 목청을 올리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이번 코로나가 태풍을 일으키면서 한국교회는 선두에 서지 못하고 사회적 존재감에 연약했다. 교회는 사건해결의 선두주자로서 헌금을 모아 물품과 마스크를 보내든지, 치료비를 보내고 먼저 교회건물까지도 치료실로 내주어주지를 못했다. 몇 교회가 겨우 뒤따라가는 모양이었다. 신천지 집단은 코로나19를 전파하는 채널과 징검다리 역할을 하여 사회악으로써 당국과 국민의 분노를 사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국민의 상처를 치료하는 국민 감동을 얻어야 했다.

교회는 언론의 중심 소재가 못되었고, 국민의 눈에 보이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예배를 신앙의 전부로 착각하는 것을 성서는 비판한다. 이사야는 “무엇하려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왜 성전 뜰만 밟고 다니느냐?…고아와 인권을 찾아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1:11-17). 예수께서는 제사보다 자비를 앞세우고 있다. “동물을 바치는 제사가 아니고 자비를 베푸는 자선이다.” 라고 예배주의를 비판했다(마12: 7). 예배는 바보와 노예로 만드는 수단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 예수의 윤리적인 책임성을 닮게 하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코로나19 시대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꼭 예배 속에만 계실까? 아니면 대구라는 현장에 계실까? 교회는 사람들의 고통의 소리를 듣고 그 속에 들어가야 한다. 헌금에 손실이나고 교회가 격리되어 예배를 못드려도 고통 속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건물 속에 있지 않고 고통의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지 말고 성문밖에서 죽어가는 예수의 치욕을 함께 겪어야 한다. (히13: 11-12). 이 재앙에 교회는 불의와 싸우는 예수를 바라보며, 사회를 과학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 책임존재의 역할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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